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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88.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by leeesssong 2020. 10. 30.

ㅇ서문

 

ㅡ 그림 한폭의 구석구석에는 말과 글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순간들이 녹아들어 있다.

ㅡ 프랑스 제리코가 그린 <기병의 초상화>에서 유럽의 군인들이 입었던 갑옷이 어떻게 코르셋의 기원이 됐는지를 알게 되었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밀로의 비너스>가 두 팔을 잃게 된 사연을 통해 19세기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민낯과 마주하면서 역사와 예술이 불편한 조우를 이어가는 루브르의 현 주소를 되새길 수 있었다.

ㅡ 화가의 시선은 예술의 추구에만 고정돼 있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 시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다비드 같은 화가는 백마를 타고 기세등등해 하는 나폴레옹을 그려 최고 권력가의 위세를 상찬했지만, 독일 화가 노르텐은 러시아 원정에 실패해 퇴각하는 패배자 나폴레옹을 그려 권력의 덧없음과 전쟁의 참상을 세상에 고발했다. 

ㅡ 회화는 역사적 고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 화가 앵그르는 철갑으로 된 원피스를 입고 도끼와 긴 칼로 무장한 잔다르크를 그렸다.

그런데 기록에 따르면, 15세기 프랑스 시골 마을의 열일곱살 소녀의 평균 키는 150cm 가 안됐고, 몸무게도 40kg 을 넘지 않았다.

이처럼 여린 소녀가 30kg이 넘는 철갑 원피스를 입고 거대한 기병용 창을 들고 적진을 향해 돌격할 수 있었을까?


ㅇ본문

제1장. 전쟁의 승패는 늘 사소함에서 갈렸다.

ㅡ 골리앗을 쓰러트린 '리썰 웨폰'

돌팔매질을 하는 줄모양의 도구로, 줄팔매 혹은 무릿매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sling이라 부른다. 

이 무기는 원심력을 극대화시켰다가 돌을 날려 적의 머리나 다리에 돌을 명중시켜 사살시키는 무기였다. 

숙달된 투석병들은 시속 140km 정도 구속의 돌을 날릴 수 있었으며 유효 사거리는 200~300m 정도였다고 한다.

ㅡ 브레이지(brassiere) 란 단어는 전쟁터에서 활을 쏘는 궁사들의 팔목보호대로 쓰이는 브라시에르(braciere)란 프랑스 단어에서 어원을 한다.

영어로는 brace라 불리는 이 말은 양궁에서 여전히 팔목보호대란 뜻이다.

팔목보호대를 넘어 갑옷의 가슴 보호구를 통칭하는 용어로도 쓰이면서 오늘날 브래지어와 연결고리가 생겼다고 한다.

ㅡ 코르셋(corset) 역시 갑옷 중 가슴과 배를 보호하는 흉갑의 개념을 본떠 만들어졌다.

이 흉갑을 철갑에서 직물로 바꿔 만든 것이 코르셋의 효시가 됐다고 한다.

ㅡ 기사들의 내의였던 스타킹은 중세시대에 판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어야 하는 기사들이 갑옷을 입기 전에 속에 입던 바지 대용의 옷이었다.

스타킹은 갑옷의 강판이 피부를 긁어 생기는 상처를 막아줄뿐만 아니라 보온과 활동성을 유지하는데 좋은 역할을 했다.

스타킹이 흘러내리지 않게 만든 가터벨트 역시 스타킹과 함께 만들어졌다.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보면 스타킹에 하이힐까지 신은 루이 14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스타킹과 함께 하이힐 역시 기사들의 산물이었다.

하이힐은 유럽이 아니라 페르시아 등 중동지역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주로 기병들이 말에 올라 등자에 발을 고정시키는 용도로 쓰였다.

ㅡ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 흔히 조총이라 부르는 화승총의 탄약을 '12사도'라 불렀다.

한 전투마다 병사들에게 보통 12발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전장식 소총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전투 가운데 쌍령전투가 있다. 

ㅡ 벌통은 서양에서도 고대부터 쓰였떤 주요 전술무기 중 하나였다.

투석기에 넣고 성안으로 쏴서 혼란을 유도하는 작전이 잦았다. 

ㅡ 전차부대가 기병대보다 훨씬 먼저 탄생했다.

전차부대는 6천여넌 전인 고대 이집트와 중동 인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사람이 말 등에 올라타는 기병은 이보다 수천년 뒤에 탄생했다.

이유는 고대의 말의 크기가 지금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이다.

이는 수천년간 이어진 끝없는 품종 개량으로 말의 체격이 커졌기 때문이다.

ㅡ 전차의 단점은 한번 돌진하기 시작하면 선회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처럼 핸들이 있지 않았고, 잘못 선회하면 아예 뒤집어지기 일쑤였다.

안그래도 좁은 곳에 모아놓으면 싸우는 말들을 연이어 붙여놓고 조종하다보니 까딱 실수하면 말들이 서로 전차를 이탈해 달아나거나 스텝이 엉켜서 모두 넘어지는 불상사도 잦았다.

 

ㅡ 근대 초기 군복의 화려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린트락 머스킷, 즉 수발식 총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전에 사용되던 화승총에 비해 격발 방식이 간편하게 변하긴 했지만 여전히 불편한 총이었다.

부싯돌의 마찰을 통해 점화약에 불을 붙여 격발하는 플린트락 머스킷의 가장 큰 단점은 쏘고 나서 엄청난 연기에 휩싸인다는 점이었다.

몇발 쏘면 곧 사방이 검은 화약연기로 뒤덮여 피아 식별도 어려워질 정도였다.

전투가 격렬해지면 온몸이 시켜멓게 물들 정도였기 때문에 피아식별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뜻밖에도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군복이 중요했다.

자비로 화려한 옷을 입기 어려웠던 형편의 서민들에게 강력한 입대의 동기 중 하나로 작용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전후로 "전쟁에선 군복 멋있는 쪽이 진다(The side with the fanciest uniforms loses)" 속담이 생기고, 화려한 군복은 예복이란 형태로 남아있을 뿐이다.

 

ㅡ 초콜릿은 처음부터 전투식량으로 태어난 전쟁터의 음식이었다.

'쓰디쓴 물'이란 의미의 단어인 쇼콜라틀 이란 말에서 유래됐고, 카카오콩과 고추를 갈아넣어 끓인 음료였다고 한다.

 

ㅡ 조선시대에 염초장과 병사들이 아무데나 들어가 그곳의 화장실 바닥을 파고 흙을 퍼간 이유는 당시 너무나 구하기 어려웠던 염초를 얻기 위해서였다.

염초는 조선시대 전략자산인 화약의 주 원료가 되는 질산칼륨을 뜻한다.

특히 화장실로 쓰인 곳의 바닥은 질산암모늄이 형성돼 흙과 섞여있기 쉬워서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ㅡ '정보(Information)'의 어원은 '적정보고'라는 단어의 줄임말에서 비롯됐다. 

 

ㅡ 그리스의 팔랑크스, 스페인의 테르시오, 진형 한쪽이 무너지면 또다시 곧바로 빈 공간을 남는 병사들로 채우며 사각형 방진형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진격해 적을 몰아세워야 했기 때문에 장교들의 곱셈 능력이 중요했다.

방진 체계는 무기가 총으로 바뀐 이후에도 오랫동안 적용됐다.

그러다보니 장교들의 곱셈 능력은 여전히 중요했고, 19세기 우수 병력자원 생산을 목표로 만들어진 공교육 체계에서 구구단을 비롯한 곱셈이 중요시 될 수밖에 없었다.

학교는 작은 병영의 개념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작전시간을 정확히 알기 위한 시계보는법,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한 표준어와 표준발음 구사능력, 사칙연산 등이 중요하게 다뤄졌다.

 

ㅡ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왕조는 멸망할떄까지 직접적으로 큰 대외전쟁을 겪지 않았고, 조선군의 이미지는 대체로 치안과 질서 유지에 힘쓰는 포졸의 모습으로 굳어졌다.

치안유지에 동원된 포졸이 갑옷으로 무장했을리 만무하다.

치안유지에 나선 포졸의 의복과 전투에 임한 포졸의 의복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 사병으로 출연한 엑스트라들이 포졸복을 입고 전쟁장면을 찍었는지 알 수 있다.


제2장. 탐욕의 참극

 

ㅡ 안토니우스는 좀 더 시일을 끌면 점점 유리해지는 상황에서 이 균형을 깨트리고 패배로 인도한 인물은 클레오파트라다. 

압도적 승리를 확신했던 병사들에게 단 한번의 패배가 준 심리적 공포감이 엄청났던 것이다.

 

ㅡ 1853년 크림 전쟁의 격전지에서 가디건은 태어났다.

가디건 백작은 기병사령관으로 참전했으며 병사들에게 자신이 제작한 가디건을 입혀놓고 사진찍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 처음 발발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ㅡ 근현대 중국이 가장 뼈아프게 생각하는 전쟁은 1894년 청일전쟁이다.

양국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었던 황해전투에서 압도적인 전력상 우위에 놓여있던 청나라 북양함대가 일본 함대에 박살이 나면서 청나라는 아시아의 종이 호랑이로 전락했다.

청나라는 독일제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정원과 진원은 7000톤급의 배수량을 자랑하는 거함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의 기함인 마츠시바는 배수량이 4000톤급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 배들도 3000톤급에 그쳤다.

하지만 서태후의 생일상 준비를 대대적으로 하다보니 군비는 축소될수밖에 없었고, 북양함대의 주포는 탄약이 부족했고 주요 함선의 포탄 역시 제대로된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대부분 포탄 안에는 모래나 콩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함대가 제대로 된 사격훈련을 받았을리가 만무하다.

 

ㅡ 기사의 투구 모양은 양쪽 끝에 쭐을 단 투구부터 날개를 단 투구, 닭벼슬 모양의 갈기를 단 투구, ​아무것도 없이 양철깡통 같은 민머리투구까지 크게 4종류로 나뉜다. 이런 화려한 장식은 성경의 4대 복음서 주인공인 마테오, 마르코, 요한, 루카를 상징하는 것이다.

민머리 투구는 마테오, 갈기가 달린 투구는 사자를 상징으로 상징으로한 마르코, 날개 모양은 요한, 뿔은 황소를 상징하는 루카를 의미한다.

이 화려한 투구가 유행한 것은 십자군 원정시기였다. 

실제 사제들이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반감이 컸기 때문에 주로 철퇴로 적의 머리를 내리치는 것이 선호됐다고 한다.

이는 이교도의 잘못된 정신을 철퇴로 내리쳐 일깨워 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기사단의 활동 영역은 넓어지고 세속화가 심화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약탈과 파괴, 살인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ㅡ 밀로스 섬 주민들의 입장에서, <밀로의 비너스>는 두팔을 잃고 프랑스에 약탈당한 민족의 아픔이 서린 문화재다.

프랑스 유입경로는 출토될때부터 팔이 없었던 작품을 터키를 통해 프랑스정부가 사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밀로스 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프랑스와 터키 해군 간 격전이 있었으며, 서로 가져가려다가 팔이 잘려나가 바다에 빠졌고, 이것을 프랑스 함대가 건져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리스 밀로스 섬에서는 밀로의 비너스를 프랑스의 전시 약탈 문화재로 규정하고, 이전 귀환을 위한 캠패인을 벌이고 있다.

셀수 없이 많은 세계의 문화재들이 제국주의의 야욕 속에 침략국의 도시로 모이면서 피식민지 국민들은 오늘날까지도 자신들의 조상이 만들었던 수많은 유적들을 엉뚱한 나라의 박물관에서 보게 됐다. 

 

ㅡ 일본의 야마토 함은 정작 전투에는 거의 나서지 못하고 연회와 선상파티가 이어졌기에 '야마토 호텔'이라는 치욕적인 별명까지 붙여졌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너무 느려서 상대 함대에 금방 포위당하기 십상이었다.

또한 3연장 주포는 포신끼리 사이가 좁다보니 포탄 사이에 간섭력이 심하게 작용해 포를 쏘면 어디로 날아갈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포신이 견뎌낼 수 있는 최대 발사량도 고작 200발이었다.

 

ㅡ 실제 38도선은 남쪽에서 방어하기 매우 힘든 지형적 조건을 안고 있다.

횡축이 가장 긴 방어선으로 막대한 방어병력이 필요한 분할선이다.

북위 39도선은 평양 일부 지역을 관통해 원산만 아래 동해안까지 이어지는 선으로 38에 비해 횡축이 짧아 강과 산악지형이 많이 존재해 방어가 용이하다.

 

ㅡ 게틀링은 강력한 화력을 지닌 무기가 있다면 그만큼 군인의 수를 줄 일 수 있고, 전쟁도 빨리 끝날 것이라 생각하고 기관총을 개발했다.

 

ㅡ 1899~1902년에 벌어진 제2차 보어전쟁은 철조망과 기관총, 수류탄 등 현대전 무기들이 처음으로 본격 활용된 전쟁이자 초토화 작전과 대량학살이 함께 벌어진 현대전의 서막으로 불리는 전쟁이다.

영국군은 보어인들의 게릴라전을 막기 위해 강제수용소에 가둬놓고 대량학살을 자행했고 약 3만명의 주민들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이것을 보통 홀로코스트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ㅡ 기관총이 전장에서 본격 활용되면서 각 부대는 열명 안팎의 분대로 쪼개져 산개해야하는 새로운 전투방식이 자리를 잡았다.

이에 따라 모든 부대원이 시계를 차야했고, 시계보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ㅡ 매독은 주로 자국을 침략한 침략국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프랑스병, 나폴리병, 스페인병, 등등


제3장. 피에 묻힌 진실

 

ㅡ 3월을 뜻하는 March는 행군이나 행진으로 쓰인다.

이 단어는 군신 마르스에서 파생된 단어로 마샬아츠, 화성 등도 쓰이게 된다.

왜 유독 3월에 march 가 붙었을까?

봄이 시작되는 3월부터 전쟁을 시작하는 고대 전쟁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12월부터 2월까지 겨울은 주로 외교전이 펼쳐지는 계절이었다.

 

ㅡ 나치 독일의 경례는 로마군이 하던 방식이었다.

자신의 오른손에 무기가 없는 것을 상관에게 보이기 위한 제스처였다고 한다.

 

ㅡ 실제 사무라이들은 오늘날 샐러리맨과 비슷한 삶을 살았으며, 좀 더 높은 연봉과 좀 더 좋은 직함을 쫓아 자주 이직을 했다.

또한 실제 전투에서 사무라이들은 검술을 자주 쓰지 않았다.

전국시대인 16세기는 개인화기인 조총이 유행했고 장창병과 조총을 조합시킨 제병합진작전이 주를 이루던 시절이라 칼은 그다지 유용한 무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멀쩡한 몸뚱이가 전 재산인 사람들인 만큼 상당히 몸을 사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막부가 들어선 이후 270년간 평화가 찾아오자 완전히 공무원이 됐다.

에도시대에는 사무라이 대부분이 칼을 차고 다녀도 뽑을줄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고 한다.

 

ㅡ 비스마르크는 현대 4대 사회보장제도 중 3개를 세계 최초로 입안해 만든 정치인이다.

의료보험, 산재보험, 연금보험

그러나 그가 만든 사회보장 제도가 결코 노동인권 증진을 위함은 아니었다.

사실은 사회보험 입법과 함께 사회주의 진압법을 시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ㅡ 드라군이란 용기병을 뜻하고 길이가 짧은 머스킷이나 권총 등 개인화기를 들고 다니면서 전장에서 불을 뿜었다.

드라군은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 병종으로 말은 어디까지나 전장까지 타고가는 이동수단이었다. 그래서 흔히 기계화 보병의 선조격으로 보곤 한다.

30년 전쟁 당시 구스타프 아돌프가 드라군을 활용한 승마보병 작전을 자주 펼쳤고, 동양의 드라군이 바로 사무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말들은 작았고, 이런 작은 말들은 보병 방진을 공격할때 충격력이 약해 돌파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주로 말 위에서 활을 쏘거나 말에서 내려와서 싸웠다고 알려져 있다.

 

ㅡ 전쟁터 사령관의 고민이 경제학으로 넘어와 만들어진 단어가 출구전략(Exit Strategy)라고 한다.

 

ㅡ 첨탑의 spire는 창을 뜻하는 spear에서 유래했다. 

총알 제조에 쓰인 탑을 가리켜 샷타워라고 하는데, 건물의 첨탑이 매우 유용한 총알 제조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전장식 발사에서는 총알을 발포하는데 걸리지 않게 매끄러운 구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고, 당시에는 매끄러운 구형의 탄환을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떨어진 물방울은 구형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아내 첨탑 위에서 납을 녹여 방울로 떨어뜨려 수조를 준비해 이를 담아냈다.

 

ㅡ 벚나무가 조선이 자랑하는 활을 만드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군수물자였기에 많이 심었다고 한다.

팔만 대장경의 경우에도 60%이상이 산벚나무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ㅡ 고대 로마시대에는 중세 기독교 사회와 달리 인체 해부를 금기로 여기지 않았다.

실제로 검투사들이나 전쟁 포로들, 사형수들의 시신을 해부용으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부학과 외과 의술이 크게 발전했다. 

오늘날 영어로 병원을 뜻하는 hospital은 라틴어 호스피탈리스와 호스피티움이란 단어에서 유래했다.

두 단어의 원래 뜻은 나그네를 맞이하는 숙소라는 의미였다.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통해 의료윤리를 되새긴다면, 약학도들은 로마의 디오스코리데스의 선서가 있을 정도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제4장.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ㅡ 랜스란 개념은 중세 시대에 중요하게 여겨졌다.

소규모 부대를 지칭하는 단어이자 창의 이름이기도 했다.

랜스를 중심으로 모여있으면 이런 랜스들을 이끌고 용병 기업인 컴퍼니나 왕이나 귀족들과 계약을 맺어 전투를 했다고 한다. 컴퍼니란 단어가 현대 기업의 어원이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프리랜서란 이 랜스에 소속되지 않은, 자기 혼자 왕이나 귀족과 일대일로 계약을 맺고 전쟁터에 나가는 용병을 일컫는 말이었다.

 

ㅡ 각종 전투에서 스위스 용병대의 활약은 이어졌다.

이 나라 저 나라에 팔리다보니 스위스 용병대끼리 맞붙어 싸우는 전투도 비일비재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스위스 사업가 앙리 뒤낭은 정치적 외교적 이해관계에 상관없이 부상병을 돌보는 조직인 국제적십자사를 창설했다.

적십자사 깃발이 스위스 용병대 깃발과 색깔만 다르고 모양이 일치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ㅡ 청일전쟁은 보통 한국의 식민지화에 단초가 된 전쟁으로 평가받는다. 

청일전쟁 직전까지 동학군을 토벌했다는 조선의 관군은 대체 뭘 했는가? 국사책 어디에도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가지가 아니다. 

중앙에서 파견된 장위영 군대는 일본군과 연합해 청군과 싸웠고, 당시 평양감사가 이끌던 평양의 지방 주둔군인 위수병은 청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웠다.

전라도 지역의 지방군들은 동학군과 연합해 일본군을 친다며 북상했고, 이들을 공격한 것은 일본군과 연합한 조선 관군이었다.

이처럼 청일전쟁에서 조선군은 자기들끼리 서로 총구를 겨누고 전투를 벌였다.

이렇게 스스로 화를 불러들인 고종과 민씨 정권의 이후 행태는 더욱 가관이었다.

중앙군은 일본군과 함께 연합해 청군과 싸우도록 명을 내리고 지방군에는 다른 밀명을 내려 청군과 연합해 한양으로 진격해, 궁궐에서 일본군을 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조선군은 단합해서 외세를 물리치지 못하고 최고 지도자의 어리석은 결정에 따라 외세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만 것이다.

 

ㅡ 청일전쟁 이후 고종과 조선 조정은 착실한 내정개혁과 국력양상에 힘쓰기보다는 또 다른 박쥐외교를 통해 이이제이만을 노렸다.

 

ㅡ 조선인들은 남녀노소 누구나 활을 잘 쐈는데, 열세살 이상부터 활쏘기를 배웠다고 한다. 

무과 시험준비생은 물론, 문과를 공ㅂ하는 선비들도 활쏘기가 유학자의 덕목 중 하나인 유예에 속한다고 하여 열심히 수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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