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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72. 이런 전쟁>

by leeesssong 2020. 7. 16.

한줄평 - 괜히 매티스가 추천하는 책이 아니네~ 이러언 즈언쟁


ㅇ서론 

ㅡ 미 육군의 모토 2가지

"우리가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은 훈련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같은 부대는 더 이상 없다."

ㅡ 미 사회학자들과 군인들 모두 '기강 혹은 군기'를 자제력을 뜻하는데 동의한다.

과속하거나 무거워서 불편한 방탄모를 벗으면 제재를 가하는 합리적인 법을 어기지 않는 것,

전투 중 정말 필요해질때까지 수통의 물을 다 마시지 않는것, 그리고 특정 상황에서 받는 명령이

매우 불쾌하더라도 부모와 교사 그리고 장교에게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ㅡ 이 책은 무엇보다 장병 개인 증언들 중에서 골라 모은 것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라기보다는 전해들은 이야기라 할 수 있다.


ㅇ본론

<제 1부 개전(Begnning)>

ㅡ 6월 22일 북괴 각 사단이 작전명령을 한국어로 하달했다.

병사들에게는 기동연습이라고 설명했지만 장교들은 이것이 전쟁임을 알고 있었다.

ㅡ 인민군에서 주저하는 자는 깔끔하고, 효과적이고, 무엇보다도 영구적인 방법으로 치료를 받았다.

바로 뒤통수에 권총을 들이대는 것이다.

ㅡ 로버츠 대령은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군 병사들은 훌륭하나 장교단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병사란 장교가 만들어내는 수준까지밖에 좋아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은 언제나 조용히 평화롭게 살고 싶어했지만 그 희망은 부질없었다.

한국은 완충국가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근시안적이었다.

이들은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려 할 뿐 아니라 만주를 착취하려면 '육상의 국가' 조선을 반드시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ㅡ 일제강점기를 거쳐 조선인은 문맹률 문제를 넘어 교육 자체를 받지 못했다.

정치 성향과 관계없이 정부든 기업이든 행정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ㅡ 수많은 여자들이 육군 지원사령부 주위를 배회하며 기지의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ㅡ 미군정 장교들은 한국의 경제부흥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인의 2/3는 38도선 이남에 살며 농업에 종사했지만 거의 모든 산업과 천연자원은 북쪽에 있었다.

ㅡ 미 군정의 방침은 신한공사의 경영권을 한국인에게 이양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회사 재산을 자신들 주머니로 빼돌리는데 금방 능숙해졌다.

ㅡ 1947년 스윙크, 국무부-전쟁부-해군부 협조위원회는 다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미국의 엄청난 지원과 경제원조가 없었다면, 한국은 절대로 자립경제를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면 한국은 골칫거리가 될 것이고 한국에 주둔하는 병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우아하게 빠져나갈 방법만 있다면 한국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원했다.

ㅡ"미국은 한국에서 현재 유지중인 병력과 기지를 계속 유지해야할 전략적 이익이 크지않다."

 "갑작스럽게 우리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은 미군의 군사적위신을 낮출 것이며, 미국의 안보에 훠씬 중요한 다른지역에서의 협력관계에 불리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 미합동참모본부

ㅡ 소련의 정책은 이미 국지전, 국가전복, 테러, 주변부에 대한 군사작전으로 변해있었다.

미국의 정책은 유럽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지만, 아직 아시아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애치슨 국무장관의 연설에서 대한민국이나 대만 모두 미국의 극동지역 방위선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한데 관심이 집중되었다.

ㅡ "전쟁은 여흥이 아니며, 한낱 대담함이나 승리를 위한 열정도, 값싼 열의의 결과물도 아니다.

전쟁이란 진지한 결과로 이어지는 진지한 수단이다.

전쟁은 언제나 정치적인 조건에 따라 일어나며, 정치적 동기에 의해 발발한다."

클라우제비츠의 이 구절에 레닌은 밑줄을 그었다.

ㅡ 전쟁이 발발한 이후 한국군은 수백명이 죽고 나서야 생존자들은 전차를 맨손으로 상대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ㅡ 서구는 대체로 소련의 전면공격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제한적인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생각해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625 이후 미 정부는 소련이 유럽을 목표로 공격을 준비하면서 미국의 관심과 병력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단순한 연막으로서 한국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반도에 대규모 전력을 투입하기를 주저했다.

ㅡ 잘 훈련되고 제대로 된 지휘를 받는 병력만이 엄청난 압박을 받으면서도 질서 정연하게 철수할 수 있는 법이다.

ㅡ 유엔이 약소국들을 최소한으로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 유엔은 쓸모가 없으며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소련 대표는 중공을 유엔에 받아들이는 문제를 두고서 오늘날 '소련의 퇴장'으로 알려진 의사장 퇴장을 단행했을 뿐 아니라, 이후로 안전보장 이사장 회의도 계속 거부하고 있었기에 유엔의 개입이 가능했다.

ㅡ 세계에서 미국의 정치질서가 위협 받고 있었다.

ㅡ 공산권은 주도면밀했다. 옛날 왕들과 폭군들이 했던 제한전쟁과 패권정치라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제 2부. 전투(Battle)>

ㅡ 사격을 한 것은 분대장과 소대장뿐이었고, 병사들 중 절반 이상은 총알을 한발도 쏘지 않았다.

이에 역겨움을 느낀 콜린스 중사는 왜 발포하지 않았냐 다그치자 10여명이 소총이 작동하지 않았다고 대답했고 확인해보니 진흙이 끼어있거나 손질 후 잘못 조립되어 있었다.

ㅡ 부사관이나 초급장교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병사들은 이들이 내리는 명령을 자주 무시했다.

특히 명령이 불편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더욱 그랬다.

ㅡ 그 어떤 장교도 편제와 달리 적은 병력을 가지고서 새롭고 획기적으로 작전하는 방법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ㅡ 적 대부분은 흰옷을 걸쳐 농부로 위장했다.

 딘 소장이 사면초가인 대전에 남은데는 3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첫째, 지휘관이 병사들과 어꺠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34보병연대와 여타 방어부대의 무너지는 사기를 북돋을 생각이었다.

둘째, 미군과 함께 싸우는 한국군 장교와 참모들에게 모범을 보일 생각이었다.

(이때 이미 한국군 장교들은 부산행 급행열차에 올라타있었다.)

셋째, 딘 스스로 북한군의 전투 능력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생각이었다.

ㅡ 인민군의 대전공격은 다른 공격과 유사했다. 방어부의 지휘부를 계속해서 찾아내어 공격함으로써 그들이 후티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측방을 때리거나 후방으로 침투해 퇴로를 차단했다.

어떤 지휘관도 후방에서 무슨일이 벌어지는지를 알 수 없었다.

 ㅡ 미 24사단은 사단 병력의 30%이상을 잃었고 특히 고급장교의 손실률은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미 24사단이 투입되지 않았더라면 미군은 절대로 한국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ㅡ 병사는 기강과 훈련으로 싸우며, 국민은 동기와 이상으로 싸운다.

ㅡ "국방부는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진정용 시럽수준의 응원과 달콤한말, 그리고 밝은 면을 너무 자주 전하고 있다."

ㅡ 미군이 투입된 뒤 미국 신문들은 한국군의 공적이나 상황에 다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한국군의 기여를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일부 한국군 부대들은 수많은 장병이 전사하는 와중에도 인민군 연대들과 심지어 사단들까지도 격파했다.

이는 나중에 인민군 기록이 입수되기 전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ㅡ 공산주의는 사실 프로파간다를 빼면 소농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소농들의 선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었다.

대화는커녕 소농을 이해하지 못한 미국인들은 소농이 다수인 세계에서 더욱 외로워졌다.

구체제 인사들을 처형하고, 상인과 지주를 무너뜨리는 동안 농부들이 보유한 나무에서 딴 복숭아 하나하나까지 병사들이 정중하게 현찰을 지불하게 만든 북한 당국이 이제 한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ㅡ  성전이나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 아닌 전쟁에서는 자기자신과 임무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전쟁의 거친 충격을 흡수하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게 하는 충분한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잘 싸우게 마련이다.

해병은 동료가 쓰러지도록 그냥 놔두지 않았다. 해병에게는 군기가 있었다.

군기의 본질은 명령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현명하게 명령을 완수하는 것이다.

ㅡ 발견된 미군 시신들 중에서는 처형당하기전 불에 탄 후 거세를 당한 경우도 있었고, 혀가 뽑혀잇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는 가시철조망으로 머리와 입까지 묶여있었다.

ㅡ 북한군은 정면에 견제공격을 실시하는 동안 측방을 우회하거나 후방으로 침투하는 기동을 했다.

확실한 전선을 구축할 수 없었던 한국군과 미군에게 이 전술은 파괴적이었다.

ㅡ 미군 전투복을 입은 한국인들이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걸더니 갑자기 수류탄을 던지기도 하였다.

ㅡ 워커의 등 뒤에서 부유하고 명망있는 한국인들은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ㅡ 한국군과 미군의 언어장벽은 그대로였고, 문화차이를 좁힐 수 없었다.

동맹군 병사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미군 병력은 이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보니 한국군 병사들의 행동과 활약은 기껏해야 일시적이었다.

ㅡ 역사와 교리에 따라서 미 육군은 여러층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대성당을 지키기보다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ㅡ 아시아 공산주의 군대들이 갖는 지속적인 약점이 무엇인지 드러냈다.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지만 돌파지역에서 전과를 확대하는데 실패했다.

인민군은 통신이 좋지 못한데다가 보급체계는 그보다도 더 나빴다.

유엔군은 돌파구가 만들어지면 퇴각해서 인민군이 장점을 살리는 것보다 빠르게 역습할 수 있었다.

ㅡ 군인이 되어 전장에서 처음으로 시체를 보고 시체 냄새를 맡은 병사는 군인의 임무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곧 잊게 된다.

전투가 어떤것인지, 전투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배운다.

그렇게 군인이 되거나 죽어갈 뿐이다.

 2차대전에서 전투중 독일의 전술수행은 미군보다 전반적으로 뛰어났다.

부대단위로 독일장교와 부사관들은 전투에서 특별히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전쟁을 치르는 내내 미국의 전략 기획은 최고를 유지했다.

ㅡ 인민군과 공산 관료집단은 서울을 포기하기 전 한국의 경찰, 정부관료, 군인 가족들 중 힘없는 노인, 여성, 그리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끔찍한 보복을 했다.

수천명이 총살되거나 처형당했다.

ㅡ 인민군은 거의 모든 사단들이 심각하게 굶주렸다.

광적인 인민군 장교들과 부사관들이 자신들을 사살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국에서 강제 징집된 인민군 병사들은 항복하지 않고 버틸 뿐이다.

ㅡ 2차대전이 끝나고 모든 장교들은 기본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강하고 실전적인 훈련은 인기가 없으며 그로 인해 가끔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훈련간 사고가 발생하면 그들의 상관은 부하 장교들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ㅡ 한국인은 변덕스럽다. 어느 순간 기쁨이 극에 달했다가도 빠르게 절망으로 떨어진다.

한국인은 언제라도 순교자가 될 수 있지만 다음날 배신자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인은 동양의 아일랜드 인이라고 불려왔다.

ㅡ 사실 공산주의 진영이 법을 위반한 적은 없다.

인류가 비극을 계속 겪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국제법이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 유엔군에 재앙을 불러온 것은 북한의 지형과 정보의 완전한 실패였다.

북으로 진격하면서 유엔군은 온 세상에 유엔군의 구성, 작전계획, 심지어 작전계획 시행 시간까지 떠벌렸다.

ㅡ 중공군 장군들 중 대다수는 황푸군관학교 또는 소련군사학교를 졸업했다.

ㅡ 중공군에게는 3가지 이점이 있었다.

첫째, 그들은 중국땅에서 전쟁을 하며 정신이 단련되었기 때문에 전선에 구애받지 않고 유연하게 기동할줄 알았다.

둘째, 소농으로 이뤄진 병력은 배짱이 두둑하고 튼튼한 다리를 가졌다. 아주 적게 먹고도 장거리 행군이 가능했다.

셋째, 미군은 중공군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ㅡ 오직 소수의 정찰부대만이 낮에 앞으로 나아가 야간 행군지를 정찰하고 다음날 숙영할 곳을 물색하느라 움직였다.

항공기 소리가 들리면 모두 길에서 꼼짝하지 않은채 항공기 소리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숙영지에서는 누구도 어떤 이유에서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군기는 엄정하고 완벽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지시를 어기면 누구라도 총살당했다.

ㅡ 중공군은 병사들에게 의도적으로 잘못된 전투서열을 교육했기 때문에 포로로 잡힌 병사들은 이상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ㅡ 중공군은 미 육군의 장점을 알았고, 장교들은 미군의 강점을 '인민지원군'에 배포된 안내 책자를 읽고 있었다.

"박격포와 전차의 협동작전은 중요한 요소이다. 미군의 화기는 강력하다. 미군의 포병은 매우 적극적이다. 우리의 수송을 공중에서 기총소사하고 폭격하는 항공기는 매우 큰 위협이다. 미군의 수송시스템은 훌륭하다. 미군의 보병사격율과 장거리 사격율은 대단하다"

"미군은 후방이 차단되자 중화기를 모두 포기했다. 미군 보병은 약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공격하거나 방어할 용기가 없다. 언제나 항공기, 전차, 포병에 의존한다. 낮에 치르는 전투에 특화되어 있고 야간전투나 백병전에는 익숙하지 않다. 미군은 후방이 차단될까 걱정하고 수송대가 멈추면 보병은 싸울 의지를 잃는다."

ㅡ 중공군은 하치-시키라고 부르는 V자 대형을 사용했다.

ㅡ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겁지만 탄창과 수통을 가득 채우고, 자기보다 훨씬 현명한 이들이 지급한 모든 장비를 휴대하는 것이 군기라는 것을 다시 배워야 했다.

ㅡ 터키장교들은 총검을 꽂고 중공군에게 돌격했다. 터키여단은 대규모 병력을 잃자 터키 내 여론이 악화될 것을 걱정하였으나 무엇보다 터키는 자국 군인들이 싸웠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ㅡ 중공군은 얼마 안되는 장애물로 주 보급로를 막은것이 아니라 5km 좌우 능선을 따라 진을 치고 있으며 그것도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ㅡ 미군의 전투기술과 용기가 어떻든 간에 미 육군은 여전히 군기와 훈련이 부족하다는 것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태도는 하루아침에 없앨 수 없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수개월 지나서야 비로소 신병훈련소의 신병들은 훈련기간의 1/2는 야전 적응훈련을, 1/3은 야간훈련을 받았다.

ㅡ 포를 잃자 포병의 명예가 손상되었다며 우는 포병도 있었다.

함께 철수한 이들은 포병들이 끝까지 명예롭게 싸웠다고 여전히 굳게 믿는다.

ㅡ 구호소와 야전병원이 유엔군 부상자 수천명으로 가득찼다.

영국군과 미군들의 외과의사들은 탈진할때까지 환자를 돌봤다.

ㅡ 누구든 군복을 입으면 병과에 상관없이 고통을 겪고 필요하다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ㅡ 많은 해병들은 이보다 더 혹독한 추위에 익숙했지만, 불과 피난처 또는 따뜻한 음식이 전혀 없이 싸우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수통의 물과 캔 속의 전투식량은 얼어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혈장도 얼었다.

의료 보급품은 언제든 난로 옆에서 2.5m 이상 떼어놓아서는 안되었다.

차량은 시동을 끄면 다시 시동을 걸기가 어려웠다. 야포도 얼어서 굳어버렷기 때문에 윤활유를 모두 닦아내었다.

자동화기가 작동은 했지만 한번에 한발씩 쏠수밖에 없었다.

ㅡ 해병은 장진호에서 다음 3가지 이유 덕분에 뚫고 나올수 있었다.

첫째, 미 7해병연대 F중대는 6일동안 2개 연대를 물리쳐 포위망이 완성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둘째, 함흥 근처에 있던 1해병항공단, 항공모함과 함재기 조종사들, 그리고 공군보급기들이 철수 대열 위로 끊임없이 날아다녔다. 해병항공단 조종사들은 위험한 산악에서의 야간 임무비행을 자원했다.

셋째,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넌 뒤로 14일 동안 산악을 넘도록 부하들을 몰아친뒤 보급품과 포병 대부분을 뒤에 남겨둬야 했다.

ㅡ 미군은 중공과 전면전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햇다.

애치슨은 만일 미군이 만주로 진격하고 성공적인 작전의 일환으로 군사 기지들과 비행장들을 폭격하면 '소련은 신나서 만주로 들어올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소련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봉쇄하는데 있었다.

ㅡ 참전한 중공군의 수가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의 산악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극도로 위험했다.

보급 사정도 좋지 못했다. 수송망은 대규모 전쟁의 수요를 뒷받침할 수 없었다. 맥아더는 퇴각을 원했다.

만일 소련이 전적으로 개입하면 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소련 잠수함과 항공차단 때문에 생명선이 끊어질 수도 있었다.

ㅡ 군사적 실패시 지휘관들은 의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중적으로 성공하려면 장군에게도 상당한 화려함이 필요하다는 것은 역사가 예전부터 증명해오고 있다.

화려함은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능력과 결합하면 역사는 수많은 인간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위대한 지도자의 흔적을 기록하게 된다.

ㅡ 중공군은 방어선을 깨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기계화되어 있지 않고, 공군력이 없으며, 신속한 통신 능력이 부족한 군대는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 불가능햇다.

ㅡ 맥아더의 사고와 정신을 형성한 것은 38세에 1차 대전을 치르면서 참호에서 겪은 공포였다.

맥아더는 전쟁의 이면에 있는 이상주의에 대한 절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전쟁이 가져오는 근본적인 공포를 간직했다.

ㅡ 맥아더는 일본 방어를 위해 추가로 4개 사단을 요구했다.

유럽에서는 나토가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군 병력을 유럽에서 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맥아더는 미국은 전쟁에서 이기려 노력해야 하고, 이겨도 크게 이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유지했다.

ㅡ 미국이 중공과 일방적으로 전쟁을 시작한다면 여러 해 동안 미국이 정책 목표로서 추구해 이제 갓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나토를 치명적으로 깨뜨릴 가능성이 높았다.

트루먼의 정책은 집단안보와 주저하는 유엔뿐만 아니라 유약한 서구에 대한 의존에 좌우되었다.

ㅡ 정치가 가능성의 예술이라면, 전쟁은 불가능의 예술이다.

ㅡ 전쟁에 대한 2가지 견해

윌슨, 루즈벨트, 마셜 그리고 맥아더의 전통적인 미국의 견해 vs 애치슨, 해리맨 그리고 브래들리의 강대국 미국이라는 새로운 견해와 충돌했다.

ㅡ 저차가 연료없이 굴러갈 수 없듯이, 전쟁은 미래에 대한 정치적 고려 없이 성공적으로 치를 수 없다.

ㅡ 집단안보라는 말은 듣기는 좋으나 여전히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가장 멀리에서 최전방 전선을 지키는 것은 미국 혼자뿐이라는 것은 여전했다.

다른 나라는 그럴 뜻도, 힘도 없었다.

중공은 선전포고없이 침공했지만 그 대가를 치르지 않게 되었다.

ㅡ 자유를 제한하는 육군은 사회로부터 계속해서 소외되었다.

근본적인 임무의 속성을 고려할때 군대는 힘들고 자유를 제한하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유지해야 한다.

사회의 목적은 사는 것이지만 군대의 목적은 필요하다면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ㅡ 히틀러 시대의 독일 장군들 또는 미국의 육사, ROTC, 육군지휘참모대학 졸업생들이 같은 책들을 읽기 때문에 때로는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늘 의심한다.

ㅡ 1861년과 1917년 미국 대중은 장군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으며, 대신에 용맹한 민병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갑자기 사회가 장군들을 끌어안았다.

ㅡ 그리스 문화가 고도로 세련되고 평범한 그리스 남자들이 더이상 죽기까지 싸우지 않고 기만적이며 교묘해지자, 로마의 농군 출신 군대들이 그리스를 무너뜨렸다.

ㅡ 지난 200년 동안 미국인 신체의 화학반응이 변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구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몸집이 커졌고, 그에 따라 필요한 식사량이 더 늘어났다.

미국 정부는 젊은이들에게 전투준비를 시키지 않았듯이 포로가 되었을 경우에 대한 준비도 전혀 시키지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후 6개월 동안 미군은 피 흘리는 전투에 대한 물질적 심리적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전장에서 흔들렸다.

그리고 미군 포로의 대부분은 그 6개월 동안 발생했다.

ㅡ 포로수용소에는 장교를 부사관과 격리시키고 부사관을 병사로부터 떼어놓는 것이 관행이다.

그러나 중공군은 새로운 변칙을 시도했다.

계급구분없이 함께 모아놓았는데 이는 포로들 사이에서 도의가 사라지게 되었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군기까지 사라졌다.

살아남을 것이라는 미군 포로들의 희망도 함께 사라졌다.

ㅡ 공포와 불행에 노출되자 총을 든 군인은 집으로 돌아가려는 희망을 차단하고, 살아야할 물리적인 모든 이유를 없애버렸다.

포로들은 적응하지 못햇고 더 이상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ㅡ 미국 은 실질적인 포로 교리도 발전시키지 않았고, 훈련된 인원도 없었다.

미 육군은 아시아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ㅡ "군인에게 공격무기 사용법을 가르치려면 모든 종류의 방어 무기를 먼저 공급해야 한다.

군인은 제대로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더 용기있고 자신있게 싸우기 때문이다." - 베제티우스

ㅡ 미군은 언제나 육체노동을 경시한다.


<제3부. 실책(Blundering)>

ㅡ 공산주의자들은 힘으로 이길 수 없으면 협상을 준비한다.

ㅡ 대한민국이 제시하는 평화의 조건

-중공군은 압록강 북쪽으로 철수해야 한다

-모든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

-소련과 중공은 북한에 무기 지원을 멈춰야 하며 유엔이 이를 보장해야한다.

-대한민국은 모든 결정에 참여한다.

-대한민국의 주권과 영토의 보전을 침해하는 어떠한 합의에도 반대한다.

ㅡ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입장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계속해서 애국자이거나 휴전을 막는 훼방꾼이 되었다.

노련한 영웅의 모습이 옅어지면서 서방의 결정에 반하는 완고하고 독선적인 노회한 폭군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도 대한민국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유엔의 회원국이 아니며 미국이 제공하는 무기, 연료, 탄약, 그리고 경제적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한민국은 물리적으로 미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방법이 전혀 없었다.

ㅡ 유엔군사령부는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어떤것도, 심지어 휴전장소 조차도 제안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ㅡ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즉각 평화가 올 것이라는 기대에 빠진 유엔군이 공세를 멈춘 30일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운명적인 시간을 벌었다.

ㅡ 유엔군은 평화를 원했다.

공산주의 세계는 비록 매일같이 방해하기는 했지만 대화할 의사가 있었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한 언젠가는 평화가 오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ㅡ 미국인들은 아시아인들이 갖는 중국과의 연대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중공은 당장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하지만 대부분의 아시아인이 공유하는 이런 감정을 극대화하기를 원했다.

중공은 아시아에서 어마어마한 위신을 얻기 마련이었다.

ㅡ 전장에서 적과 마주한 군대는 위험을 각오할 때만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아무리 강력하게 지휘하더라도 훈련, 육체적 적응, 그리고 사기는 즉각적이고 점진적으로 질이 떨어진다.

"총검으로 할수 없는 것은 총검위에 올라 앉는것"이라는 탈레랑의 말은 변치않는 진실이다.

ㅡ "계속 싸우되 그렇다고 너무 열심히 싸우지는 말라, 지지 말되 이기지도 말라!

외교관들이 그럭저럭 해나갈 동안 전선을 유지하라" 새로운 명령은 이런식이었다.

ㅡ 전선에 배치된 군인들 사이에서 부대 교대정책이 시행되고 일본으로 5일간 휴식과 회복을 하였다.

그러나 휴식과 회복은 곧 성행위와 중독으로 타락되었다.

ㅡ 정전회담이 시작된 이후로 한국에 있는 모든 미군의 관심은 집에 돌아가는데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교대가 이루어졌으나 한국에 오는 미군 중 다수가 예비군, 주방위군, 신병들이었다.

그러나 공산군에는 교대가 없었다.

ㅡ 카투사는 미국이 조용히 포기한 계획이었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문화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미군과 한국군을 짝지어 배치하는 2인 1조 전우조 제도에 이용하거나 조수로는 쓸수가 없었다.

ㅡ 한국군에서 진급은 정치적일때가 많았다. 이는 민주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흔한 일이었다.

미개한 사회의 정치인들은 믿을수없는 장군을 원치 않았다.

정치인들은 유능하지만 자신들에게 반대할 수 있는 가문이나 일당에 속할 수도 있는 장군이 아니라 믿을 만한 장군을 선호했다.

아시아의 비공산권 국가들 대부분에서 군대는 온정적이었다.

한국 육군의 규율과 처벌 규정은 대부분 일본제국 육군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가혹했으나, 그것은 주한미국 군사고문단 장교들을 끝없이 골치 아프게 만든 또 다른 형태의 온정주의였다.

ㅡ 한국은 훈련된 군인을 키워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포병도 약했다.

전차는 전혀 없었고, 공군도 거의 없었다.

ㅡ 군인의 본질은 긍지이다.

자신에 대한, 부대에 대한, 그리고 자신과 함께 잇는 사람들에 대한 긍지가 본질이다.

공수부대원들은 긍지 그리고 자신과 전우를 믿겠다는 마음 없이는 기꺼이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군인을 움직이게 만드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긍지는 바로 "내 동료가 앞으로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라는 물음이다.

이것은 양식의 명령을 넘어 군인에게 계속해 뛰고, 살아남고, 전쟁에서 될대로 되라고 배짱을 부리게끔 끈질기게 요구한다.

ㅡ 미국사회는 흑인에게 긍지를 키울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흑인에게 태어날때부터 열등감을 주는 경향이 있다.

군에 복무하는 동안 오직 흑인들끼리만 있을때는 집단의 긍지가 아닌 집단 신경증이 발전한다.

사회학자들은 분대에 흑인을 1명 또는 최대 2명까지 넣으라고 권고했다.

ㅡ 유엔이 원한 것은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정전이었다.

격돌하는 고지는 선전의 대상이 되었고 군사적인 가치와 상관없이 정치적인 가치를 갖게 되었다.

ㅡ 1951년 11월 17일 유엔군사령부는 휴전협정을 30일안에 조인한다는 조건으로 공산군이 내놓은 휴전선 제안을 받아들였고, 공산군은 열광적으로 동의했다.

공산군은 1개월 전에 하기로했던 휴전협정에 서명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선전전의 효과를 누리기 위해 실제로 휴전을 지연하겠다는 공산군의 의도는 이내 곧 분명히 드러났다.

한국에서 유엔군은 일종의 휴전을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평화가 온것은 아니었다.

ㅡ "진정으로 문명을 평가하는 것은 인구수를 세는것도, 도시의 크기도, 수확물도 아니다.

그것은 그 나라가 어떠한 사람을 내놓는가에 달려있다" - 에머슨

ㅡ 화학적인 특성과 문화가 미군 포로들을 죽인 것이다.

미군 포로가 많이 죽은 것은 미군의 군기, 태도, 그리고 조직 때문이었다.

목적의식이나 단결력이 거의 없던 다른 징집병들은 잘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제일 잘 버틴 것은 터키인들이었다.

ㅡ 바보들은 우르르 몰려다니지만, 성공은 지혜롭게 때를 기다리는 자에게 오기 마련이다.

맥아더가 거둔 승리를 대체할 방법을 찾던 미국은 때를 기다려야했다.

ㅡ 피의능선과 단장의 능선 전투로 미 2사단은 기본적인 무기사용법과 소부대 전술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ㅡ 초급장교들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서 스스로 실수하는 것을 배워야 했지만 이것은 초급장교들의 부모를 몹시 고통스럽게 했다. 생각만 해도 고통스럽지만 장교는 전투에서 배워야만 한다. 이것말고는 전투에서 부하를 지휘하는 경험을 쌓는 다른 방법이 없다.

ㅡ 상급자를 당황하게 만들때 미국인들이 쓰는 관용구는 "판단력 부족"이다.

ㅡ 공산주의자들은 유엔군이 세균전을 벌였다고 비난하는 선전전을 벌였다.

북한 전역에서 티푸스가 창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전쟁으로 황폐화되고, 미 공군이 끊임없이 북한을 폭격해 기반 시설을 파괴한데다가 특히 위생의료시설이 부족한 북한으로 위생적이지 않은 중공군이 대량으로 넘어왔기 때문이지 미국이 의도적으로 박테리아를 살포했기 때문이 아니다.

ㅡ 한국인들은 전쟁의 실제 피해자일수 밖에 없었던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전쟁의 진정한 승자였다.

한국전쟁으로 미화 수십억 달러가 일본 경제가 쏟아져 들어갔다. 일본 전체를 거대한 홍등가로 바꿔놓았다고 일본인들을 비난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 경제를 달아오르게 만든 돈과 번영은 미국이 무기를 구매하면서 온 것이었다.

ㅡ 계약을 맺은 일본인들은 탄약, 공구, 장비를 포함해 거의 모든 것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극동사령부소속의 한국군과 미군이 먹을 식량 수백만 톤이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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