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87. 죽음의 수용소에서>

by leeesssong 2020. 10. 9.

ㅇ서론

 

ㅡ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 얘기하건대 언젠가는! -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ㅡ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구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에 프랭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ㅡ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ㅡ 만약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는 없다.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이것을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ㅡ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ㅇ본문

 

ㅡ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적 반응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의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그리고 세번째 단계는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이다.

 

첫번째 단계의 특징적인 징후는 충격이다. 

 

ㅡ 정신의학에 보면 소위 ‘집행유예 망상(delusion of reprieve)'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ㅡ 수용소에서 자살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계산을 하고, 모든 기회를 감안해 보아도 보통 수감자들이 살아나갈 가능성이 아주 희박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보장도 없이 자기가 수많은 선별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 살아남는 극소수의 사람 중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조차도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ㅡ 이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늘 면도를 하고 똑바로 서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그러면 더 이상 가스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ㅡ 그 다음 단계는 상대적인 무감각의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감정과는 별도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이 그리움은 너무나 간절해서 그리워하는데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진시키고 말 정도가 된다.

그런 다음에는 혐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ㅡ 정작 참기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다.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정말로 이상한 것은 흔적도 남지 않은 단 한 방의 구타가 어떤 상황에서는 그보다 심한 흔적을 남긴 구타보다 더 상처를 준다는 사실이다.

 

ㅡ 두 번째 단계의 주된 징후인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지게 된다.

즉 내 자신의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이다. 

 

ㅡ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와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이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꿈 속에서나마 소원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ㅡ 심한 영양실조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정신이 온통 먹고 싶다는 본능에 집중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대다수의 수감자들이 어쩌다 서로 가까이서 일을 하게 되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가?

당장 먹는 얘기를 꺼낸다. 

 

ㅡ 수용소 생활의 스물네 시간 중 가장 끔찍한 시간은 바로 기상 시간이었다.

아직 밖이 깜깜할 때 날카롭게 울리는 세 번의 호루라기 소리가 잠이 부족한 우리의 몸을 달콤한 꿈에서 깨우곤 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부종으로 부어오른 아픈 발을 젖은 구두 안에 쑤셔 넣으려고 한바탕 씨름을 했다.

그럴 때면 으레 신발끈으로 쓰던 철사가 끊어지는 것 같은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으며, 그 때문에 여기저기서 끙끙대거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평소 꽤 용감하고 의연한 것으로 알려진 한 친구가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것을 보았다.

신발이 그가 신기에는 너무 작아 할 수 없이 맨발로 눈 위를 걸어 작업장까지 가야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료가 슬퍼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다른 신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작은 빵 조각을 꺼내서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영양실조가 수감자들의 정신을 먹는 것에만 집중시키는 현상만 초래했던 것은 아니다.

 

ㅡ 수감자들에게 성욕이 없었던 원인도 아마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초기의 충격이 성욕을 감퇴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모든 남자 수용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영양실조밖에는 없다.

남자들만 있는 다른 집단 예를 들어 군대와는 대조적으로 수용소에서는 성도착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꿈에서도 섹스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꿈에서는 평소에 풀지 못했던 욕구나 불분명한 감정이 정확하게 나타나는 법인데도 말이다. 

 

ㅡ 수용소에는 대체로 ‘문화적 동면’ 현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두 가지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정치와 종교였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서나 시도 때도 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대개 소문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이런 소문들이 어디선가 시작되어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전쟁 상황에 관한 소문은 대개 모순된 것들이었다.

이런 소문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면서 결국 수감자들의 마음을 신경과민 상태로 만들었다.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소문이 결국은 사람들의 마음에 실망을 안겨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보다 더 분통터지는 사람들은 도저히 못 말리는 낙관주의자들이었다.

 

ㅡ한편 일단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아주 진심으로 그 속에 빠져들었다.

그 믿음의 깊이와 활력이 종종 새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경탄과 감동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ㅡ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ㅡ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ㅡ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ㅡ 이런 세계에서 개인의 자아는 끝내 그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ㅡ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끄는 강요된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가 있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기를, 혼자서 사색에 잠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은 자기만의 개인적인 공간, 혼자 있는 고독을 열망했다

 

ㅡ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무감각은 수감자들의 감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ㅡ 굶주림과 수면부족(이것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이 이런 무감각 상태로 그들을 이끌었으며, 수감자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초조함이 이런 무감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니코틴과 카페인 부족도 이런 무감각과 초조함의 원인이 되었다. 

물질적인 요인 외에 정신적인 요인도 있었는데,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대단한 사람’이었거나 혹은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일반적인 수감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계층이 하락했다는 것을 느꼈다. 

 

ㅡ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ㅡ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 를 제공한다. 

 

ㅡ당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현상을 볼 수 있다. 

 

ㅡ 수감자들 역시 기이한 ‘시간 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자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수용소에서 내가 한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얘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한 적이 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이었던가!

 

ㅡ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sub specie aeternitatis)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ㅡ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주치의는 이 기간 동안 사망률이 증가한 원인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조건이나 식량사정의 악화, 기후의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ㅡ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ㅡ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ㅡ 인간으로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일, 수용소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당했다고 말하는 바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수용소 안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또 실제로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의학적으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이 질문에 대해 상세한 대답을 하기 전에 몇 가지 사실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감시병 중에는 새디스트, 정신의학적인 의미에서 정말로 순수한 새디스트가 있었다. 

둘째, 이 새디스트들은 아주 잔인한 감시병이 필요한 경우에 선발되었다. 

감독 중에는 우리가 누리는 이런 안락함을 빼앗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우리에게 불을 쬐지 못하게 하고, 난로를 뒤엎고, 그토록 사랑스런 불씨를 눈 속으로 던져버릴 때 그들의 얼굴에서 생생한 쾌감의 빛을 읽을 수 있었다 

셋째, 대다수 감시병들은 감정이 메말라 있는 상태라는 점이다.

넷째, 감시병 중에도 우리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밝혀둘 필요가 있다.

 

ㅡ 우리는 세상에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으며, 고매한 인격을 가진 ‘부류’와 미천한 인격을 가진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들은 사회의 모든 집단에 들어가 있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악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순전히 한 부류’의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집단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 감시병 중에도 가끔씩은 좋은 사람이 끼어 있을 수도 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영혼을 파헤치고, 그 영혼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성에서도 선과 악의 혼합이라는 인간 본연의 특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은 아주 심오한 곳까지 이르러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수용소라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ㅡ 강제수용소에서의 정신의학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풀려난 사람들의 심리이다.

우리가 미친 듯이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들은 피곤한 발걸음으로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수용소 정문으로 걸어갔다.

조금씩 사방을 둘러보고, 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로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과감하게 수용소 밖으로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겨보았다. 우리에게 고함을 치며 명령하는 사람이 없었다.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피하기 위해 자맥질하는 오리처럼 몸을 움츠릴 필요도 없었다.

세상에! 감시병들이 우리에게 담배를 권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 우리는 그들을 거의 못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재빠르게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ㅡ 자유. 우리는 스스로 몇 번이나 이 단어를 되뇌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면서 얼마나 자주 이 단어를 입에 올렸는지 이제는 그것이 의미를 잃고 말았다.

현실이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가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ㅡ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의학적인 용어로 ‘이인증(depersonalization, 離人症)'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얼마나 많이 꿈에게 사기를 당해 왔던가! 자유의 날이 와서, 석방되고, 집으로 돌아가고,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아내를 포옹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그 동안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는 꿈, 그런 꿈을 꾸었다.

 

오히려 너무나 자주 꾼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그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자유의 날을 맞은 그 꿈도 끝이 나고 만다.

이제 그 꿈이 지금 실현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 꿈을 믿을 수 있을까?

 

ㅡ 심한 정신적 압박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받았던 사람에게는 자유를 얻은 후에도 그 전과 똑같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히 그런 정신적 억압상태에서 갑자기 벗어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위험은 정신위생학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잠수병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물 속의 잠함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ㅡ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 자유를 마치 특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제는 억압을 받는 쪽이 아니라 억압을 하는 쪽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이제 폭력과 불의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겪었던 끔찍한 경험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ㅡ 사람의 성격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을 때 겪게 되는 비통함과 환멸이다.  

정작 자유를 얻은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어떤 사람은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슬프다!

수용소에서는 그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용기를 주었던 그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마침내 자유가 실현되었을 때, 모든 것이 자기가 꿈꾸어오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여!

어쩌면 그는 전차를 타고, 몇 년 동안 마음 속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꿈 속에서 수천 번 되풀이했던 것처럼 벨을 눌렀을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열어 주어야 할 그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계속 없을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