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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82. 한눈에 꿰뚫는 전쟁사도감>

by leeesssong 2020. 8. 18.

​한줄평 - ​공부하면 할수록 중고등학교 역사시간때 뭘 배운건지 의문이 든다. 


ㅇ 서론

 

ㅡ 인간의 갈등은 정치가 해결하고, 정치의 갈등은 전쟁이 해결한다.

ㅡ 대부분의 전쟁을 몇가지 패턴으로 정리하면

1. 해양국가 vs 대륙국가 - 가치관의 대립

2. 기독교 vs 이슬람교 - 종교의 대립

3. 선발 제국주의 vs 후발 제국주의 - 경제의 대립

4. 민주주의 vs 전체주의 - 이데올로기의 대립

5. 동서 분쟁 vs 민족 분쟁 - 민족의 대립


ㅇ본론

제1장. 해양국가와 대륙국가

 

ㅡ 고대부터 중세에 걸쳐 일어난 전쟁의 배경은 지정학적인 이유가 대부분이다.

해양국가는 섬나라 및 연안국으로서 영토획득보다는 항구 등 교약 거점의 확보를 중시하고, 해양교역으로 산업의 중심으로 삼는 국가로 영국, 일본, 네덜란드, 미국 등이 있다.

대륙국가는 대륙의 중앙부에 주축을 두고 육상운송과 강을 이용한 수상운송을 중시하며 영토획득을 가장 우선시 한다. 내륙자원의 생산과 이동을 산업의 중심으로 삼는 국가로 중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이 있다.

ㅡ 알렉산드로스는 어떻게 페르시아제국 지배하의 병사와 백성을 복종시키는데 성공했을까?

철저한 이문화혼교정책에 있었다. 지배 지역의 토착종교와 제도를 존중하면서 그리스문화를 동방에 전파했다.

또한 당시에는 다신교 시대였기 때문에 외래 신앙도 공존할 수 있었다.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문호가 융합한 광대한 헬레니즘문화권을 형성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대원정은 이후의 유럽질서를 형성하게 될 로마와 기독교의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ㅡ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조, 위, 한, 제, 연, 진 초의 일곱나라가 대표적인 강국이 되어 '전국칠웅'으로 불리게 된다. 

그 중 진은 어떻게 해서 강국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이유중 하나가 '조직의 중앙집권화'이다. 또한 엄격한 법치주의와 군현제를 받아들였다.

또 다른 이유는 다른 나라들을 분열시키는 외교전략에 있었다.

장의가 주장한 연횡책, 소진이 주장한 합종책, 연횡책이 성공했던 것은 칠웅국의 의도가 제각기 다랐기 때문이다.

조,위, 한 3국은 원래 진이 분열되어 생긴 나라들로 진의 지배영역을 계승하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었고, 바다를 등지고 있는 제, 연은 진과 근접하지 않기에 맞서 싸우려는 의식이 낮았다.

이런 이유로 대륙정복을 명확하게 목표로 삼았던 나라는 주왕조의 방계 세력이었던 진과 초 두나라 뿐이었다.

ㅡ 실제로 '중국은 하나의 대륙국가'라는 말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다.

원나라, 청나라 등 이민족의 왕조도 있었고, 위진남북조와 같은 분열기도 있었다.

한민족(漢民族)의 통일국가가 지배했던 기간은 그 기나긴 역사 가운데 절반 이하에 불과하다.

ㅡ 732년 투르 푸아티에 전투 - 기독교와 이슬람의 최초 전쟁

카톨릭교회가 밀어주는 프랑크왕국과 이슬람 세력의 대결은 일신교를 바탕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일체제를 갖춘 대륙국가끼리의 대결이라 말할 수 있다.

이슬람 세력과의 빈번한 전쟁이 결과적으로 서유럽의 재편을 이루었기 때문에, 벨기에의 역사학자 피렌은 '무하마드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군사기술의 면에서도 서유럽 국가들은 이슬람 군대가 사육, 운용하고 있던 대형의 군용마나 기병이 등자를 부착하는 방법을 도입해 이를 발전시켰다.

 십자군은 농민에게 개척이민운동과도 같았다.

봉건제후와 기사로서는 점령지의 영주가 될 수 있는 기회였고, 지중해의 교역 상인에게도 십자군 이송은 큰 비지니스 기회였다.

ㅡ 쿠르드족 출신의 명장 살라흐앗 딘(살라딘)이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켜 아이유브 왕조를 건국하고 세력을 키워나간다.

ㅡ 십자군 전쟁의 후반은 순전히 이슬람 세력으로부터의 영토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었지만, 그 결과는 동서 기독교 세력의 분열로 이어졌다.

ㅡ 그런데 이슬람 측의 전쟁사에서는 '십자군'이라 불리는 일련의 전쟁은 국지적 충돌이 반복되었던 것에 불과하다.

또한 당시의 이슬람 측도 셀주크, 압바스, 파티마 왕조로 분열되어 있었으므로 후세에 알려진 것처럼 기독교 측 대동맹과 이슬람교 측 대동맹의 대결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당시 이슬람 세력 측에서는 종교공동체보다는 민족공동체가 우선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ㅡ 발슈타트 전투의 승리 후 수부타이 장군은 오고타이의 급사소식에 신속하게 동방으로 군사를 되돌렸다.

몽골군은 정보 입수에 뛰어나 수집한 정보와 명령을 전령과 깃발을 이용해 말단 병사에게까지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제2장. 기독교와 이슬람교

 

ㅡ 유대교라는 같은 종교에서 태어난 기독교와 이슬람교, 두 일신교끼리의 싸움은 당시 유럽세계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 가장 큰 테마이다.

중세까지 중동의 이슬람교문화권 국가들이 지중해부터 동아시아에 이르는 교육로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15세기말에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가는 향로를 통해 인도 등 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서쪽으로 우회하는 항로를 개척해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는데도 성공했다.

ㅡ 레판토 해전은 중세와 근세의 갈림길을 상징하는 해전이라고도 한다.

이 전쟁 이후 저차적으로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교 세력에 대해 우위에 서게 되지만, 대신 기독교 세력이 분열하기 시작하는 기점이 되기도 했다.

ㅡ 16세기 세계 패권은 스페인의 손안에 있었다. 왜 무적함대 스페인만이 전 세계로 세력 범위를 넓힐 수 있었던 것일까?

스페인은 다른 유럽국가보다 한발 앞서, 서쪽으로 우회하는 원양항해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ㅡ 16세기 초, 영국은 농업생산력이 떨어진데다가 14~15세기 백년전쟁으로 프랑스에 있던 영지를 모두 잃은 상태였기에 해외로 진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국이 해외로 진출할때 가장 중시했던 것은 자국군대의 무력이 미치는 교역소 등의 거점 확보였다.

반면 스페인은 원래 대륙국가기에 영토확보 즉 식민지 정책이었다.

영국은 국방 전선을 자국의 해안선이 아니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적국의 연안까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ㅡ 영국식 사고방식을 따르면 전쟁은 다음 3단계를 밟는것이 기본전략이다.

1. 재해권의 확보

2. 대안에 있는 적 해양기지의 파괴

3. 내륙으로 상륙작전

스페인은 아르마다 해전에서 치명적인 패전을 당한 이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신대륙에서 착취한 막대한 부의 낭비, 거대한 영토와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거듬되는 전쟁으로 인한 경비 때문에 점점 피폐해졌다. 또한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던 식민지 네덜란드를 잃었다.

게다가 스페인의 지배력이 땅에 떨어졌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종교개혁으로 인한 30년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ㅡ 이미 30년전쟁은 구교대 신교의 전쟁이라기보다는 강해지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이에 두려움을 느낀 주변국 간의 전쟁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을 이루었으며,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프로이센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굳히게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세계 최초의 국제평화조약으로 간주되고 있다.

ㅡ 프로테스탄트의 교의는 부국강병과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에도 이용되었다.

전쟁과 그 결과도 신의 뜻대로 미리 정해져 있다는 해석(예정설)을 널리 전파했고, 기독교가 다른 인종을 정복하는 것도 신의 의지라고 주장했다.

ㅡ 영국-프로이센 연합과 프랑스를 중심으로한 7년 전쟁

북미대륙에서도 7년 전쟁처럼 식민지 이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가 대치한 프렌츠-인디언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양쪽 다 영국의 승리로 끄탔으나 승자로서도 큰 부담이 되었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영국은 북미 식민지의 주민들에게 인지세 등의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ㅡ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

1775년 영국과의 전면 전쟁에 돌입

워싱턴은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고 적과의 적투에 유리한 광대한 대륙 내 요충지를 활용해 거점방위를 철저히 하는 식으로 버텨나갔다.

전투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1776년 토머스 제퍼슨 등이 모여 미합중국의 독립선언을 선포했다.

ㅡ 1781년 요크타운 함락

1783년 영국과 합중국정부가 파리조약을 맺은 결과 드디어 미합중국의 독립이 인정

1787년 헌법 제정

1790년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

그러나 합중국의 각 주마다 믿는 종파도 다르고, 기간산업이나 생활습관도 달랐기 때문에 독립과 분권을 열망하는 각 주와 중앙연방정부의 대립이라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ㅡ 나폴레옹은 근대적 민법전을 편찬, 가톨릭교회와 화해하는 등 혁명체제와 전통체제를 조정하면서 지배체제를 확립. 중앙집권제와 정보망을 정비하고 중앙은행을 만들어 경제를안정시켰으며 국민이 교육을 골고루 받을 수 있도록 공공교육제도를 보급시켰다.

그리고 국민군 제도를 정비해서 평민 출신의 병사라도 승진하면 하급 장교가 될 수 있는 군제를 정착시켰다.

1804년 마침내 황제에 즉위해 나폴레옹 1세라 칭했다.

ㅡ 유럽대륙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 플이센의 군대를 잇달아 격파하고 아우스터리츠 삼제회전에서는 약 7만 5천명의 병력으로 20만명의 대 프랑스동맹군을 격파한다.

1806년 영국과의 교육을 중지하는 대륙봉쇄를 단행, 이는 오히려 유럽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영국과 교육을 재개한 러시아로 1812년 원정을 떠난다.


제3장. 선발 제국주의와 후발 제국주의

 

ㅡ 영토획득 만이 아니라 해외의 광대한 시장 획득이 크나큰 목적이었다.

19세기 발발한 크리멎ㄴ쟁 이후의 발칸반도에서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범슬라브주의의 팽창과 이에 맞선 독일-오스트리아 중심의 범게르만주의라는 민족공동체 간의 대립으로 발전했다.

시장확보를 위해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이 동시에 민족분쟁까지도 야기했던 것이다.

ㅡ 1841년 영국군은 홍콩 섬을 점령해서 청나라 주변 바다의 제해권을 확보한다.

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텐진조약이 체결된다.

ㅡ 크림전쟁이란 부동항의 획득을 숙원으로 삼았던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려는 서구 열강이 벌인 싸움이다.

일련의 전쟁들이 흑해의 크림반도가 주요 무대가 되었기 때문에 크림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 지중해에서 러시아의 세력확대는 곧 해양국가인 영국과의 충돌을 낳게 된다.

ㅡ 오스만제국은 마지막 남은 영토 아나톨리아로 터키공화국이 된다.

북이탈리아의 최강자로 서지중해에서 가장 큰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된다.

ㅡ 1854년 크림전쟁 - 세바스토폴 상륙작전

1856년 파리조약이 체결, 흑해의 중립화, 오스만 제국의 영토보전, 몰디비아와 왈라키아의 자치권 보장

나이팅게일의 활약으로 유명한 크림전쟁에서는 막대한 수의 전사자와 병사자가 발생했다.

막상 전투로 인한 사상보다는 전장에서의 영양결핍이나 전염병이 그 원인이 되었다.

ㅡ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결과, 산 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되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가 독립하고 발칸 반도에는 슬라브 민족주의가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오스만제국의 퇴조는 결정적이었다. 

발칸 반도에서 범슬라브주의 vs 범게르만주의, 그리고 키프로스섬을 획득한 영국의 권익 등 대립상황은 오래도록 풀리지 않았고, 발칸반도를 둘러싼 서구 열강의 이해관계가 결국 1차 세계대전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ㅡ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스페인 왕귀계승을 놓고 프로이센 왕국과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독일에는 처음으로 통일국가가 탄생하였다.

ㅡ 1862년 수상으로 취임한 비스마르크, "독일의 통일은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로써 이뤄진다. "라고 발언해 '철혈재상'으로 불렸다.

독일 내셔널리즘은 프랑스 나폴레옹에게 유린당했던 것에 대한 저항의식으로부터 생겨났다.

포리에신은 나폴레옹처럼 징병제에 의한 국민군의 군대와 중앙집권화를 발전시켰다.

ㅡ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대비해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에 라인 강변의 영토를 할양할 것처럼 암시해 프랑스의 중립을 얻어냈다.

그러나 전승 후에 이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ㅡ 1871년 파리가 포위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독일황제 즉위식을 거행한다.

ㅡ 범게르만주의를 내걸었던 독일은 발칸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대립해 결과적으로 프랑스와 러시아가 독일을 협공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독일 스스로도 보불전쟁에서 뜻밖에 대승한 기억떄문에 훗날의 1차대전도 단기간에 승리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측면이 있다.

ㅡ 1850년대 북부와 남부는 서부의 새로운 주, 특히 켄자스와 네브래스카의 노예제 도입을 둘러싸고 대립이 격화되엇다. 북부는 1860년 노예제 폐지를 부르짓는 공화당의 링컨이 미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이듬해 남부의 주들은 합중국으로부터 이탈했다.

남부연합을 결성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링컨은 이에 맞서 대의를 제시하기 위해 1863년 노예해방선언을 함으로써 전쟁의 목적을 명확히 한다.

또한 서부 개척민의 토지 소유를 보장하는 홈스테드법을 발표해 서부 주민을 자기 진영에 끌어들였다.

ㅡ 남북전쟁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전선의 적뿐만 아니라 후방의 산업과 생활까지도 철저히 파괴하는 총력전을 펼쳤다.

ㅡ 크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바다로의 출구를 찾아 이번에는 극동의 만주지역으로 남하한다.

러일전쟁의 배경에는 러시아의  해양진출을 막으려는 영국의 의도와 그와는 반대로 러시아의 눈을 극동으로 돌리려는 독일의 의도도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ㅡ 일본은 한반도에 친일정권을 수립하고 1894년 청나라를 상대로 청일 전쟁을 일으켜 승리한 결과 한반도와 요동반도, 타이완 등을 손에 넣는다.

당시 일본에서는 주전론을 주장하는 야마가타 아리모토파와 외교적인 타개책을 모색하는 이토 히로부미파의 입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ㅡ 포츠머스 조약 이후, 일본은 여순, 대련의 조차권, 한반도 지배권, 장춘 이남의 동청 철도와 사할린의 남반부를 획득하게 된다.

ㅡ 국제적인 영향력이 커진 일본과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인정하지만 이후 미일간에는 태평양을 둘러싼 패권 다툼이 부상한다.


제4장. 1, 2차 세계대전

 

ㅡ 미국은 표면상으로는 유럽의 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먼로주의 정책으로 중립을 지켰으나 그 이면에는 제해권을 쥔 영국과 협상국에 많은 물자를 제공하고 있었다.

ㅡ 영국은 전쟁협력에 대한 보상으로 아랍인의 독립을 보증하는 후사인-맥마흔 협정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인정하는 벨푸어 선언이라는 상충되는 외교를 펼치는 등 중동에 새로운 분쟁의 불씨를 심었다.

ㅡ 흔히 2차 대전은 민주주의 국가 VS 파시즘국가의 전쟁이라고들 한다.

더 깊이 따져보면 식민지를 가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간의 전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ㅡ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및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수데텐 지방 할양

1939년 폴란드 침공

1940년 4월 덴마크, 노르웨이 침공 후 5월에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거쳐 프랑스를 침공, 6월에 친독 비시정권 수립

1940년 9월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군사동맹이 체결되어 태평양 지역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식민지에 일본군이 진주

1941년 4월 독일,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점령, 6월 독소전쟁 시작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항복,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후퇴,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

1943년 7월 연합군 시칠리아 섬 상륙, 10월 이탈리아는 연합국 측에 가세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12월 발지전투

ㅡ 1941년 4월 소일 중립조약 체결, 미국은 일본에 대륙으로부터의 철수를 요구하는 '헐노트(Hull Note)'전달 하지만 일본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음.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

1942년 6월 믿웨이 해전

1943년 2월 과달카날 전투

1944년 3월 임팔작전

1945년 4월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7월 포츠담 선언 제시, 8월 원자폭탄 투하

ㅡ 도조히데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전진훈'을 펴냈으나 패전 후 권총자살 실패

ㅡ 구미 열강들의 지배를 벗어난 아시아 국가들은 독립운동을 벌여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중국의 공산화와 미소 냉전의 진행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점령방침은 크게 변화해 1952년 이후에는 일본의 재군비(경찰예비대의 발족)가 추진된다.


제5장. 동서분쟁과 민족분쟁

 

ㅡ 민족분쟁, 국지전쟁이 냉전의 대리전으로서 반복해 일어났다.

ㅡ 한국전쟁때와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의 지도자들이 중국과 소련의 개입을 염려해 군의 지휘에 정치적으로 간섭했기 때문에 '제한전쟁'을 초래했던 정치적인 전쟁지휘는 군사전문가들로부터 "외상환자를 내과에서 치료하고 있다"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ㅡ 이란 혁명은 미소 양 대국을 모두 적으로 돌렸다.

이란의 이웃 이라크는 인구 약 60%가 시아파로 이란혁명을 경계했고, 샤트알아랍 강을 두고 양국은 분쟁을 겪고 있었다.

본래 이란은 국민의 대부분이 페르시아인이지만 이라크는 아랍인 국가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민족간 충돌이 반복되고 있었다.

중동 국가들은 같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종교공동체보다도 민족공동체로서의 결속력이 더 강하다.

ㅡ 2008년 코소보의 독립이 EU와 미국에 의해 승인되었지만 이번에는 코소보 내의 소수 세르비아인 문제가 부상하면서 현재도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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