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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92. 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by leeesssong 2020. 12. 5.

한줄평 - 너무나 당연하게 먹은 음식들.. 왠만하면 from 전쟁.


ㅇ서문

 

ㅡ 전쟁은 국가와 사회, 문화, 인간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전쟁하면 단순히 전쟁이 일어났던 장소와 장군, 용감한 병사들이 적과 어떻게 승리했는지에만 관심을 쏟는다.

 

정작 그 전쟁으로 인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고, 나아가 이후 사람들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ㅇ본문

 

ㅡ 맥주는 유럽이 아닌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ㅡ 바빌론과 이집트 사람들은 발효가 끝난 맥주에 밀가루를 넣어 다시 발효를 시켰다.

또 보리를 직접 끓여 발효시키면 시간이 너무 걸려, 아예 보리로 만든 빵을 불에 굽고 그 빵에 효모를 넣고 끓여서 바로 맥주를 만들기도 했다.

ㅡ 전쟁의 여신인 세크메트가 죄를 저지른 인간들을 무수히 살육해 온통 피바다로 만들자, 자칫 인간들이 모두 없어질 것을 염려한 태양산 라가 맥주가 담긴 항아리 7천개를 땅에 뿌렸다고 한다.

맥주를 정신없이 마셔댄 세크메트가 취해서 잠들어버리는 통에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집트인들은 태양신 라와 풍요의 신 오시리스 그리고 사랑의 여신인 하토르 등 신들을 숭배하는 제사에 맥주와 빵을 제물로 올렸다.

ㅡ 이집트인들에게는 보리는 맥주의 원료였고, 보리 반죽 덩어리는 빵이나 케잌을 만드는 주재료였다.

멘투호테프 2세의 사원에서는 4천년 전의 빵 덩어리가 발견되기도 햇다.

ㅡ 춥고 서늘한 날씨 때문에 포도농사가 어려웠던 영국이나 아일랜드, 독일 같은 북방 지역의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들은 포도주 대신 맥주를 즐겨마셨다. 맥주 주원료인 보리는 포도보다 추위에 더 잘 견뎌 북방에서도 비교적 수확하기 쉬웠다.

ㅡ 게르만족들이 살던 독일 지역은 물에 석회가 섞여 나오는 등 식수의 질이 좋지 않아서, 물을 그대로 마시는 것보다는 보리와 물을 끓여서 만든 맥주가 건강에 더 좋았다.

맥주를 너무 좋아했던 나머지 게르만족들은 전쟁터에도 맥주를 가져갔다.

 수도사들은 맥주나 포도주, 치즈 같은 것들을 제조해 사람들에게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ㅡ 1876년 독일의 화학자 카를 폰 린데는 암모니아를 냉매로 이용해 인공적으로 온도를 낮추는 냉장기술과 냉장고를 개발했다.

그로 인하 여름에도 맥주를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같은 해 프랑스의 파스퇴르가 낮은 온도로 세균을 죽이는 저온 살균기법을 맥주에 도입해, 맥주를 오랫동안 보관하면서도 본래의 맛과 품질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ㅡ 초기 설탕은 사탕수수의 수액을 끓여 증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지금과는 달리 왕이나 귀족들만 먹을 수 있는 값비싼 것이었다.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는 설탕이 약으로 쓰였으며, 같은 무게의 은과 가치가 같았다고 주장했다.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고 약 300년이 흘러 신흥세력인 이슬림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설탕은 전성기를 맞는다.

아랍인들은 설탕을 무지 좋아해 사탕수수의 지배가 가능한 지역마다 대규모의 설탕제조 공장을 세웠다.

로마인들처럼 아랍인들도 많은 설탕을 풍요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집트를 통치한 술탄들은 자신들이 사는 궁전 앞에 설탕으로 야자나무 모형을 만들어 전시했다고 한다.

ㅡ 카라멜은 원래 아랍어로 '달콤한 소금으로 만든 공'이라는 뜻인 '쿠라트 알 밀'에서 유래되었다.

아랍인들은 이렇게 설탕과 카라멜을 만들어 세계 각국에 수출했는데,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었는지 "설탕은 아랍인들이 생산하는 금과 같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ㅡ 스페인은 신대륙의 서인도제도에 사탕수수를 지배하는 농장을 만들었고, 네덜란드도 멀리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해 곳곳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세웠다.

그러면서 스페인이 쥔 국제 설탕무역의 패권에 도전했다.

그러나 설탕 무역으로 가장 잉기을 본 나라는 영국이었다.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능가하는 해상 강국으로 떠오른 영국은 설탕의 가치를 깨닫고,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한 기후를 지닌 서인도제도의 섬 자메이카를 점령해 사탕수수만 재배하는 대규모 농장을 세웠다.

여기에서 나오는 막대한 설탕은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홍차에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첨가물이었고, 차를 마시는 풍습이 영국뿐 아니라 온 유럽에 확산되면서부터는 설탕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만 갔다.

ㅡ 프로이센은 고민 끝에 사탕수수를 대체할 작물을 찾아냈다.

화학자인 마르그라프가 어태까지 식용이 아닌, 소나 돼지의 사료로 쓰이던 사탕무를 가열해 설탕을 추출하는데 성공하였다.

따뜻한 날씨에서만 재배되는 사탕수수와 달리 사탕무는 비교적 습하고 찬 기후인 유럽에서도 잘 자랐고 병충해에도 강했다.

더욱이 사탕수수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자라 사탕수수처럼 노예들을 동원한 대규모 농장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ㅡ 나폴레옹은 영국의 경제에 타격을 입힐 목적으로 유명한 '대륙봉쇄령'을 선언해 모든 유럽 국가가 영국과 교역하지 못하도록 했다.

영국은 유럽에 설탕을 팔지 않겠다고 맞서는 것으로 보복했다.

그러자 영국산 설탕이 부족해져 당장 홍차나 초콜릿, 커피와 잼을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된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ㅡ 수분을 없애고 바짝 말린 베이컨은 자주 장거리 원정을 떠나는 로마군의 식량으로 쓰였다.

ㅡ 사람 머리를 대신해 커다란 밀가루 피에 쇠고기와 양고기로 속을 채운 큼지막한 음식을 만들어 강물에 던졌다.

이 음식이 만두다. 처음에는 남쪽 오랑캐인 남만인의 머리라는 뜻의 만두로 쓰다가 오랑캐가 들어간 글자를 빼고 지금의 만두로 바뀌었다고 한다.

ㅡ 미숫가루는 외래 작물인 고구마나 감자, 고추와는 달리 재래 작물인 쌀이나 찹쌀만 가지고도 만들 수 있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쩌낸 쌀이나 찹쌀을 말려 볶은 다음 가루로 빻으면 된다.

ㅡ 잼은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스인들은 연회에서 후식으로 꿀에 절인 사과를 즐겨 먹었는데, 그리스를 정복하고 나서 로마인들도 이런 식의 절인 과일 요리를 배워갔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이어졌다.

ㅡ 1805년 프랑스에서 요리한 음식을 병에다 넎어 보관하는 병조림이 등장했다.

이것을 계기로 과일 잼을 병에 넣는 방식이 시도되었다.

마침내 1897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제롬 스무커가 펙틴과 섩랑으로 만든 사과잼을 유리병에 넣는데 성공했고, 1917년에는 폴 웰치가 이 원리를 바탕으로 설탕에 버무린 포도를 끓여서 졸인 다음 펙틴을 첨가해 유리병에 넣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포도잼이다.

ㅡ 1,2차 대전을 치르는 동안 잼은 전쟁터에 나간 미군들에게 보급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세계 각지에서 주둔하면서 잼도 널리 퍼져나갔다.

한국에서 잼이 가공식품으로 정착된 것도 한국전쟁 이후 미군들의 영향 때문이다.


ㅡ 물을 오랫동안 보급하면 습기와 열기 때문에 미생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급기야 녹색의 구정물로 변해버리기 일쑤이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물 대신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술도 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한자동맹에 소속된 선단의 뱃사람들은 배에 물 대신 맥주나 포도주를 싣고 다니며 식수로 삼았다.

알콜 성분이 들어간 맥주와 포도주는 확실히 물보다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침부터 잠들때까지 힘든 노동을 해야했던 뱃사람들에게는 물보다 취하면 피로를 말끔히 잊게 해주는 술이 더 인기가 많았다.

ㅡ 술의 도수가 낮으면 높은 온도에 변질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맥주를 증류시켜 독한 위스키로 만들어 배에 실었다. 위스키는 맥주나 포도주보다는 덜 상했지만, 값이 비싼게 흠이었다.

식수 변질 외에도 뱃사람들은 다른 고통에 시달렸다. 바로 괴혈병이다.

비타민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해 걸리는 괴혈병은 잇몸에서 피가 나다가 나중엔 온몸이 굳어죽는 병이다.

ㅡ 럼주는 위스키와 달리 값이 매우 싸서 가난한 선원들도 부담없이 마실 수 있었다.

도수도 높아서 높은 온도와 습도에도 상하지 않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었다.

이런 럼주의 장점이 알려지자 선주들은 앞다투어 럼주를 배에 실었고, 선원들에게 지급했다.

그냥 선원이든 해적이든 해군이든 할 것 없이 뱃사람들은 럼주를 들이켰다.

그들에게 럼주는 갈증과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ㅡ 영국의 그로기라는 해군제독이 럼주에 물을 타서 도수를 낮춰보았지만, 선원들은 럼주를 더 많이 마시는 것으로 응수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대는 사람을 두고 '그로기' 상태라고 하는 말은 이 그로기 제독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ㅡ 대항해 시대 이후 영국인들은 더 먼 바다로 항해하면서 장기간 보존할 수 있는 식품을 찾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이런 고민을 콘비프가 해결해준 것이다.

소금에 절여 수분이 빠져나간 콘비프는 덥고 습한 배 안에서 오랫동안 놓아두어도 잘 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 신분이 높은 함장이나 장교들은 콘비프에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때문에 악취를 없애는 후추나 육두구 같은 향신료를 넣어 먹기도 했다. 당시 향신료는 황금이나 진배없을 만큼 비싸고 귀한 조미료였다.

ㅡ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 육군의 정식 휴대 식량이 된 콘비프는 건빵과 함께 2차 대전까지 영국군의 필수 보급품으로 지급되었다. 콘비프를 솥에 넣고 감자나 순무 등과 함께 푹 삶아서 국물까지 다 먹었는데, 추운 날씨에 고생하던 병사들에게 그만한 위안도 없었을 것이다.

ㅡ 정신력 운운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임팔 작전이 떠오른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벗어던지지 못한게 아닌가 싶어 씁쓸해진다.


ㅡ 마렝고 전투에서 탄생한 유명한 음식이 치킨 마렝고이다.

마렝고 전투가 끝난 뒤 나폴레옹이 요리사에게 주문해 먹었다는 치킨 마렝고

ㅡ 프랑스군이 휴대하는 병조림은 확실히 식품을 오래 보관하는데는 좋았지만, 유리로 만들어져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졌다. 이런 결점을 보완하려고 영국에서는 고민 끝에 다른 대체품을 개발했다. 바로 철제 통조림이다.

ㅡ 1940년 미국 본사에서 독일 지사로 보내지던 콜라 원액이 끊키고 말았다.

콜라와 맛이 비슷하면서도 독일 등에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음료수가 필요했다.

전쟁때문에 콜라를 마실수 없던 독일인들은 환타의 기막힌 맛에 반해버렸다.

특히 식수 배급 사정이 나빴던 군인들에게 환타는 큰 인기를 끌었다.

ㅡ 초창기 환타 포장지에는 호랑이들에게 난폭하게 물어뜯기고 학대당하는 유대인들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유대인 탄압을 정당화하려는 히틀러의 정책이 반영된 것이다. 이 때문에 훗날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환타 마시기를 꺼렸다.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환타는 나치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막대하고 팔렸고, 나치는 이런 환타가 국민들과 유럽인들에게 독일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ㅡ 불고기 원형이 바로 고구려인들이 먹었던 고기구이 맥적이다.

ㅡ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면서 고기 요리를 덜 먹게 된다.

불교를 열렬히 믿던 고려인들이 점차 고기 요리를 멀리하고 채식을 가까이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고기 조리법도 점차 잊혀졌다.

고려의 육식 문화를 되살려 준 장본인은 바로 침략자 몽골이었다.

육식을 하던 몽골인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려인들도 다시 육식을 하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설야적이라고 하여, 꼬치에 꿴 고기에 소금을 뿌리고 참기름을 발라 구워먹는 방식이 유행했다.

ㅡ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맥적과 설야적의 요리법을 계승한 새로운 고기 요리가  탄생하는데, 바로 너비아니였다.

ㅡ 너비아니 재료는 쇠고기나 돼지고기인데 왕실이나 지체 높은 양반들 식탁에는 주로 쇠고기가 올랐고, 그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구하기 쉬운 돼지고기를 썼다.

너비아니와 비슷한 음식으로 떡갈비가 있다.

떡갈비는 잘게 다진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양념해 뭉친 뒤 넓적하게 만들어 석쇠에 올려 굽는 것이다.


ㅡ 양쯔강 하류 등의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생선회가 남아있다.

하지만 생선의 살을 날로 먹는 것이 아니라, 살짝 끓이거나 식초에 담가두었다 먹는 방식이어서 한국이나 일본의 생선회와는 전혀 다른 요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언제 생선회가 등장했을까? 14세기 말, 무로마치 막부 때에 처음 나타났다.

그 이전까지는 일본에서도 생선은 끓이거나 찌는 방식으로 조리했다. 기계식 그물을 사용하는 어획방식과 생선을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관하는 냉동 기술이 등장하는 현대 이전까지, 일본에서 생선회는 왕족이나 귀족들이 먹는 고급음식이었다.

생선 초밥도 생선회를 쉽게 먹을 수 없는 서민들을 위해서 생선살을 조금씩 발라내 밥 위에 얹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ㅡ 로마인들은 젓갈 음식을 무척 즐겼다. 그것이 바로 생선 내장을 발효시켜 만든 '가룸(Garum)'이다.

베트남을 지배한 프랑스인들은 '누옥 맘'을 한번 먹어보고는 "이건 사람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역겨운 썩은 생선 부스러기다"라며 질겁했다. 자기들 조상인 로마인들이 먹던 음식이었는데도 말이다.


ㅡ 설렁탕과 소주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고유의 음식이 아닌, 침략자인 몽골인들이 전해준 것이다.

일본 해상 원정을 시도할때, 원나라 군사들이 고려에 장기간 주둔했는데, 위치는 안동과 제주도였다.

안동에서 주둔한 몽골 군사들이 마시던 독한 술이 어느새 고려 백성들에게까지 전해졌는데, 그것이 소주이다.

ㅡ 1240년 무렵 몽골군이 멀리 페르시아까지 정복하면서 얻은 전리품 중 하나가 도수 높은 증류주였던 아라크였다.

본래 아라크는 페르시아에서 위장약으로 쓰려고 만든 것이었다.

술을 엄격히 금지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어떻게 술이 나왔나 갸우뚱 할 수 있으나 그 사회에서도 공개적으로 술을 마실수 없다 뿐이지 암암리에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존재했다.

ㅡ 소뗴와 양떼를 몰고 넓은 초원을 누비면서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인들은 쇠고기에 야생 파를 넣어 끓인 '술렝'을 즐겨 먹었다. 이것이 고려때 전해져 설렁탕이 된 것이다.

ㅡ 육회도 몽골의 영향으로 탄생한 음식이다. 고려 말에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날 쇠고기를 저며 생으로 먹는 육회 요리가 널리 퍼졌다. 늘 고기를 먹어 고기 요리기술이 매우 발달한 몽골인들에게서 고려인들은 고기 다루는 법을 배웠다. 쇠락한 불교를 밀어내고 한반도의 지배사상으로 부상한 유교도 이런 현상을 부추겼다. 유교 창시자인 공자가 육회나 생선회를 즐겨먹었다는 사실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회를 먹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ㅡ 몽골인들이 즐겨먹던 치즈인 아롤이나 버터, 요구르튼 한반도에 제대로 전파되지 못했다.

한반도에는 목초지가 적어 몽골이나 서양처럼 젖을 많이내는 젖소를 키우기 어려웠고 그 때문에 전통 종인 한우도 젖이 적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우유를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고 이 때문에 우유를 소화시키는 젖당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우유를 생으로 먹으면 배탈나기 쉽상이었고 죽에 우유를 넣어 끓이는 타락죽 같은 방식으로나 겨우 섭취할 수 있었다.


ㅡ 아랍의 지배를 받으면서 시칠리아에는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한 음식 문화가 전해지는데, 밀가루를 반죽해 조금씩 길게 떼어서 건조한 다음 걸쭉한 수프에 넣어 먹는 마카로니였다.

이렇게 9~11세기까지 약 200년동안 아랍의 지배를 받으면서 시칠리아에는 파스타를 먹는 문화가 자리잡았다.

그런데 11세기 들어 북쪽에서 또 다른 침략자가 나타났고, 유럽과 지중해는 물론 저 먼 북아메리카까지 휩쓸던 바이킹의 후손인 노르만인이었다.

ㅡ 시칠리아를 지배한 노르만족은 다른 기독교 국가들처럼 이슬람 교도들을 쫓아내거나 탄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슬람 문화를 그들의 삶 속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서는 실로 보기 드문 경우였다.

그 결과 시칠리아에는 유럽 기독교 문명과 아랍 이슬람 문명이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다.

시칠리아에 남아있는 노르만 왕들의 왕궁은 유럽의 첨탑양식과 아랍의 아라베스크 양식이 섞인 모습이다.

ㅡ 15세기 들어서면서 마침내 이탈리아 본토에서 밀가루를 반죽해 틀에 넣고 길게 뽑아내는 최초의 스파게티가 탄생한다.

초기의 스파게티는 면발에 해산물이나 돼지고기, 볶은 마늘 등을 넣어 올리브 기름이나 버터로 볶아서 먹는 방식이었다. 토마토 소스를 얹어먹는 스파게티는 19세기에나 등장했다.

ㅡ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같은 중앙 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하면 우리나라 볶음밥과 비슷한 밥요리를 볼 수 있다. 바로 '플롭'이다.

알렉산드로스가 귀환하면서 고국인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에도 플롭이 전해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유럽 각국으로 퍼졌다. 이탈리아의 쌀 요리인 필라프나 스페인의 볶음밥인 빠에야도 모두 플롭에서 파생된 것이다.


ㅡ 신대륙인 멕시코나 페루에서 자랐던 고추는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까지 전파된 것일까?

고추는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쿠바와 아이티 등 서인도제도에 상륙한 콜럼버스 일행이 그곳 원주민들에 음식에 넣어먹는 고추를 발견하고 이를 유럽으로 가져간 것이다.

당시 아시아 나라들과 무역을 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이 고추를 인도와 일본 등지로 전파했고, 인도에서는 1500년에 고추가 재배되었다.

ㅡ 일본에 전래된 고추가 한국으로 전파된 시기는 임진왜란때였다.

그 시기에 부산을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에 왜군이 오래 주둔했는데, 별로 반기지는 않았지만 왜군과 함께 살면서 이들의 문화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고추였다.

우리가 먹는 고춧가루로 버무린 배추김치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이다. 의외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ㅡ 조상들은 여전히 무로 만든 동치미나 오이를 소금에 절인 짠지, 파김치 등을 먹고 있었다.

그러다 남쪽 전라도 지방에서부터 고춧가루로 버무린 김치를 만들어 먹은 것이다.

전라도는 다른 지역보다 날씨가 덥고 습해서 음식에 소금을 많이 넣지 않으면 쉽게 상했다.

그래서 자연히 김치에도 소금과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상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소금뿐 아니라 고추에 포함된 캡사이신 성분도 세균 번식을 억제시킨다.

ㅡ 1611년 건주여진 족장 누르하치가 건설한 청나라(후금)은 불과 60만명이 사는 소국에 지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명나라와 사르후에서 결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중원의 인구 중 절대다수는 여전히 한족이었고, 그들은 청나라의 만주족들을 오랑캐라고 경멸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베이징에 입성하자마자 모든 한족에게 변발을 할 것을 강요했다.

변발을 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처형했다.

ㅡ 환갑을 맞은 강희제는 이것을 기념하여 전국에 명을 내려 환갑이 넘은 노인 3천명을 골라 자금성으로 초대해 온갖 산해진미를 대접했다.

이때 만주족과 한족들의 진귀한 요리가 모두 한자리에 차려졌다는 뜻으로 만한전석이라는 이름이 처음 생겼다.

수가 적은 만주족이 절대 다수인 한족을 무려 270여년 동안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만한전석으로 상징되는 청나라의 화합 정책이었다.


ㅡ 커피는 서양이 아닌 그들과 오랫동안 적대관계였던 아랍권에서 나온 음식이다.

커피 원산지는 아프리카 동부에 있는 에티오피아이다.

ㅡ 9세기 무렵 커피는 에티오피아 등 동부 아프리카와 교역을 하던 아랍 상인들을 거쳐 이슬람 지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커피를 가장 환영한 사람은 수피라 불리는 이슬람 수도사들이었다.

오랫동안 명상을 하다보면 자칫 지루해져 졸리기 마련인데, 커피콩을 볶아 그 즙을 마시고 나면 졸음을 쫓을 수 있었던 것이다.

ㅡ 유럽에 커피가 본격적으로 전해진 것은 뜻밖에도 전쟁때문이었다.

1683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두번째로 공격한 오스만제국 군대가 유럽인들에게 남겨둔 선물이었다.

ㅡ 비엔나는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오스만 군대의 군기에 그려진 초승달 모양을 본떠 빵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크루아상이다.

크루아상은 이후 오스트리아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고, 오스트리아 출신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실로 시집가면서 요리법도 함께 가져가 프랑스에서도 널리 퍼진다.

 

ㅡ 비엔나 커피도 비엔나 전투와 관련된 음식이다.

스만 제국 군대 보급품에 커피콩도 포함되었는데, 도망가느라 대부분 놓고가는 바람에 그중 하나인 커피콩을 쉽게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전해지는 말로는 오스만 군대에 포로로 잡혀있던 쿨스지스키라는 사람이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에 커피콩을 볶아 우려내어 커피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오스만 군대가 패주할때 용케 빠져나와 비엔나로 돌아온 그가 커피 만드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ㅡ 처음 껌을 씹은 민족은 그리스인이었다.

매스틱나무에서 추출한 수액을 굳힌 수지를 자주 씹었는데, 간식거리로서가 아니라 입안을 청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인들은 거의 이를 닦지 않았다고 한다.

ㅡ 본격적인 껌의 역사는 미국 역사상 유명한 알라모 전투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미국에서 두번째로 큰 주인 텍사스는 당시 미국이 아닌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었다.

1520년 스페인의 코르테스가 멕시코 지역에 있던 아즈텍 왕국을 정복하면서 지금의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와 텍사스,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등 전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ㅡ 스페인에서 독립한 멕시코는 처음에는 이투르비데가 황제 아구스틴 1세로 즉위한 제국이었으나, 얼마 못 가 그를 또 다른 혁명으로 축출하고 장군인 산타 안나를 대통령으로 취임시켜 공화국이 되었다.

산타 안나는 갓 태어난 신생 공화국 멕시코를 발전시키고 부족한 인구를 채우기 위해 적극적인 이민 장려 정책을 폈다. 이에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미국 출신 이민지가 많이 몰려들었다.

미국 본토에서 가까운데다 넓은 토지가 얼마든지 있는 텍사스는 가난하지만 삶을 개척하려는 열정에 불타오르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민 정책을 편지 불과 8년만에 텍사스에는 미국 이민자 약 3만명이 살게 되었다.

반면 멕시코 출신 주민들은 고작 4천명 정도였다.

ㅡ 미국인 이민자들은 "멕시코 정부가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반발하며 1836년 2월 멕시코에서 독립하여 텍사스 공화국을 세우겠노라 선언하였고, 산타안나는 6천여명에 이르는 군대를 직접 이끌고 텍사스로 처들어갔다.

그러자 이민자들은 대부분 군대를 피해 미국 본토로 도망쳤으나 민병대 186명만은 끝까지 남았다. 그들은 알라모 요새로 집결해 그곳에서 멕시코군을 맞아 싸우기로 결심했다.

ㅡ 멕시코의 총공격아래 민병대는 모두 전사하였고, 그래도 고작 200명도 되지 않는 민병대에 멕시코군이 1천 6백여명이나 죽었다.

ㅡ 자원자들로 구성된 대규모의 미군은 샘 휴스턴 장군의 지휘아래 텍사스로 전진했고 1836년 4월 21일 산 야신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은 멕시코군과 싸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멕시코 군대를 지휘하던 인물이 알라모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산타안나였다.

산타안나는 미국으로 압송되었고, 텍사스는 독립된 땅임을 선언하였다.

산타안나는 이후 권력을 지키려고 독재정치까지 펼쳤지만, 끝내 국민들의 뜻을 이기지 못하고 원수의 나라인 미국으로 도망쳤고, 한 사진작가가 그를 찾아와 무엇을 씹고있냐 물어보자 "멕시코 사람들이 좋아하는 간식이다.

치클로 만들었다"라며 껌을 소개했다.

치클을 넘겨받은 사진작가 애덤스는 연구를 거듭해, 치클에 감초성분과 향을 넣은 껌을 만드는 기계를 발명했다.


ㅡ 달고 신맛이 나는 고기라는 뜻의 탕수육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 머무르며 탕수육을 대접받은 영국인들은 맛도 맛이려니와 무엇보다 힘들게 젓가락질을 하지 않고 포크를 쓰듯 그냥 대충 찍기만 해도 쉽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아했다.

ㅡ 피시앤 칩스는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이지만, 이 음식이 등장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애초에 감자라는 직물 자체가 영국이나 유럽에는 없었다.

ㅡ 감자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에 있는 페루이다. 페루를 지배했던 잉카사람들은 감자를 물에 넣었다가 안데스 산맥의 고산지대로 가져와 얼렸다.

그리고 얼어붙은 감자를 햇볕에 말린 다음 가루로 빻아서 빵처럼 뭉쳐 비상식량으로 삼았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처음으로 감자와 고구마를 잉카에서 보게 되었다. 처음에 감자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생김새가 이상한데다 뿌리인지 열매인지 확실하지도 않고, 성경에 나오지도 않은 작물이라서 부유층이든 가난한 사람들이든 모두 낯설어했다. 더욱이 어떻게 조리해먹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지금이야 감자 껍질을 벗겨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감자를 처음 본 유럽인들은 그냥 먹었다가 복통과 소화불량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이런 경험을 당한 사람들은 더더욱 감자를 멀리하게 되었다.

ㅡ 벨기에의 뫼스 계곡 부근에서 사는 사람들이 감자를 튀겨먹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그곳 사람들은 작은 물고기를 튀겨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강물이 얼어붙는 바람에 물고기를 잡을 수 없자 물고기 대신 감자를 길게 세로로 썰어 튀겨먹었다고 한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감자튀김이다.

ㅡ 감자튀김을 처음 만들어 먹은 곳은 프랑스가 아닌 벨기에였다.

프렌치 프라이즈라는 말 자체도 1차 대전 당시 벨기에에 상륙한 미군과 영국군이 감자튀김을 보고 프랑스 음식이라고 착각해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ㅡ 영국인들은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선심쓰듯 감자를 나눠주었는데, 아일랜드 인들은 몇차례 시행착오 끝에 감자의 껍질을 벗기는데 성공했고 삶아먹게 되었다.

ㅡ 프랑스 마리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는 별장에 물레방아와 농가를 짓고 농부차림으로 농장일을 하는 취미가 있었다. 부부는 감자를 직접 심어 길렀고, 감자꽃을 무척 좋아해 귀족들을 불러놓고 벌이는 베르사유 연회장에서도 감자꽃을 모자나 윗도리에 꽂고 자랑스럽게 활보했다. 왕과 왕비가 그러자 자연히 귀족들도 그들의 취미를 모방하였고 덩달아 감자의 가치도 올라갔다. 버터로 버무린 감자와 치즈를 넣은 감자 스튜는 프랑스 귀족들에게 인기있는 음식이 되었다.

ㅡ 1763년 프로이센과 벌인 7년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갔던 프랑스 군대의 군의관이었던 파르망티에는 귀국하고 나서 만나는 사람마다 감자를 먹어보라고 권유하고 다녔다.

당시 프로이센에서는 전쟁 포로들에게 빵보다 만들기 쉽고 값도 싼 갑자를 지급했다.

ㅡ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감자는 더욱 보편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적인 격변과 지방 곳곳에서 터지는 내란 때문에 사람들은 너나 할것 없이 굶주림에 시달렸고, 밀이나 보리보다 빨리 자라면서 영양가도 높은 감자를 닥치는대로 먹어댔다.

1860년 런던에서 조셉 말린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하얀 생선살과 감자칩을 함께 튀겨서 가난한 공장 노동자들에게 팔았다. 이것이 최초의 피새인 칩스다. 힘든 육체노동을 오랫동안 해야하는 노동자들에게 칼로리가 높은 튀김요리는 인기가 대단했다.

조셉말린이 만든 피시앤 칩스는 영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고, 영국의 해외 식민지로까지 전해졌다.

ㅡ 2차대전 당시 영국 어민들은 독일 해군의 해상 봉쇄 작전 때문에 먼 바다로 나가 생선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피시앤칩스도 마음껏 먹을수 없게 되었다.


ㅡ 호멜 사는 원래 햄을 만드는 육류 가공업체였는데, 햄을 만들면서 돼지를 도살할때마다 어깨 부위 살들이 남아도는게 문제였다. 어깨 부위는 뼈가많아 사람들이 잘 먹지 않는 통에 그 부위 살들을 매번 돈주고 폐기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회사는 어깨 뼈에서 살을 발라내 양념을 한 다음 캔에 넣어 판매하였다.

이 상품이름이 양념한 고기와 햄(Spiced Meat and Ham)이라는 뜻으로 SPAM이라고 지었다.

ㅡ 2차 대전이 터지면서 스팸은 더욱 큰 인기를 누렸다.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은 독일 해군의 잠수함 작전 때문에 제대로 식량을 공급받기 어려웠고, 미국은 비행기로 영국에 대규모로 물량을 공급했는데, 그중 하나가 스팸이었다.

ㅡ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한국인들은 포탄 탄피를 주어다 교회의 종을 만들었고 미군들이 버린 폐차를 지프 택시로 개조했으며 자동차 타이어를 잘라 슬리퍼로 신고 다니는 등 지옥같은 전쟁을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으니 생명력이 강인한 위대한 민족이라는 등의 자화자찬...

 ㅡ 온 국토가 초토화되고 무엇하나 먹을게 없는 상황에서 미군들이 먹다 버린 음식은 그야말로 성찬이엇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 햄과 소시지만 넣던 찌개에 토속 음식인 김치나 각종 나물들을 넣어 끓여먹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음식이 바로 부대찌개였다.

ㅡ 패전국이 된 일본인들은 한동안 허기와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다.

미국에서 무상으로 대량의 밀가루가 들어왔지만, 쌀이 주식이던 일본인들은 밀가루 음식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단팥빵이 나온 이유 중 하나도 일본인들이 빵을 잘 사먹지 않아서였다.

궁여지책으로 빵에 달콤한 맛을 내는 팥을 앙꼬로 넣었는데 그게 단팥빵이다.

ㅡ 1961년 닛산식품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닭뼈를 우려낸 육수를 분말수프로 만들어 넣은 '치킨라면'을 출시했따.

이것이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이다.

ㅡ 1971년 라면 역사에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라면의 본고장 일본에서 컵라면이 나온 것이다.

컵라면 역시 닛산식품 사장 안도 모모후쿠가 개발한 것인데, 한 외국인 바이어가 컵에 라면을 부셔 넣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이제 냄비나 그릇이 없어도 바로 물만 부으면 즉석에서 라면을 먹을 수 있으니,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들로서는 무척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부터 1년 뒤 한국의 삼양식품에서도 삼양컵라면을 추시했다.


ㅡ 롱후더우의 재료 중 하나가 앞에서 언급했던 사향고양이이다.

용이 뱀을 가리키는 것처럼, 중국 음식 이름에 들어간 호양이는 고양이를 뜻한다.

뱀이나 고양이는 기생충과 세균이 많아서 회처럼 날고기로는 절대 먹을 수 없다.

ㅡ 마오쩌둥이 주도했던 농공업 대증산 정책인 대약진 운동은 처음의 기대와 달리 4천만이 넘는 중국인들을 비참하게 굶겨 죽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대약진 운동 일환으로 벌어진 참새 박멸 캠페인도 농업에 해로운 결과를 불러왔다.

마오쩌둥이 농민들에게 참새들을 박멸하라고 지시했는데, 참새가 곡식의 낱알을 먹는 해로운 새라는 점에서였다.

하지만 참새는 곡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곡식을 갉아먹는 해충들도 먹어 없애는 생태계의 균형자라는 점이다.

ㅡ 그 결과, 친척이 없어진 해충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곡식들을 닥치는대로 먹어치워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수확할 것이 없는 농민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급기야 수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굶어 죽고, 이런 상황이 연일 베이징의 중앙 정부에 보고되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그런 보고를 받고도 농민들의 고통에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

"먹을 것이 모자라면 식사량을 줄이면 되고, 그것도 없으면 아무거나 구해다 먹으면 될 게 아닌가!

굶주림이나 기근은 옛날에도 얼마든지 있었던 일이다.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호들갑을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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