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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84. 8월의 폭풍>

by leeesssong 2020. 9. 16.

한줄평 - 독일군의 신화만 있는줄 알았지? 소련군의 기동도 신화가 되었다.

(그와중에 관동군 규모... 우리나라 독립군 규모와 비교했을때 참..)


ㅇ서론

​ㅡ  소련군은 1945년 8월 16일, 작전 개시 이후 7일이라는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수행해야할 임무를 완수했다.

ㅡ 소련군의 만주공세는 몇 년간 동유럽에서 진행된 잔혹한 전쟁을 바탕으로 성장한 붉은 군대의 최종시험이었다.

붉은 군대는 보다 숙련된 히틀러의 독일 국방군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첫 18개월동안 짓밟히고 수모를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힘으로 전진을 시작하여 부대구조를 개편하고, 재조직하며, 현대화시키고, 군사교리, 방법, 기술을 발전시킨 끝에 독일 육군과 공군을 상대로 1945년 5월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 경험은 대 일본전 계획과 계획수행에 반영되었다.

ㅡ 만주 전역에서는 소련군 전쟁결정 태도의 특성이 도출되었다.

첫번째, 모든 수준에 걸친 세심한 계획 수립,

두번째, 할당된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발휘한 주도권과 유연성이다.


ㅇ본론

ㅡ 만주의 다양한 지역에서 적절한 작전 지원을 수행하기 위해 주요 사령부들과 함께 수많은 독립 전차부대, 포병부대, 공병부대들을 극동으로 이동시켰다.

부대이동에 동원된 철도 교통량은 이와 같은 전력 재배치의 규모와 복잡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이다.

9000~12000km를 이동하기 위해 136,000량의 열차를 동원했으며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매일 열차 22~30편을 투입했다.

ㅡ 인력과 물자의 이동은 지속적인 위장, 은폐, 보안과 관련이 있었다.

소련군은 일본군을 기만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로 진행되던 병력의 재배치 과정을 대부분 야간화, 기동화하고 집결지를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정해 공격 의도를 숨기려 했다.

극동으로 이동하는 많은 고위 지휘관들이 가명을 사용하고, 젊은 장교들의 계급장을 패용했다.

ㅡ 소련 극동군의 상대는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군, 몽강군이었다.

소련 측의 추산에 따르면 관동군의 전력은 3개 방면군과 1개 독립야전군, 1개 항공군, 31개 보병사단, 9개 보병여단, 2개 전차여단, 1개 특수목적 여단이었고 전차 1,155대, 야포 5,360문, 항공기 1800대를 보유했다고 단언했다.

여기에 더해 8개 보병사단, 7개 기병사단, 도합 14개 보병여단과 기병여단을 보유한 만주국군도 있었다.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에는 제5방면군 소속의 3개 보병사단과 1개 보병여단이 배치되었다.

전체전력은 120만명이었고 100만 이상이 일본군이었다.

ㅡ 일본측 사료에 의하면 한반도 남부와 남사할린, 쿠릴열도의 병력을 제외한 만주의 일본군은 713,724명이다.

일본군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편제는 보병사단이었다.

병력 규모면에서 소련군 소총사단에 비해 크거나 대등했다.

그러나 무장은 소련군보다 뒤떨어졌고, 소수의 일본군 사단만이 차량화되어 있었다.

ㅡ 관동군은 이러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 뒤떨어졌다.

대본영은 관동군의 가장 경험 많은 사단들을 1945년 중국이나 태평양으로 배치했고, 관동군에는 예비대였거나 신설된 사단, 감축된 사단들만 남았다.

관동군이 약해짐에 따라 대본영은 1944년까지 선제공격이 원칙이었던 작전계획을 1944년 9월부터 보다 현실적인 방어계획으로 전환하고, 1945년 국경에서 지연전을 실시한 후, 만주 중심부에서 방어작전을 전개하는 계획을 수용했다.

둔화지역에 구축한 요새선을 최후방어선으로 결전을 수행하도록 구성되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관동군의 1/3가량이 국경 지역에 전개되고, 남은 2/3은 작전술적 종심을 갖춘 연속적인 방어선을 유지한다.


ㅡ 극동군 사령부를 구성하는 전선군은 말리놉스키 원수의 자바이칼 전선군, 메레츠코프 원수의 제1극동전선군,

푸르카예프 대장의 제2극동전선군 등 총 3개 전선군이었다.

자바이칼 전선군은 1개 전차군(제6근위군)과 4개 제병협동군, 소련-몽골기병 기계화집단 등을 보유했다.

전선군을 구성하는 30개 소총사단, 5개 기병사단, 2개 전차사단, 10개 전차여단, 8개 기계화, 차량화 소총여단 등 보유.

ㅡ 제1극동 전선군은 4개 제병협동군, 1개 기계화 군단, 추구앱스크 작전집단, 항공군, 1개 소총사단, 1개 기병사단, 12개 전차여단, 2개 기계화여단 등으로 구성되어있고, 제2극동 전선군은 3개 제병협동군, 1개 독립소총군단, 쿠릴 작전집단 등을 보유했다.

최종적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투사가 가능한 소련군의 병력은 150만명을 넘어섰다.

야포 26,000문과 전차와 자주포 5,500대가 이 병력들을 지원했다.

ㅡ 전선군의 가장 기본적인 부대는 제병협동군이었다.

3개 소총군단, 7~8개 사단, 1~3개 포병여단, 대전차여단, 방공포병사단, 박격포여단, 2~3개 전차여단이나 연대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선군 수준의 지원부대가 이 편제를 강화했다.

ㅡ 소련군의 부대구조가 진화했듯이 작전술과 전술도 향상되었다.

투하체프스키 원수에 의해 발전된 공격정신은 1939년 교범과 교리 논쟁에 반영되어 전쟁기간 동안 소련 군사사상에 널리 확산되었다.

1930년대 말 군부 숙청으로 인해, 살아남은 대다수의 생존자들은 대규모 기갑부대에 의한 기습과 과감한 기동을 현실에 적용하지 못했다.

ㅡ 그러나 1941~2년 모스크바 동계 반격, 하리코프, 보로네스, 스탈린그라드 등 독일군의 총체적 섬멸로 승리를 거두었고, 쿠르스크에서 강력한 반격에 앞서 정교한 방어체계를 활용하며 풍성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ㅡ 1945년 소련군의 공세작전 수행에 대한 기본적인 교범은 야전요무령044와 요새화 지대 돌파에 대한 교범같은 부속문서들이었다.

야전요무령은 초기 교범에 나온, 충격집단이 견제집단 인접한 측면을 보호할 동안 공세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충격-견제 집단' 개념을 소중한 전투력의 낭비로 보았다.

실제로 새로운 교범은 모든 부대가 능동적으로 공세에 나서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제병협동 전투의 특성을 명확히 하면서, 현대전을 모든 병과의 대규모 참여로 규정하였다.

이에 지휘관들이 '보병과 화력체계를 최대한 그리고 동시에 전투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참여시켜야 한다'고 기술했다.

적을 압도하기 위해 모든 전투력을 끌어내려면 전력은 종심에서 제파화되고, 각각의 제파는 독립된 임무를 받아야 한다고 기술했으며 일반적으로 소련군은 전력을 2제파로 구분했다.

 

1제파는 공세를 선도하고, 2제파는 간단히 1제파를 강화하는 동시에 공세를 확대한다.

각 수준의 소규모 예비대는 침투가 성공하기까지 적의 반격을 격퇴한다.

또한 기습이 승리의 열쇠라고 단언했고, 승리를 달성하는데 보병이 주된 역할을 한다고 기록햇다.

ㅡ 표준적인 혹은 전형적인 전투대형은 결정적인 방향으로 전력을 신속하게 집중하도록 촉진하고, 공격에 비중을 둘 수 있도록 했다.

다만 넓은 전선에서 적 방어를 급히 돌파해야 할 경우, 혹은 빠른 진격 속도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단일 제파 대형이 보다 효과적이었다.

경우에 따라 적의 방어력이 극히 강하고 공격정면이 좁은 경우에는 3개 제파로 전개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인 야전군은 포병, 전차, 대전차 부대로 강화된 2개 제파를 구성했다.

 

1제파는 전력의 60%, 대게 2개 소총군단이 나란히 배치되었다. 제2파는 40%로 대게 1개 소총군단이나 야전군의 기동집단 임무를 수행하는 기계화군단이었다.

2제파는 공격부대의 전력과 지속성을 강화하고, 전투대형의 종심을 연장하며 돌파구와 전과를 확대하고 공격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ㅡ 기갑 및 포병부대는 특정한 임무 완수를 위해 모든 수준의 부대에 배치되었다.

ㅡ 사단 작전지역의 넓이와 지형 특성에 따라 1~3개 이동로를 사용하고, 연대는 1개 이동로만 사용했다.

ㅡ 오직 여단급 이상의 단위 부대만이 선견대가 되었으며, 전위대는 적을 직접 공격하고 분쇄했다.

ㅡ 공세행동의 기본적인 3가지 형태는 정면공격, 소규모 포위, 대규모 포위다.

소규모 포위는 정면공격의 결과로 이뤄지거나 적 방어에 돌파구를 뚫은 뒤에 진행되었다.

대규모 포위는 적의 측면이나 측면들에 대한 종심 공세작전과 관련되었다.

가끔 정면공격과 함께 진행되기도 했다.

정면공격은 좁은 공세 정면에 강력한 병력 집중을 요구했다.

ㅡ 보병과 전차부대들은 서로 밀접하게 활동하며 적의 방어선을 도라한다.

돌파하는 동안 포병과 공군은 적지종심에서 적을 공격한다. 전차와 기계화부대는 야전군이나 전선군의 기동집단으로서 침투 수행을 위해 초기 돌파를 확대한다.

다양한 병과(공수, 종심수색, 비정규군)가 적의 후방에서 혼란을 일으킬 작전을 수행하고 적 예비대의 이동을 봉쇄한다.

ㅡ 포병 공격준비사격은 1~4시간 가량 계속된다.

ㅡ 대규모 전차부대와 기계화부대는 특히 급편방어에 대한 정면공격에서 사용하기에 특히 적합했다.

ㅡ 추격단계는 포위나 정면공격의 돌파를 달성한 후에 나타났다.

가장 결정적인 추격은 후퇴하는 적의 양익이나 단익에 평행한 축선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ㅡ 지속적인 행군로 확보와 교통정리에는 막대한 공병이 필요했다.

모든 부대는 상당한 포병과 공병 지원을 필요로 했다.

특히 작전 지속력은 물, 연료, 탄약, 식량에 달려 있으므로 여기에 필요한 군수지원이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ㅡ 극동사령부의 만주정복계획은 개념적으로 간단했지만 계획의 규모와 계획에 대한 기대는 거대했다.

3개 축선을 따라 전략적인 양익포위를 실시하고, 작전의 목적은 만주의 확보 및 관동군 대다수의 격멸이었다.

자바이칼 전선군은 만주 서부에서 동쪽으로 진격하고, 그 동안 제1극동 전선군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ㅡ 자바이칼 전선군은 만주 중심부를 향해 350km를 진격하고, 하이룽-아얼산 요새지역을 남쪽에서 우회하고 창춘으로 곧장 진격할 예정이었다.

제1극동 전선군은 만주 동부의 일본군을 최대한 압박하기 위해 전력을 단일제파로 배치했다.

제1극동 전선군과 자바이칼 전선군은 창춘에서 합류해 랴오둥 반도에서 일본군의 저항을 최종적으로 일소한 후 뤼순(여순)을 확보하기로 했다.

제2극동 전선군은 하바롭스크 남쪽의 블라고베셴스키에서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을 도하하여 넓은 정면을 진격할 예정이다.

만주 북부의 일본군에 최대한 압박을 가해 격멸하거나, 만주 중부로 후퇴하여 소련군의 주공에 저항하는 일본군이 남쪽으로 질서정연하게 철수하지 못하도록 막는 지원 임무를 부여받았다.

ㅡ 자바이칼 전선군의 진격은 큰 성과를 가져왔다.

험난한 지형을 극복하며 350km 를 진격했고, 일본군이 기민하게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8월 12일 이후 소련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오직 보급뿐이었다.

막대한 규모의 장갑차량들에 대한 재보급 문제에도 불구하고 진격은 여전히 탁월했다.

수송망 또한 이미 700km 까지 늘어나 과도하게 연장된 상태였다.

ㅡ 제1극동 전선군의 공세정면은 자바이칼 전선군의 공세정면보다 좁았고, 만주 동부의 일본 국경들은 서부 국경에 비해 요새화되어 있었다.

ㅡ만주의 모든 곳에서 그랬듯이 기동성, 화력, 기갑과 포병의 운용이 주제가 되었다.

증원 전차여단인 선견대는 일본군 방어선을 휩쓸고 에워쌌으며 모든 체계적 방어를 무너뜨렸다.

후속 소총부대도 모든 고정 방어를 무너뜨리거나 우회했다.

ㅡ일본군의 기갑전력 부족과 대전차 능력 부족은 막대한 부정적인 효과로 이어졌다.

일본군은 지형에 의존하며 지형이 소련군의 군수보급 효율을 낮추고 보병들의 희생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늦출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일본군 국경 요새지역 수비대들은 용감하고 격렬하게 싸웠으나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일본군의 용감한 방어는 소련군의 물결에 미미한 영향밖에 주지 못했고, 소련군은 요새지역을 우회해 침투해 들어가며 보다 후방의 목표들을 휩쓸고 요새지역을 후방에서 공격했다.


ㅇ공세분석 및 결론

ㅡ 소련군은 만주 전역의 환경에서 필요한 속도를 달성하기 위해 규정상에 명사된 사항들을 일부 조정했다.

그러나 규정자체는 공세가 직면한 구체적 조건에 따라 융통성 있는 조정을 권장했다.

소련군은 적을 상대로 기습을 달성하기 위해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다.

또 기습과 공격의 기세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요소로 주도권을 강조했다.

ㅡ 소련의 3개 전선군은 전역에서 정면 4,400km, 종심 400~900km에 걸쳐 작전을 수행했다.

지형으로 인해 인접부대와 측면이 연결되지 않은 채로 작전을 수행하도록 강요당했다.

이런 환경에서의 작전은 세부적인 계획이 요구되지만, 그 이전에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각 부대가 독립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지휘관의 주도권을 부여해야 했다.

고위 지휘관들은 한번에 여러 지역에 위치할 수 없었고, 무선 통신도 한계가 분명했다.

ㅡ 보안 대책은 주요 지휘관의 이동이나 이동하는 병력의 규모를 숨기는데 초점을 맞췄다.

전투배치를 최대한 지연시켰고 이는 전략적 기습 극대화는 물론 전술적 기습으로도 이어졌다.

부대들은 전선에서 20~80km 후방에 위치한 지점에 집결한 후 행군했다.

ㅡ 일본군들은 장마철이 끝난 1945년 가을까지 소련군이 주공을 실시할 수 없다고 평가했고, 소련군의 능력에 대한 과소평가 경향도 뒤섞여 있었다.

일본군은 대규모 부대가 물을 보급받아 거대한 사막을 가로지르고 다싱안링 산맥의 방벽을 극복할 가능성을 배제해버렸다.

ㅡ 소련군의 작전술적 기술은 요새화된 지역에서 우회로를 탐색하고 우회했고, 통과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지형들을 극복했지만, 일본군은 사전에 예측한 전진축선에서도 소련군의 공격을 견제하지 못했다.

ㅡ 적절한 대전차포가 없던 일본의 사실상 유일한 대전차 공격수단은 폭발물을 들거나 몸에 두른 병사들의 돌격뿐이었다.

일본군은 소련군이 인력소모보다 기계화와 화력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ㅡ 소련군은 방어선을 돌파하고 침투하고, 전술적 종심으로 추격하기 위한 지속적인 선견대 운용에서 큰 효과를 거뒀다.

전차 중심의 선견대는 모든 진격축선과 모든 전투지역에서 적절한 제병협동 지원을 받으며 일본군을 마비시켰다.

또한 전선군과 야전군 수준에서 포위를 기동의 원칙적인 형태로 잡았다.

ㅡ 전선군 수준에서는 야전군 수준의 선견대를 전역 동안 빈번히 사용했고, 군단들은 증강된 전차여단을 선견대로 사용했다.

ㅡ 소련군의 전투대형은 유연하고 다양했다.

모든 소련 지휘관들의 일반 원칙은 방어측이 강력하면 할수록 더 깊은 제파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ㅡ 요새는 최대한 우회했고, 화력으로 요새를 무력화시켰다.

ㅡ 전반적으로 행군대형에서 공병지원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육해공군간 밀접한 공조도 전술적 성공에 기여했다.

ㅡ 부대의 행군대형이 지나치게 길어져 적의 공격에 취약해지고 정상적인 포병 지원이 어려웠으며, 작전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도의 부족으로 인해 길을 잃고 유류 소모와 보급선 유지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지만 일본군은 이를 활용하지 못했다.

ㅡ 소련군은 관동군을 경시하지 않고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에, 대본영은 자만, 오만, 혼란과 비관주의로 인해 소련군의 행동에 부적절하게 대응했다.

ㅡ 휴전에 대한 소문과 최종적인 항복 결정이 일본군의 작전을 혼란스럽게 하고 만주 남부 방면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저항을 방해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관동군은 그에 앞서 피해를 많이 입었다.

ㅡ 일본군 보병사단들은 현대화가 지지부진했고, 전차부대나 기계화부대도 크게 부족했으며 대전차화기도 부족했다.

병력의 규모면에서는 앞섰으나 소련군에 비해 전체적으로 화력이 부족했다.

ㅡ 소련군이 사용한 3가지 요소는 현대전장에서도 아직 유효하다.

1. 부대 제파 편성에 상상력을 발휘하라, 특히 적에게 고착방어를 실시할 시간적 여유가 있을때 상상력을 발휘하라.

2. 부대를 시간차를 두고 전투에 돌입시켜라

3. 선견대를 모든 수준에서 활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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