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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81.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by leeesssong 2020. 8. 12.

한줄평 -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 국제관계는 감정없이 냉철하다. 그걸 아직까지도 모르는듯 하다.


ㅇ서론

ㅡ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전쟁 슬로건은 '민주주의 수호와 세계평화', '모든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민족의 존립을 위한 전쟁'을 국가 목표로 내세웠다.

ㅡ 신흥국가위원회 회의석상에서 E.H.카는 약소국과 패전국이 부당하게 취급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애당초 국제연맹이 잘못했고, 패전국 독일에 대한 국제연맹의 처분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토인비는 카와 다릅니다.

그는 왜 히틀러 같은 사악한 정신이 등장했는지 같은 위압적 태도의 문화론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인간성을 신뢰한다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한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카는 상당히 냉철하게 지적합니다.

파리강화회의의 결정과 국제연맹이 한 일은 잘못됐다고 말입니다.

ㅡ 1929년 10월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최대 타격을 입었다.

특히 실업률의 증가가 영국을 괴롭혔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군력 증강은 사실상 어려웠다.

ㅡ 역사적 사건은 특수한 사건이 차례로 축적된 것이기 때문에 서로 교훈을 주지도,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 때문에 완고한 사람들은 역사는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카는 '역사는 교훈을 제시한다. 또한 역사적 인물의 개성이나 특수한 사건은 그 다음에 벌어지는 사건에 무언가 영향을 준다."고 반박한다.

ㅡ 미국이 애초에 장제스를 지지한 이유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일본이 독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국민정부에 거액을 원조하였으나 일본이 쓰러졌음에도 정작 중국대륙이 공산화되면서 '중국 상실'이라는 경험은 미국에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겼다.

"한 나라의 전쟁이 마지막 단계에서 내전으로 바뀌고 그 내전에서 반대편이 승리할 것 같으면 직접 개입해서라도 미국이 원하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ㅇ본론

제1장. 청일전쟁 - '침략, 피침략'을 넘어봐야 할 것

ㅡ 19세기 중반까지 열강은 '화이질서'의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보았다.

'문명의 중심인 중국이 주변 지역에 덕을 미치고 그 감화의 정도에 따라 형성되는 속인적 질서'로서 중국과 동아시아의 관계를 규정하는 국제질서를 조공체제라고 부른다.

열강들에게 조공체제는 교육범위를 넓힐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열강이 중국에 부탁하면, 중국이 해당국에 열강의 말을 전하면서 상황을 조정하는 것이다.

ㅡ 러시아, 프랑스, 일본이 각각 청의 화이질서에 도전하는 분쟁을 일으켰는데, 이들을 상대로 청이 제대로 대응하였고 이는 그만한 힘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 1889년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당시 정치경제학 교수 폰 슈타인을 만난다.

폰슈타인은 이토에게 그랬던 것처럼 군인인 야마가타에게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을 가르쳤다.

-주권선 : 주권이 미치는 국토의 범위,

-이익선 : 국토의 존망과 관련된 외국의 상태,

 

야마가타는 러시아가 중국영토를 통과하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출해 그곳에 함대를 배치하면 끝장아닌가 라고 걱정하였다.

만약 러시아가 한반도로 내려와 동해안의 원산 일대에 항구를 만든다면 그곳은 극동함대의 기지가 되고 말 것이라 생각하였다.

두사람의 논의에는 '조선을 중립국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이익선이 된다. 중국 대신 일본이 조선의 중립을 보장한다, 담보한다'는 논리가 등장하게 된다.

ㅡ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은 청에 출병을 요청했고 텐진조약으로 일본도 청에 출병을 통보한다.

당시 일본은 군사적으로 꽤 일찍부터 히로시마에서 인천까지 얼마나 빨리 군대를 보낼수 있는지 파악하면서 파병을 준비하고 있었다.

ㅡ 조선 정부에 내정개혁을 요구하는 일본의 주장은 상당한 억지였으나 최종적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의 입장을 무력으로 무너뜨리기로 하고 그렇게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ㅡ 당시 청은 일본이 러시아의 간섭을 두려워할 것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영국과 손을 잡고 있었다. 사실 청일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의 대리전이기도 했다.

ㅡ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서도 조선은 '자주국'이라 쓰여있고, 청일전쟁 후의 시모노세키조약에서는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이 됐다.

이와 같은 조선과의 조약 그리고 조선의 개항장 설치는 다른열강에게도 모두 균등하게 적용되었고, 일본은 그 실행을 보장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또한 시모노세키조약은 청에 후베이성, 사스, 쓰촨성, 충칭, 장쑤성, 쑤저우, 저장성, 항저우를 추가로 개항하도록 규정했는데, 이는 다른 열강에도 적용되면서 결국 일본의 승리는 다른 나라의 경제적 이익에도 공헌한 셈이다.

ㅡ 일본은 청에서 받은 배상금의 60%를 러시아를 겨냥한 군비 확장비로 지출했고, 제철소를 설립하는 비용, 전비로 쓴 임시군사비를 메우기도 했다.

ㅡ 청일전쟁에서 이겼는데 삼국간섭(러시아, 독일, 프랑스)이 불만을 표출하자 일본은 중국에 랴오둥 반도를 돌려주어야했다.

이것은 일본이 전쟁에는 강해도 외교에는 약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이런 결정은 국민에게 선거권이 충분히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더이상 정부가 국정을 마음대로 하지못하게 보통선거운동이 시작됐다.


제2장. 러일전쟁 - 조선이냐 만주냐, 그것이 문제로다

ㅡ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중화질서에서 벗어났고, 러일전쟁으로 서구의 지배에서도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ㅡ 러일전쟁 5년 뒤 1910년 한일합병은 섬나라 일본이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는 것을 의미했다.

ㅡ 러시아에게 러일전쟁은 무엇이었을까?

소련군 스베친은 <육해군 전쟁계획과 작전>에서 "일본의 계획은 육군과 해군을 협조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고 말했다.

육전의 기본전략으로 대군을 동원해 상대를 포위섬멸하는 작전이 아니라 일본군은 '육지와 바다에서의 협조',

즉 육해군 공동작전을 채택했고 여기에 전략가 스베친이 주목했다.

ㅡ 1896년 러시아는 중둥 철도 부설권을, 1898년에는 뤼순, 다롄 조차권, 중둥철도 남쪽지선 부설권을 획득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랴오둥반도의 남쪽에 부동항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ㅡ '의화단운동'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관계가 바뀌는데,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헤이룽강 연안을 점령했다.

러시아는 만주군에서 철군약속을 지키지 않고 이를 본 영국은 일본에 동맹을 제안하며 1902년 1월 영일동맹이 체결되었다.

이 무렵 영국은 남아프리카 전쟁(보어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해 중국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ㅡ '돈을 들이지 않고 뤼순, 다롄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다 쪽, 즉 한반도를 잡아두는 편이 비용이 싸다'

ㅡ 청일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이었으나 러일전쟁은 철도 부설과 도시건설에 필요한 비용을 싸게하는 것과 극동의 바다에 해군을 유지하는 문제를 다룬다.

각각 경제 및 안전보장 문제와 연결된다.

ㅡ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영향력을 미치던 1970년대까지는 제국주의 국가 일본이 시장을 찾아 만주를 노렸고, 그래서 러시아에 문호 개방을 압박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는 해석이 유력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의 사료가 공개돼 밝혀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양국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략적 안전보장의 관점에서 싸웠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전쟁을 피하려고 한 것은 오히려 일본이고,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러시아라고 할 수 있다.

ㅡ 일본은 한국에서의 우월권을 원했다.

'우세한 이익'이라는 것은 식민지 혹은 그와 비슷한 특수 권익을 가리킨다.

즉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세력권을 인정하고, 그 대신 일본은 만주의 철도선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붙인 조건은 첫번째, 러시아가 한반도의 해협을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는 권리,

두번째, 북위 39도 이북의 한국을 중립화하고, 일본이 한국의 영토를 군사적 전략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내걸었다.

ㅡ한반도를 군사적 전략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훗날 강력한 족쇄가 될 수 있었고 러시아 함대가 대한해협을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ㅡ 일본은 미국 영국의 도움을 원해 만주의 문호개방을 강조했다. 그래야 서구 열강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ㅡ 러일전쟁도 대리전쟁의 성격을 가졌다.

러시아에는 독일과 프랑스가, 일본에는 미국과 영국이 재정적 지원을 했다.

청, 일본, 미국의 통상조약 개정을 통해 미국은 일본이 전비를 쉽게 모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ㅡ 러시아 중둥철도 부설시 프랑스 은행이 이를 지원했고, 러시아가 패하면 철도 공재를 회수할 수 없게 된다.

독일은 배후의 잠재적인 적, 러시아가 동쪽으로 향하길 바라며 도와준다.

ㅡ 중국은 러일전쟁에서 중립을 지켰으나 일본에게 돈을 기부하거나 만주에 살고 있는 만주인이나 중국인이 일본군 첩자가 되어 지원하였다.

ㅡ 러일전쟁 이후 한국에서의 '우세한 이익'이 포츠머스조약에서 '탁월한 이익'으로 나타났다.

청일전쟁 때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의 나라'라는 표현이 '정치, 군사 및 경제적인 탁월한 이익'으로 바뀌었다.

이는 이미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ㅡ 포츠머스 조약의 제3조 : 러시아 정부는 청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또는 기회균등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일체의 영토상 이익 또는 우선적, 전속적인 양여를 만주에서 얻을 수 없음을 선언한다.

중국 동북부의 문을 활짝 열은 것이 러일전쟁이었다.

ㅡ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배상금을 한푼도 받지 못해 일본 국민들은 크게 실망했다.


제3장. 제 1차 세계대전 - 일본이 느꼈던 주관적인 좌절감

ㅡ 1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변화는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왕조가 무너진 것이다.

1919년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고, 러시아는 내전을 거쳐 1922년 소련이 된다.

두번째 큰 변화는 새로운 사회계약의 등장으로 1920년 조직된 국제연맹이 있다.

세번째 큰 변화는 제국주의 시대에 당연시됐던 식민지배가 비판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구 독일령 식민지를 처분할때 국제연맹이 각각의 연합국에 대해서 그 지역의 통치권을 위임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래서 일본은 남양군도 등의 독일 식민지를 분배받았다.

ㅡ 당시 제국주의 시대에는 상업적인 요인으로 자원과 해외시장을 위한 식민지 획득이었으나 확실히 일본이 획득한 식민지를 보면 대부분 안전보장과 관련된 곳이다.

결국 서구와 달리 일본은 무역, 포교, 사회정책이 아닌 주로 안전보장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서 식민지를 획득했다.

ㅡ 남양군도의 경우 미국과 전쟁을 할 시 해군 근거지로 삼을 수 있다.

미국은 식민지를 별로 갖지 않은 나라였지만, 1898년 미국-에스파냐전쟁으로 필리핀과 괌을 획득하고 하와이와 사모아를 합병한다.

ㅡ 일본이 칭다오를 포함한 중국 산둥성을 점령하여 독일이 부설한 자오지 철도를 획득한다.

러일전쟁과 한국합병으로 일본의 교통망은 한반도를 통해 대륙까지 뻗어나갈 수 있었다.

자오지 철도는 지난, 텐진, 베이징이 연결되고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베이징을 공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유사시 산둥반도의 자오저우만, 칭다오에 상륙한 다음, 철도를 통해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철도를 따라 텐진, 베이징까지 북상이 가능하다.

ㅡ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국가개조론'이 속속 등장하고, 이대로 변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며 위기감을 호소하는 단체가 많이 생겨났다.

ㅡ 일본은 다음 전쟁은 풍부한 자원의 중국을 무대로 벌어질 것이고 제 1차 세계대전을 끝낸 유럽 각국이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의 요충지로 몰려들 것이고 그래서 엄청난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ㅡ 당시 위기감의 3가지 요인

1. 1차대전 당시 일본의 참전 범위를 놓고 미국, 영국과 대립했다.

2.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중국 내 권익을 두고 중국과 미국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3. 파리강화회의 도중 한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ㅡ 당시 영국이 가장 피하고자 한 것은 영국의 대중 무역 이익이 줄어드는 것이었지 일본이 독일령 산둥반도를 점령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였다.

ㅡ 파리강화회의에서 전승국의 관심사는 '1차 대전의 배상금을 독일로부터 어떻게 받아내는가'였다.

케인스는 독일에 부과된 전쟁 배상금을 가능한 적게 해달라고 연합국에 요구했다.

ㅡ 중국은 1917년 3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후 승준국이 되었기에 청나라 때 맺었던 독일과의 불평등조약은 없어져야 정상이고, 옛 영토를 돌려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영국은 미국의 참전은 상당히 나중이고,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일본이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중국에 동정의 뜻을 표하면서도 일본편을 들게 된다.


제4장.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 일본의 자멸과 중국의 역할

ㅡ 관동군은 일본측 남만주 철도의 선로 일부로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 소행으로 뒤집어 씌워 중국을 공격했다. 만주사변 당시 관동군은 모두 합쳐 1만명, 장쉐량이 거느린 동북군은 약 19만명이었다.

ㅡ 당시 일본 사회의 인식은 '목숨과 돈을 들여서 싸운 전쟁 -> 그 전쟁에 간신히 이겨 체결한 조약 -> 그 조약에 쓰인 일본의 권익 -> 이를 지켜야 한다.' 고 정리할 수 있다.

'만몽은 일본의 생명선'이라고 말한 군부는 중국이 조약으로 인정받은 일본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생각했다.

ㅡ 당시 많은 사람은 독일의 패전이 적의 주력을 포위섬멸하는 단기결전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시라와 간지는 단기결전의 섬멸전이 아니라, 장기 지구형의 소모전이었다고 하면서 독일이 이점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패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전쟁을 할 때는 적과의 소모전에서 밀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상대의 경제봉쇄 속에서도 전쟁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따라서 일본은 다가올 대소전에 대비하는 기지로서 만몽을 원했다.

ㅡ 1931년 9월 일본 육군은 만주사변, 1932년 1월 해군이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중국군과 전투를 개시했다.

중국은 만주사변 당시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으나 일본 스스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이틀 뒤 일본군은 러허를 침공했다.

ㅡ 만주사변, 상하이사변, 러허작전과 같은 전투는 비교적 빨리 종결됐다.

특히 만주사변 당시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일본군의 도발에 밀려들지 말라고 지시하면서 군대를 퇴각시켰다.


제5장. 태평양전쟁 - 전사한 장소를 알려줄 수 없는 나라

ㅡ 개전 당시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일본의 열두배에 가까웠다.

일본은 절대적인 격차를 국민에게 숨기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물질적인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야마토 정신'이라고 하면서 국력 차이를 강조하기까지 했다.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위기를 강조하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ㅡ 당시 일본 지식인들은 태평양 전쟁은 강대국인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한것이기 때문에 약자를 괴롭히는 전쟁이 아니라 긍정적인 밝은 전쟁으로 받아들였다.

ㅡ 일본은 독일과 소련 사이를 중재해서 독소화평을 실현하고, 독일의 전력을 영국과의 싸움에 집중하도록 만든 뒤, 영국이 굴복하면 미국의 전쟁의지도 약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ㅡ 물자가 모자라면 민수와 군수가 서로 경쟁하게 된다.

또한 당시 일본은 격침돼 없어지는 배의 비율, 손실률을 명확하게 계산하지 못했다.

또한 일본은 미국의 생산력이 그토록 엄청나게 늘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ㅡ 소련은 중국에 전투기 924대, 자동차 1516대, 대포 1140문, 기관총 9720정, 지원병 형태의 소련인 조종사를 보냈다.

미국과 영국은 중국의 각 도시에 거액의 경제적 권익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일본의 중국무역 독점을 참을 수 없었다.

중국은 일본에 의해 해안이 봉쇄됐지만 홍콩 등을 통해 물자를 얻을 수 있었다.

ㅡ 1939년 미국은 일본에 항공기와 그 부품 수출을 금지하고, 7월 미일통상항해조약을 폐기했다.

ㅡ 당시 중국과 싸우던 일본은 대담하게 남진을 추구했는데 그 이유는 2가지다.

첫째,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일본의 침략에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다.

둘째, 일본 스스로 동남아시아의 자원을 획득하려고 했다. 장제스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중일전쟁 장기화에 대비하였고, 게다가 당시 유럽 대부분의 나라는 독일에 제압된 상태라 주인없는 지역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ㅡ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그해 4월 13일 일본은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었다.

또한 1940년 일본은 이미 삼국동맹을 맺은 상태였고 삼국동맹 + 소련까지 꿈꾸었으나 독일의 소련침공을 본 마쓰오카는 태도를 바꾸어 북진을 주장했다.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는 사이 일본도 소련을 배후에서 공격해 독일에 호응하자는 것이었다.

ㅡ 1941년 미국과 영국은 소련과 협정을 맺고 소련에 군수물자를 보낸다.

ㅡ 일본은 '항공기 수와 조종사의 기량, 항모 등이 미국보다 우세한 시점에서 전쟁을 시작하자'고 마음 먹었다.

기습작전을 해군 전체, 나아가 정부의 정책이 되도록 밀고나간 일본은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였고, 일본의 기습 공격은 육군이 영국령 말레이반도의 코타바루에 상륙을 개시하고, 하와이 진주만에서 미군의 주력 전함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선전포고 없이 미국과 영국에 선제공격을 가한 셈이다.

ㅡ 미국은 왜 진주만에 어뢰 방어용 그물도 설치하지 않은채 적절한 방비를 하지 않았을까?

당시 전투기가 고도 100m 정도에서 어뢰를 떨어뜨리면 어뢰는 60m 정도 깊이까지 가라앉고, 심도 6m 를 유지하며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 배의 흘수가 7m 정도인데 6m로 전진해오는 것은 배 밑바닥으로부터 1m 에 위치한 화약창고 부분을 정확히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진주만은 수심 12m의 얕은 만으로 전함은 수면에서 배 밑바닥까지 7m 정도 여유가 있으면 정박할 수 있으나 어뢰가 가라앉는 수심 60m의 여유는 없으니 어뢰가 떨어져도 전부 만의 바닥에 꽂히게 될것이라 예상했다. 게다가 일본의 기술력을 얕보았던 것이고 이는 일종의 인종편견이 크게 작용했다.

일본은 어뢰를 12m까지 가라앉도록 투하하는 훈련을 3개월 만에 가능하게 만들었고 미국 측 기록에 의하면 투하된 어뢰 중 27발이 명중했다고 한다.

ㅡ 당시 미즈노 히로노리는 일본의 주요 물자 8할을 외국에 의존하기 때문에 통상 관계의 유지는 생명줄과도 같다고 주장했다.

현재 전쟁은 반드시 지구전, 경제전이 될 것인데 일본은 물자가 부족하고 기술이 저열하며, 주요 수출 품목은 생필품이 아닌 생사여서 일본은 전쟁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ㅡ 태평양 전쟁 시작부터 1945년 패전까지 전체의 9할에 가까운 사람들이 마지막 1년 반 동안 전사했다.

그 이유는 태평양전쟁이 1944년 6월에 벌어진 '마라아나 해전'으로 이미 결판났기 때문이다.

보통 전쟁의 분기점으로 1942년 미드웨이해전이 유명한데 당시 일본 육군은 홍콩, 필리핀, 싱가포르, 자바, 버마 등을 성공적으로 점령해 일본군의 불패신화는 여전히 건제했다.

ㅡ 당시 뉴기니에는 18군이 파견됐는데, 10만명 중의 군인중에 9만명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일본 신문에는 자살특공대에 지원했다는 조종사의 사진은 실ㄹ도, 뉴기니에서 어느 지방의 사단 90%가 전사했다는 소식은 실리지 않았다.

국민이 패배를 알 수 없도록, 정보를 모을 수 없도록 단속하면서 전쟁을 계속했다.

당시 일본인은 라디오를 통해 몰래 연합국의 방송을 들으며 정보를 획득했다.

ㅡ 또한 사람들은 '주가 이야기'를 듣고도 정보의 흐름을 느꼈다.

1945년 2월부터 군수공업 관련이 아닌, 민수 관련 주가가 올랐고, 선박 침몰로 1943년 무렵부터 일본에는 민간의 배가 거의 남지 않았는데, 선박관련 주가가 올라갔다.

이것은 누군가가 전쟁이 끝나서 평시로 돌아갈 것을 예상하고 주식을 매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많은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피해'의 이미지로 느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본은 유족에게 그 병사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알려줄 수 없었다.

이것은 위령에 관한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을 감안할 때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다시 말해, 엄청난 수의 전사자와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로 인해 피해자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또한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와 몽골 등에 억류된 일본인은 63만명에 달한다.

소련은 일본인 포로를 철도건설, 입업 등의 작업에 동원했고, 사망자와 귀국하지 못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많은 일본인들은 만주에서 철수했다. 패전 당시 일본은 총인구의 8.7%가 철수를 경험했다.

만주에서의 철수는 체험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민족적으로도 커다란 체험이었다.

ㅡ 독일군의 포로가 된 미군 병사의 사망률은 1.2%에 불과했으나 일본군의 포로가 된 미군 병사의 사망률은 37.3%를 넘었다.

포로문화가 없었던 일본 병사로서는 투항한 적국 군인이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일본은 자국의 군인조차 소징히 여기지 않았고 이는 결국 포로학대로 이어졌다.

ㅡ 일본은 국민의 식량에 가장 신경쓰지 않은 국가중 하나다. 패전 당시 일본 국민이 섭취하는 칼로리는 1933년 시점의 60%로 떨어져 있었다. 일본의 농업은 노동집약형이었다. 그런데도 농민에게는 징집유예가 거의 없었다.

ㅡ 독일은 일본보다 더 심하게 국토가 파괴됐지만 1945년 3월, 항복 2개월 전 시점에 에너지 소비량이 1933년보다 10~20% 증가했다. 독일은 국민에게 배급하는 식량을 절대로 줄이지 않았다.

국민이 불만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식량확보를 우선으로 한 것이다.

하물며 포로들이나 한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더 비참한 장면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ㅡ 일본 병사와 국민은 자기 자신의 열악한 처지와 힘든 생활만을 기억햇고, 그 기억으로 포로와 식민지 주민의 비참했던 모습을 덮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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