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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78. 가짜전쟁>

by leeesssong 2020. 8. 5.

 ㅇ서론

ㅡ 군 지휘관들이 전투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양동 작전과 부대 이동을 꾀하는 동안, 본국에 있던 정치 지도자들은 승리의 밑거름이 될 전략적 주도권을 쥐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공무원과 정보요원을 비롯한 모든 분야의 정부 관리들은 전황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배후 조종을 하거나 음모를 꾸몄다.

ㅡ 전쟁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철저하게 수립한 계획도 대부분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전방에서 싸우는 군인들이 후방에서 펜대만 굴리는 군 지도부나 정치 지도자를 심하게 경멸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시대의, 모든 전쟁에서 나타났다. 권력층의 무능함은 이론과 실제, 계획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여설히 보여준다.

SNAFU(Situation Nomal All Fucked Up, 늘 그렇듯 상황이 엉망이다.)라는 말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용어였지만 지금은 어디에서나 사용하는 상투적인 용어가 되었다.

ㅡ 확실하고 기발하게 수립된 작전일수록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리기 쉽다.

무대 뒤의 브레인스토밍에서는 '엄청나게 매력적이지만 극히 비현실적인 전략'이 나올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이 성공하는 사례도 있고, 매우 합리적인 계획도 전술 지원이나 군수지원 부족으로 중단되기도 한다.

부대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지 않거나 수송수딘이나 지원포병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성공할 수 있는 작전이 오히려 실패하기도 한다.


ㅇ 본론

제1장. 1939~41년

ㅡ 사실 스위스의 중립은 평화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스위스는 병력을 알프스 산맥 위에 강력하게 요새화된 은신처에 숨겨두었다.

ㅡ 독일군은 상륙 전용 함정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에 '바다사자 작전(독일의 영국 침공계획)'은 제한되었다.

더욱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부대를 안전하게 상륙시키려면 정확한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만 물자를 손상없이 내릴 수 있었다.

격렬한 포화 아래 또는 거친 파도가 치는 상황에서 이러한 정밀기동은 불가능했다.

설사 침공이 성공하더라도 독일군이 무방비 상태로 고립되지 않으려면 즉시 보급과 통신이 보장되어야 한다.

ㅡ '리신 비 또는 독침 비' 영국은 독침개발에는 성공했지만,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비경제적'이라고 판단되어 계획은 보류되었다.


제2장. 1942년

ㅡ 호주의 크기만 문제가 아니라, 일본군 지휘부는 태평양에서 전체적인 작전 범위가 너무 넓게 확대되어 한계쩜에 이를 것이 확실하다고 보았다. 일본의 호주 침공계획이 완전히 폐기되지 않았지만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로 애초의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크게 떨어졌다.


제3장. 1943년

ㅡ 미국과 영국은 직접공격(프랑스 침공)과 간접공격(북아프리카와 남부유럽을 경유) 사이에서 격론을 벌였다.

서방 연합군이 태평양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장악했지만, 갈 길이 멀고 험난했다.

ㅡ "당시 영국이 이미 합의한 영불해협을 건너 북서 유럽을 대규모로 침공하는 방안을 매우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꺼려한다는 점을 미국은 중요하게 여겼다" - 아이젠하워

ㅡ 1914~5년 해군장관이던 처칠은 비참하게 끝나버린 갈리폴리 전투의 총책임자로 갈리폴리에서의 헛된 대량살상으로 끝이나면서 간접 공격방식의 이점은 매우 불분명했고, 처칠의 '군사적 천재성'도 마찬가지였다.

처칠의 제안에 확신이 없던 미국은 직접 공격을 선호했다.

미군의 목표는 베를린 또는 프랑스 동북부의 뷔스트였고, 오버로드 작전 당시, 작전 실행 직전까지 영국군은 계속 동참하기를 꺼렸다.

ㅡ 일본은 급강하 폭격 기술을 힘들게 숙달했지만 출격한 후 귀환하는 일반적인 임무가 알게 모르게 카미가제 자살 공격으로 변질되어 갔다. 일본군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었는지를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ㅡ 독일군의 작전 성공도 독일군 암호분석관의 능력에 큰 빚을 졌다.

미 해군 통신감청을 통해 유레카라는 암호명의 테헤란 연합국 지도자 회담계획까지 알아냈다.


제4장. 1944년

ㅡ 처칠의 말을 빌리자면 44년은 '끝의 시작"이었다.

1943년 9월에 이탈리아 항복, 독일과 일본도 크게 수세에 몰린 상태였다.

ㅡ 폰 브라운이 개발한 V1은 1944년 6월 13일 런던에 투하되었다.

서유럽에서 전세가 연합군에 막 유리해진 시기에 확실한 방어대책이 없는 신무기의 공격을 받은 영국은 당황했다.

ㅡ 독일의 10년 해군력 확장 프로그램 Z계획, 그러나 독일에는 조선소가 충분하지 않았고 해군을 이해하거나 해군에 대해 공겸하지 못한 히틀러가 보기에 전함은 다 같은 전함일뿐 우선순위에서도 괴링의 독일 공군에게 일관되게 밀렸다.

유보트의 활약으로 Z계획을 파기 결정한 히틀러는 건조정이던 함정을 해체하고 유보트 함대구축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제5장. 1945년

ㅡ 히틀러가 나치의 '괴테르다메룽(신들의 황혼, 니벨룽겐의 반지의 마지막 장 제목)' 준비를 마무리하는 동안, 그때까지 세계대전을 어느정도 잘 치렀다고 본 처칠은 지체없이 소련과의 또 다른 전쟁을 대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ㅡ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서방 지도자들은 이미 전쟁 뒤를 내다보았고, 다가올 갈등을 냉정하게 검토했다.

서방연합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전에 이미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점점 더 불안한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 주둔한 붉은 군대의 규모는 서부전선에 있던 영국과 미국보다 3배나 많았고 소련군은 자신들이 장악한 지역에 눌러앉을 것 같은 인상을 뚜렷하게 남겼다.

ㅡ 독소전쟁으로 수백만명이 훨씬 넘는 소련 시민이 독일군의 반공산주의 성전뿐만 아니라 반슬라브족 인종 전쟁에 희생당했다.

대다수의 독일인의 미래에는 강간, 살육, 복종, 학대, 굴욕의 시간이 앞에 놓여있었다.

나치 지도층도 마찬가지였다.

공개적인 굴욕, 고문, 감금, 죽음 또는 시베리아 강제노동의 치욕에 놓일 것이 뻔했다.

항복해서 얻을 것이 없고 끝까지 싸워도 잃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죽을때까지 저항하기로 한 무모한 결정이 오히려 합리적이었다.

ㅡ 일본군의 저항력을 아무리 약화시키더라도 전쟁을 어떻게든 끝내려면 어느 일정 시점에 본토를 침공해야만 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다운폴 작전)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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