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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94. 태평양 전쟁>

by leeesssong 2020. 12. 28.

ㅇ서론

ㅡ 나는 펠렐리우 작전과 오키나와 작전에서 우리 부대가 수행했던 역할과 관련해 공개된 역사서와 문서는 말할 것도 없고 공개되지 않은 것들까지 광범위하게 자료를 수집해왔다. 그러나 이 자료들에 기술된 내용은 내가 전투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것들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는데, 나는 그 사실이 매우 놀라웠다.

ㅡ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끔찍한 공포를 잊지 않고 오랫동안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전우들은 조국이 안전하게 평화를 즐길 수 있도록 해주려고 고통을 다했으며 의무를 다했다.

조국이 누리는 평화는 그토록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었다.

우리는 그 빚을 지고 있고 깊이 감사해야 한다.


ㅇ 본론

제1부. 펠렐리우 전투 : 주목받지 못한 전장

제1장. 해병대원의 탄생

 

ㅡ 몸에 흉터나 출생모반이나 그 밖에 특이사항이 있는지 물었다. 왜 그런것까지 묻냐 물어보니 
"자네가 포탄을 맞고 쓰러졌다고 쳐, 그리고 마침 인식표도 자네 머리와 함께 날아가버렸는지 없어졌어.
자네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흉터나 문신 등을 보고 자네인줄 알아볼거야."

 

제2장. 전투준비

 

ㅡ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기지안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서 하루하루 보내던 우리가 기지 바깥에서 일어나던 일을 제대로 잘 이해했던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젊은 청춘의 순진한 낙관주의였을지도 모른다. 설마 그런일이 우리에게 일어날까 싶었던 것이다.

우리의 목숨이 조만간 꺼져 버릴지 모른다는 사실, 혹은 아직 젊은 나이에 불구의 몸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ㅡ 독립전쟁 당시 포지게곡, 텍사스 독립전쟁의 알라모, 1차 대전 격전지였던 벨로우드, 그리고 과달카날, 타라와는 미국 국민의 용기와 희생 정신의 상징으로 미국인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게 되었다.

그러나 펠렐리우 전투는 너무나도 끔찍했고 타라와의 희생에 2배가 되지만, 슬픈 사실은, 과연 펠렐리우를 확보하기 위한 전투가 필요했었던가 하는 의문이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ㅡ 전선에서는 아무리 장교라도 우아함이나 특혜는 누리지 못햇다.

ㅡ 글로스터 전투에 참가한 고참병들은 몇주 동안 습지에서 계속 비를 맞으며 전투를 했었다.

대부분 바짝 말랐으며, 몇몇은 극도로 쇠약했다. 겨드랑이와 손목과 발목에는 열대성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ㅡ 우리가 파부부의 불편함과 좌절을 이길 수 있었던 요인은 2가지라고 나는 믿는다.

첫째, 제1해병사단은 엘리트 전투집단이었기에 규율이 엄격했고, 단결과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둘째, 사단의 구성원이 상대적으로 젊었다.

사기고 높았던 이유는 일본군을 향한 불타오르는 적개심이었다.

이 적개심은 내가 아는 한 모든 해병대원의 공통된 감정이었다.

ㅡ 우리는 하루에 한번씩 개인화기 청소를 했다.

ㅡ 열악한 생활환경과 까다로운 규율에 대해서 나는 누구 못지않게 큰소리로 불평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만일 그런 사전 조치가 없었다면 펠렐리우와 오키나와에서 받았던 정신적, 육체적 충격과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없었을 것 같다.

지휘관들은 우리가 이기려면 그리고 살아남으려면 좋든 싫든 간에 그 진인함 괴롭힘에 병사들이 현실적으로 훈련되어 있을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ㅡ 전투에 참가하는 군인이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다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현실적인 관점에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3장. 가자 펠렐리우 섬으로

 

ㅡ 내 배낭에 들어있던 것은 접어놓은 판초, 양말 한켤레, K레이션 2개, 소금, 카빈 소총의 여분 총알, 수류탄 2개, 만년필과 작은 잉크병, 방수 포장지 속에 넣은 편지지, 칫솔, 치약 튜브 작은 것, 방수 포장지 속에 넣은 가족들 사진 몇장과 편지 몇통 그리고 던가리 캡이 전부였다.

ㅡ 또다른 장비와 옷은 위장용 커버를 씌운 철모, 해병대 엠블렘이 달린 무거운 초록색 던가리 재킷, 동일한 소재의 바지, 총닦는데 쓰는 낡은 칫솔, 얇은 면양말, 가벼운 각반이었다.

ㅡ 권총벨트에는 응급처치 때 사용할 붕대를 넣은 파우치, 수통 2개, 카빈의 15연발탄창 2개, 그리고 방수 가방에 멋진 황동 나침반을 넣었다. 오른쪽 벨트에는 케이바를 꽂은 칼집을 달고, 수류탄도 하나 안전레버를 벨트에 걸었다.

ㅡ 카빈 소총의 개머리판에는 예비용 탄창 2개를 붙여두었다. 총검은 들고다니지 않았다.

카빈 소총에 맞는 총검 장착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배낭 바깥으로는 캔버스로 싼 야전삽을 달았다.

ㅡ 상륙 전에 얼마나 긴장했던지 창자가 꼬인듯이 아팠다.

ㅡ 펠렐리우섬 상륙작전이 과연 필요했는지 여부를 두고 논쟁이 끊이질 않았다.

펠렐리우 섬에서의 공방전이 2차 대전에서 해병대가 싸웠던 가장 격렬했던 전투였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변함이 없다.

이 산호초 섬에서 우리 군과 대치한 뒤로 일본군은 나중에 전술을 바꿨다.

상륙하는 우리 병력을 총력을 기울여서 해변에서 저지하려고 했던 기존의 전술을 버렸다.

그들은 중앙 고지를 중심으로 섬 깊숙한 곳에서 동굴과 터널을 파고 견고한 방어 진지를 구축한 다음, 각각의 진지들이 서로 지원하는 복잡한 방어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4장. 지옥으로 진격하다

 

ㅡ 전투현장에서 기다림은 중요한 요소이다. 함포사격의 굉음이 커지면서 긴박감도 점점 고조되었고 식은땀이 흥건하게 흘렀다. 다리에 힘도 풀리고 속도 메슥거렸다.

ㅡ 처음 맞닥뜨린 집중포화 속에서 나는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어떤 감정을 느꼈다.

절대적인 무력감이었다. 시간이 도대체 얼마나 지나갔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온몸에서 힘이란 힘은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ㅡ 나도 나중에는 적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다룰 정도로 무감각해질까?

전쟁이라는 것이 원래 적 병사의 시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고 시체를 노략질할 정도로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것에 더는 신경을 쓰지 않게 될 날이 머지않아서 나한테도 왔다.

ㅡ 일본군은 반자이 돌격 대신에 탱크와 보병을 효과적으로 결합한 공격을 들고 나왔다.

다른전투에서 일본군이 보여줬던 모습과는 다르게 나올 것임을 일러주는 첫번째 경고였다.

ㅡ 일본군은 하루 종일 대포, 박격포, 기관총을 동원해 제5연대가 상륙한 해안 일대를 잠시도 쉬지 않고 공격했다.

ㅡ 해안 작업부대는 최선을 다했지만 보급 물자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데 필요한 암트랙을 많이 잃어버리는 바람에 보급 작전에는 차질이 빚어질 수 밖에 없었다.

ㅡ 푸른빛이 도는 흰색의 총탄 궤적이 머리 위로 마구 지나갔다(미군 기관총의 총탄 궤적은 붉은색이다.)

ㅡ 제발 우리가 공격에 나서기 전에 적의 기관총 사격이 멈추길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는 그 위치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진지 위로 조금이라도 머리를 내밀었다가는 거대한 낫에 싹둑 잘리고 말 터였다.

ㅡ 모든 병사들이 우리가 막 통과해 온 태풍과도 같은 그 무서운 탄막에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역전의 고참병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ㅡ 겁에 질린 그들의 눈을 보면서 나는 두려움에 덜덜 떨던 내 모습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고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웃을 수 있었다.

개활지에서 포탄 세례를 받는 것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한층 더 무서운 공포다.

ㅡ 소총부대에서는 밤에 자기 주변 대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진지에서 무단으로 이탈하거나, 암호를 곧바로 또 정확하게 대지 못할때는 아군의 총에 죽을 수 있다는 건 상식으로 통했다.

ㅡ 일본군은 대포와 박격포를 쏘고 난 뒤에는 동굴 진지의 입구를 강화 방호벽으로 닫아버렸다.

ㅡ 두 문의 박격포가 특정 목표 혹은 적이 있는 구역에 포탄을 날리고 각 보병 소대의 경기관총이 자기 소대의 전방을 샅샅이 훝는다.

보병이 진격을 시작하기 직전에 우리 박격포반은 박격포의 포격을 멈춘다. 기관총 사수도 보병 머리 위로 사격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격을 멈춘다. 그러면 보병은 천천히 이동을 시작한다.

ㅡ 자기 중대에 대해서 나는 가졌던 것과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부대와 부대원들을 자기 집과 가족처럼 느낀다는 것은 특히 중요했다.

전투에서 살아남을지 죽을지는 대원들 사이에 얼마나 깊은 신뢰가 형성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갈리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이는 사기를 높여주는데 강력하게 기여했다.

ㅡ 자기의 목숨 가치가 보잘것 없는 것으로 다뤄지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은 고독감을 극한으로 증폭시켰다.

제5장. 또 한번의 상륙작전

 

ㅡ 전투현장에서의 표준적인 절차는 성실과 신뢰라는 기본적인 신조를 바탕으로 했다.

2인 1조의 참호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믿고 자기 목숨을 서로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다.

한 사람이 잠을 자면 다른 한사람은 경계를 서야했다.

ㅡ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치료에 전념하는 이런 모습이야말로 우리 해병 부대에 동행하던 해군 위생병의 전형이었다.

우리가 위생병을 진심으로 존경한 것도 당연했다.

ㅡ 내가 쏜 총에 맞은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던 얼굴을 내가 똑똑히 보았다는 사실이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갑자기 전쟁은 매우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바뀌어 버렸다.

전쟁과 이 전쟁에 동반되는 모든 것에 대한 역겨움이 가슴속으로 마구 밀려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런 인간적인 감정에 휩쓸리는 것은 어리석은자의 감상주의일 뿐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전투경험 덕분이었다.

ㅡ 적병을 내 손으로 사살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하다니! 내가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는게 부끄럽고,

동료들이 내가 이런 생각을 잠시나마 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ㅡ 대원들은 모두 전리품을 챙겨 들고 희희낙락거렸고, 서로 챙긴 것을 비교하기도 했다.

그런 행위는 모든 전쟁이 다 그렇듯이 야만적이고 비문명적이었다.

ㅡ 전쟁은 공포의 지옥이었다. 

사상자가 늘어나고 전투가 질질 늘어짐에 따라, 거기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평온한 일상의 자유를 누릴 가능성도 갈수록 줄어드는 암담한 지옥이었다.

이 상태에서는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목숨도 의미가 없었다.

비전투요원이나 민간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환경 아래에서 살아야 했다.

제6장. 용감한 병사들 스러져 간다

 

ㅡ 포병부대가 목표 구역 전체에 포격을 가했다.

중대도 전방에 박격포를 맹렬하게 쏘았으며 기관총 세례도 퍼부었다.

포격이 중단되면 제5연대 3대대의 보병이 산을 기어올랐다.

그러나 곧 일본군의 포화가 퍼부어지고, 보병의 전진은 중단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박격포를 쏘아서 보병이 퇴각하는 걸 지원했다.

ㅡ 적 저격병들은 최대한 신속하게 들것을 들고 뛰는 아군 병사들을 노리고 총격을 가했다.

부상병 한명을 옮기려면 들것을 네명이 들어야 했다. 힘들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ㅡ 의식이 있는 부상병들은 우리가 자기를 무사히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고 믿으며 놀라울 정도로 침착함을 유지했다. 암트랙이나 구급지프가 있는 곳까지 최대한 신속하게 옮겼고, 그러면 부상병을 대대 야전병원으로 이송했다.

이렇게 환자를 일단 태워 보내고 나면 우리는 탈진 상태로 바닥에 드러누워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ㅡ 대원들은 신뢰의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우리는 부상병을 내버려 두고 달아나겠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그랬다가는 일본군 병사가 부상병을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괴롭히다가 죽일게 뻔했기 때문이다.

ㅡ 총기 발사와 관련된 규정은 엄격하게 지켜야만 했다. 까딱하면 어둠 속에서 아둔을 쏠 수도 있었기 떄문이다.

아군 동료와 적병이 육박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터져 나오는 필사적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ㅡ 실제로 바지에 똥을 쌌다. 그 무렵 우리는 모두 심각한 설사증세를 보였다.

이야기의 전모를 듣고 나면 결코 웃을 일이 아니었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ㅡ 사람의 살이 썩는 고약한 냄새를 낮이고 밤이고 하루 종일 맡아야 하는 끔찍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이게 어떤 것인지 온전하게 전달하기는 어렵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간에 시체는 사후 몇시간만에 부풀어 오르면서 무서운 악취를 풍긴다.

ㅡ 적의 시체가 일종의 랜드마크 기능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전사자의 수를 보고 그 지점이 전선에서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람의 목숨이 무의미하게 희생되고 있음을 새삼 떠올렸다.

그 풍경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보다 훨씬 더 나를 억눌렀다. 배설물 냄새도 지독했다.

악취의 근원 중 하나는 양쪽이 폐기한 대량의 전투식량의 썩은 악취였다.

ㅡ 파리 개체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DDT가 전투 지역에 처음 살포된 곳이 바로 펠렐리우 섬이었다.

그래도 파리 성충의 개체수가 감소했다고 실감할 수 없었다.

역겨운 파리들은 너무도 크고 비대했다. 손으로 젓거나 빈 깡통을 던져서 쫓아내려고 해도 달아나지 않았다.

커피를 따라 놓은 수통컵에 붙어있다가 안으로 미끄러져서 커피 위로 둥둥 뜨기도 했는데,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먹기 전에 음식을 집어들고 휘휘 흔들어서 거기에 달라붙은 파리를 떼어내야 했고, 달아나지 않는 녀석들도 있었다. 이 동작을 반복해야 했다.

언젠가 시체에 붙어있던 거대한 청파리들이 떼를 지어서 내가 먹는 C레이션에 달려들때는 구역질이 났다.

ㅡ 전장에 내리는 비는 살아있는 것들을 한층 더 비참하고 황량하게 만들며 죽은 것들은 한층 더 애잔하게 만든다

ㅡ 전우와 상관을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내가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그 시련을 끝내 이기고 돌파할 수 있었던 점은, 물론 운이 좋았기도 했지만, 해병대 특유의 규율, 단결심, 그리고 혹독한 훈련 덕분이었다 확신한다.

나는 또한 현실주의도 배웠다. 일본군 병사만큼 거칠고 헌신적인 적과 싸워서 이기려면 그들과 똑같이 거칠고 헌신적이어야 한다.

ㅡ 전투의 스트레스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전투의 격렬함이 아니라 전투의 지속기간이라고 생각한다.


제2부. 오키나와 전투 : 최후의 승리

제7장. 휴식과 충전

 

ㅡ 시가전 및 개활지에서 탱크와 함께 공조 활동 중심으로 이루어진 훈련, 상륙연습과 다양한 소화기를 쏘았으며 박격포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제8장. 진격의 서막

 

ㅡ  이미 상륙작전을 한차례 겪은 고참병의 소중한 경험 말고도 아군의 압도적이며 어마어마한 상륙작전의 규모 역시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눈이 닿는 모든 지점에 전함과 무장 수송함이 정박해 있었으며, 하늘을 누비는 아군 항공기도 수백대나 되었으니까

 

제9장. 집행유예

 

ㅡ 평소에는 점잖다가도 전쟁의 야만적인 영향 아래에서는 완전히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제10장. 바닥이 없는 구렁텅이 속으로

 

ㅡ ​젊은 장교들의 그런 모습이 어쩐지 비극적으로 보였다.

장차 자기들 앞에 어떤 일이 닥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순진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신임 장교들은 무거운 짐을 졌다. 그들은 난생처음으로 무슨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실전에 공포감을 품고 투입되어야 했다. 그 어떤 고도의 훈련 프로그램이라도 예상할 수 없다.

신참인 젊은 장교들에게는 무거운 의무를 짊어지고 산전수전 다 겪어 자부심이 높은 역전의 사병들 사이에서 지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가혹한 시련이었다.

사병들 가운데서는 누구도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ㅡ 걱정하는 것은 죽거나 부상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망적인 심리 상태로 몰아넣고 있었다.

ㅡ 우정은 우리 병사들에게 유일한 위로였다.

ㅡ 일본군 낙하산 부대가 상공에서 우리 등 뒤에 떨어짐으로 해서 우리가 아군의 총격에 맞아 죽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무섭게 했다.

 

​제11장. 불안과 공포

 

ㅡ 5월 8일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해병대원들은 다들 자기가 놓인 위험한 처지와 자기에게 닥칠 위험한 일들을 생각하느라 그 소식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뭐?" 이런 반응이었다.

ㅡ 모든 탄약은 다 무거웠다. 그러나 같은 탄약이라도 어떤 것은 운반하기 쉽고 어떤 것은 어려웠다.

ㅡ 보통 적의 포화속에서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탕 길을 오가며 수행했다.

지금까지 전쟁을 소재로 다루는 책이나 영화는 보병이 겪는 이 징글징글한 측면은 거의 무시했다.

ㅡ 짧은 휴식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회복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전선에서 벗어나 짧게는 하루, 길게는 며칠 동안 이어지던 휴식이 주기적으로 반복된 덕분에

우리는 전투를 충실히 이어나갈 수 있었다.

ㅡ 공포는 죽음이나 고통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동료들은 자기만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사람이 목격해야만 하는 동료들의 고통을 바라보기가 두려웠다.

혐오감과 역겨움에 휩싸여야 했기 때문이다.

ㅡ 전선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공포는 점점 커졌고, 그 공포는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이 진흙과 피가 범벅이 되어 있는 전선으로 복귀하는 꿈이었다.

 

제12장. 진흙과 구더기

 

ㅡ 일본군 병사의 사체는 아무리 많이 보아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우리 해병대원의 사체는 볼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ㅡ 1차대전 당시에는 포탄충격(Shell Shock), 전문적인 용어로는 신경쇠약(Neurasthenia), 2차 대전때는 전쟁피로증(Combat Fatigue)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제13장. 돌파구

 

ㅡ 포탄이 작렬할 때의 충격으로 뇌진탕을 호소하는 대원들도 많았다.

작렬하는 포탄이 그들을 문자 그대로 완전히 딴 세상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ㅡ 많은 전우가 전쟁 피로증에 시달렸다.

주변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방심하는 사람에서부터 계속 울기만 하는 사람도 있었고, 큰 소리로 절규하는 사람도 있었다. 스트레스는 전투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요소였다.

그 스트레스는 소화기 떄문에 발생하기도 했고, 적의 야간급습 위협 때문에 발생하기도 했고, 또 끊이지 않고 내리는 비와 폭발하는 포탄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발생하기도 했다.

ㅡ 지속적으로 이어지던 적의 포화는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력하게 우리의 정신 상태를 무너뜨렸다.

 

제14장. 슈리 고지를 넘어서

 

ㅡ 당시 대부분의 미국인은 일본인의 단호한 결의를, 다시 말해서 일본인에게는 항복이 궁극적인 불명예였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ㅡ 탄약 상자에서 수류탄을 용기째로 꺼내서는 용기의 봉인 테이프를 제거한 다음 수류탄을 그대로 적진에 던진 모양이었다.

그러자 일본군 병사가 용기를 열어 수류탄을 꺼낸 다음 안전핀을 뽑고 우리에게 되던졌다.

보충된 신병들 가운데는 전투의 기본적 지식과 기능조차 갖추지 못한 대원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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