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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71. 근현대 전쟁사>

by leeesssong 2020. 6. 30.

한줄평 - 다양한 시각과 주제에서 바라본 근현대 전쟁사


ㅇ서론

 

인류만큼이나 폭력적 분쟁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현대 전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16~18세기의 '군사혁명' 2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째, 유럽이 동양으로부터의 침공과 정복에 취약해지는 상황을 영원히 종식시켰다.

둘째, 서유럽이 전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개시했다.

 

근대화되던 국가들과 전통적 국가들 간의 군사적 불균형이 증대되었고, 경제사회정치적 근대화의 복잡한 과정은 '국민의 무장(Nation in Arms)' 궁극적으로는 20세기 총력전(Total War) 현상을 유발했다.

전략과 전술에 관심을 가지던 전통적 군사사는 전쟁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로 진화되었다.


ㅇ본론

 

1. 현대 전쟁의 진화

 

1. 현대전쟁의 형성

군인들은 결코 기술발전을 선도화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무기를 환영하지 않는편이었다.

군사조직은 다른 사회집단보다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근대국가의 대두' 불리는 과정은 행정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의 혼합물이었다.

보병에 의해 봉건기사가 격파된 '군사혁명' 군대의 극적인 대규모화와 그들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행정적, 재정적 구조의 병행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전쟁에서의 모든 것은 단순하지만, 가장 단순한 것이 어렵다.

어려움은 누적되며, 전쟁을 경험하지 않고는 상상조차 없는 일종의 마찰을 일으킴으로써 종결된다"

- 클라우제비츠

 

현대의 참모업무는 결정적인 수적 무게가 효율적으로 가해질 있게 해주었다.

처음으로 동원 기획이 전략의 중요한 일부라 말할수 있었다.

 

퓰러가 언급한 총탄, , 철조망 '방어의 삼위일체(Defensive Trinity)' 기동에 대한 이전의 모든 생각을 마비시켜버렸다.

항공기와 탱크가 등장할떄까지 이러한 기술적 간극은 메워질수 없었다.

 

20세기 총력전은 정신이 아니라 규모 면에서 프랑스의 혁명전쟁과 달랐다.

변화된 것은 전체 인민을 동원하려는 국가의 의지가 아니라 렇게 있는 그들의 조직적 능력이었다.

 

정규군대가 아닌 군사적 민병대나 게릴라 무리에 의해 치러지는 이른바 '총력전 인민전쟁' 굉장한 잠재력이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 레바논과 아프칸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강도 전쟁은 저강도 분쟁에게 길을 내주었다.

고강도 전쟁은 고전적으로 클라우제비츠적인 요소들, 전력의 집중, 공세의 정점, 결전과 같은 것에 의존했다.

저강도 분쟁은 그 반대의 것들, 즉 유동적 진지, 분산, 인민의 '가슴과 마음'을 얻기 위한 장기간의 투쟁을 활용했다.


2. 군사혁명 I

통치자들의 왕조적 영토적 야심은 근대 유럽에서 전쟁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필요한 자원은 그들의 토지가 제공해주었다.

 

군사경제학이 전략을 지배했다.

'전쟁이 전쟁의 비용을 지불하게'하는 것이 장악한 영토의 경제자원을 점령군을 지원하는 용도로 전환시키는 '분담금 체계'내에서 제도화되었다.

 

기병(사회적 엘리트) 지배하는 전쟁으로부터 보병(대중) 지배하는 전쟁으로의 전이는 화약무기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화약은 요새와 포위전에 대한 과학을 변모시켰다.

성벽 앞뒤에 있는 흙으로 옹벽을 샇고, 포수들에게 노출되는 표적을 작게하기 위해 성벽 높이를 낮추고, 측면이 뒤로 꺾인 삼각능보(triangluar bastion) 변모시켰다.

 

17세기 후반 상비군이 폭넓게 채택되고 증가한 이유

첫째, 전쟁이 점점 장기화함에 따라 많은 병력이 오랜 기간 필요

둘째, 주요 전구전역에 걸쳐 포를 사용하는 요새가 확산됨에 따라 군대는 수비대와 포위군 모두를 마련해야함

셋째, 국가들이 통일되고 중앙집권화되며 지리적으로 동직화되어감에 따라 국방의 필요성도 훨씬 절박해졌다.

 

국가가 중앙집권화되고 통일되면서 통치자는 과세를 통해 국부의 많은 부분을 차출해낼 있었다.

이를 도왔던 행정적, 관료적인 방법은 16세기에 주로 스페인에서 시작되었으며, 육군부가 파리에 등장, 스웨덴은 1634 전쟁대학을 설립, 영국도 1683 육군성을 창설했다.

국가의 비대해진 군대는 무장과 장비를 필요로 했으며, 이는 섬유 야금산업을 촉진시켰다.

 

상비성(Permanence) 전문 직업주의(Professionalism) 낳았다.


3. 군사혁명 II

상당부분 지형과 기후라는 요소에 기반을 이와 같은 조직적 차이는 전쟁 방법상 차이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유목 반유목인들은 기동성을 활용하고 보통 기병에 의존했던 반면, 그들의 상대는 , 보병, 요새화를 강조했다.


4. 국민의 무장 I

1789년에 자유와 평등의 사상에 기초한 새로운 시민적 질서의 전망을 갖게 했던 혁명은 프랑스로 하여금 1792년에 20여년간의 해외 전쟁에 착수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혁명은 전제정치가 어떻게 파괴될 있는지 보여주었다."

"전쟁에 임한 것은 프랑스 인민 전체였으며, 이는 자신의 자유와 가치가 공격받게 되었을때 그것을 지키기 위해 국민이 무장한 것이다. 이제 모든 시민이 군인이며, 모든 군인은 시민이다." - 뒤부아 크랑세

 

"전쟁은 다시 한번 인민의 일이 되었다. 그들 각자는 자신을 국가의 시민으로 간주했다" - 클라우제비츠

 

혁명주의자들에게 필요한 이들은 왕의 사람들보다는 혁명과 국가에 헌신하는, 자신들이 믿을 있는 장교들이었다.

 

새로운 제국의 엘리트 내에 이런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출세길이 열리게 해주는 것이 공역, 특히 군복무라는 점을 강조하여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모든 병사는 자신의 배낭에 원수의 지휘봉을 넣고 다닌다는 신회를 영속시킬 있게 해주었다. 공화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군대에서 명예를 추구하는 군대로의 변형을 완성시켰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전역을 위해 그의 '위대한 군대' 소집할 있었던 것은 제국의 행정체계가 성공적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협력과 참모업무의 개선이 효율성에 필수적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18세기 고위 지휘관들은 프리드리히 대왕 아래 있을때의 영예로운 시기만을 회고하며 개혁에 반대했고, 점점 군내에서는 '노인정치' 형성되어 갔다.

1806 프로이센 육군 장군 142 60명이 60 이상이었으며, 13명은 70 이상, 4명은 80 이상이었다.

러시아 육군의 경우에도 장교와 병사간에는 메울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5. 국민의 무장 II

혁명은 시민의 시민권과 그들의 군사적 책임간의 분명한 연관성을 확립했다.

시민은 국가가 그들에게 보장하는 정치적 권리와 자유에 대한 답례로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필요하다면 죽어야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군에서 복무하는 것이 모든 시민의 의무라면, 개인은 사병이라는 천한 계급에서 장군이라는 탁월한 지위로 상승할 있는 기회도 갖게 것이다.

여태까지는 대개 귀족과 젠트리의 전유물이었던 장교단 입단의 기회가 유능하고 용기있는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

 

나폴레옹과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의 병참선과 측면 배후를 위협하고 결정적 지점에 우세한 수의 병력을 포진시킴으로써 전쟁에서 천재적으로 승리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소규모 장기복무 직업군대의 종말을 보여주었다.

1871 이후 유럽 대륙에서는 프로이센 체제(준비된 대규모 예비전력이 지원하고 고도로 훈련된 엘리트 일반 참모장교들이 단기복무 현역 징집병들을 통제하는 체제) 모든 주요 군대의 모델이 되었다.

이후 유럽 각국은 전쟁 발발에 맞춰 최대한 신속하게 가장 규모의 군을 동원할 있게 해줄 군사체계를 발전시키는데 관심을 가졌다.

 

독일의 육군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명망 있는 기간이 되었다.

예비전력의 장교 임관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회적 적합성에 대한 징표였다.

 

대규모 전쟁은 군대 분쟁이 아니라 국가적 의지와 자원에 대한 시험이다


6. 제국주의 전쟁

기관총 집중 운용의 가치와 그것들이 방어뿐 아니라 공세 시에도 전술적으로 사용될 있음을 보여준 것은 1904~5년의 러일전쟁이었다.

 

게릴라전은 군사적, 정치적 이유 때문에 정규군에게 가장 두려운 형태의 작전이었다.

 

제국주의 전쟁, 특히 비정규전은 매우 비결정적이기 때문에 최상의 지휘관 조차도 적을 굴복시키기 위해 경제적인 전쟁에 의존했다.

 

제국주의적 정복의 시대는 성공적인 것이었지만, 3가지 떄문에 결국 종말을 고하게 것이다.

첫째, 1914 이전 시대의 토착민들의 저항은 공통의 이데올로기나 자기 이익에 대한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분열되고 말았다.

둘째, 민족주의에 대응할 있는 처지에 놓여있지 못했다.

셋째, 제국주의 전쟁을 군대들은 계속해서 연구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저강도 분쟁' 치르기 위해 필요한 특화된 지식과 공동의 기억도 그들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7. 총력전 I

모든 정부는 자신들의 국민을 두려워했다. 전쟁이 반체제 인사 무리를 숙청하고 애국적 가치로의 회귀를 고무시키면서 사회적 규율의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믿음 아래 이를 환영했다.

 

영국은 국제법의 원칙과 약소 국가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1918년에 이르러 영국은 중동에서 노골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아랍 민족주의의 열망을 고무시키고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고향이 수립되는 것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환상들의 전쟁이었다.

 

슐리펜 계획은 2개의 가정에 의존했다.

첫째, 러시아군이 전장에 나타나기까지는 6주가 걸린다는 것과 6주는 프랑스를 격파하기에 충분할 만큼 시간이라는것

둘째, 가정은 오류가 있을 있는 여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전쟁의 마찰에 대해서도 참작하지 않았고, 실현 가능성도 항상 낮았다.

 

전쟁 독일의 전략기획은 전적으로 단기전에서 승리하는 것에 기초했다.

그러나 영국의 참전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영국은 세계 선박의 75% 만들었으며,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금융 물자 시장이었다.

독일은 점점 결핍해지는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반면, 연합국은 점점 풍족해지는 전쟁을 수행했다.

 

장차 있을 모든 전쟁에서 과학자, 공학자, 기술자가 병사만큼이나 중요해지게 되었다.

 

포는 특수성과 바람의 속도 방향, 기온, 습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보정될 있었다.

 

파괴적인 대인무기였지만 흙으로 만든 보루나 철조망, 보병들이 공격해야 했던 견고한 기관총 진지에 대해서는 비효과적이었던 유산탄을 고성능 폭약이 대체했다.


8 총력전 II

 

2차대전은 복엽기, 최초의 로켓, 대륙간폭격기, 핵무기를 탄생시켰다.

또한 여성과 아동이 남성과 함께 제복을 입고 싸웠다. 전쟁 내내 병사보다는 민간인이 많이 죽었다.

 

총력전의 개념으로 국가는 국민의 모든 물질적, 지적, 정신적 에너지를 동원해야 했다.

높은 수준의 경제적 동원과 국내의 사기 재정 안정성의 유지가 전장에서의 성과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가정에도 영향을 받았다.

 

독일의 군사 지도자들은 높은 기준의 훈련, 작전준비, 기술적 효율성을 강조했다.

 

독일의 잠수함은 1941 선박 1299척을 격침, 1942년에는 1662척이 격침시켰고 영국의 무역은 전쟁 규모의 1/3이하로 축소되었다.

 

대잠수함전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것은 해전의 낡은 도구들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무기와 무선, 레이더, 항공기였다.

 

전쟁의 18개월 동안 독일군은 점진적인 '탈현대화' 과정을 경험했다.

높은 전투 손실과 다른 전선으로의 자원 전용 때문에 항공기와 탱크의 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고 제국 내의 생산으로는 보조를 맞출 수가 없었다.

병참선이 매우 신장된 결과, 차량과 비행기를 유지하고 수리하는 일은 군수상의 악몽이 되었다.

 

소련의 육군 항공 전력은 이례적인 개혁과 현대화 프로그램을 경험했다.

항공전력은 대규모 육군 항공단에 집중되었고, 무선통신에서 상당한 개선이 이루어져 지상전력에 대한 효과적인 지원 가능, 육군은 독일의 실례에 맞게 재조직되어 중무장 기갑 기동사단이 핵심이 되었다.

또한 원조의 일환으로 미국으로부터 제공된 송수신 겸용 무전기가 탱크에 설치되는 등의 소규모 개선은 전투력에서 급격한 변화를 낳았다.

 

오버로드 작전 첫날 독일은 비행기 170대를 투입할 있었던 반면, 연합군은 1 2천대를 투입했다.


9. 냉전

 

고비용적이 전폭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콘크리트와 강철로 만든 견고한 항공기 격납고가 발전했다

 

국제적 테러리즘, 인질극이나 여객기 납치과 같은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전문화된 전투전력을 발전시켰다.

재래식 전쟁이 발발했을 승리는 가장 훈련된 전력을 보유한 진영에 돌아갔다.

이란-이라크처럼 양측 모두가 유능하지 못했을 때는 전역이 장기화되고 비결정적일 있었다.

똑같이 전문적인 전투원 간의 전쟁에 대한 경험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런 상황에서는 승리가 여분의 장비를 많이 갖춤으로써 가장 지구력을 가진 진영에 돌아갔을 것이다.


10. 인민전쟁

 

프랑스인들이 붙인 이름인 '작은 전쟁' 스페인어로 '게릴라'였다.


11. 기술과 전쟁 I

 

포의 발전은 엄청나게 넓은 도량과 두텁고 곧추서 있는 각진 성벽, 모서리에 위치한 마찬가지로 두터운 능보, 능보는 성벽을 향해, 능보와 능보 측면사격을 제공하기 위해 요새의 전체 구조가 별모양을 띠게 만들었다.

포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요새를 가능한 낮게 건설하기도 했다.

 

1943 독일군이 썼던 전격전은 성공과 동시에 한계를 드러냈고 이는 효과적으로 모방되어 갔다.

첫째, 전격전은 보급을 자동화된 차량에 의존했기 때문에 작전 가능거리가 300km 제한되었다.

둘째, 애초 공세를 위해 만들어졌던 기갑사단은 방어에도 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특히 탱크는 대전차포, 지뢰, 로켓 등에 취약하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탱크는 점점 다른 전력에 의존하게 되어 공병, 포병, 대전차포 제병협동 교리가 전격전의 자리를 차지했다.


12. 전투 - 현대 전투의 경험

 

1914년까지도 대적하는 양측 군대의 장교들은 검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들의 직업이 기사로부터 기원했음을 강조했다. 프랑스 보병은 전통적인 청색코트와 적색바지를 착용했다.

 

역사상의 전사들로 하여금 전투에서 죽는 것을 망설이지 않게 했던 동기 적어도 한가지가 전투에서 실패했을때 교수형이나 총살형과 같은 수치스러운 죽음을 야기할 가능성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된다.

 

화약의 발전은 전장의 종심을 깊게 만들었다. 또한 전장의 공동화가 증가하는 현상은 현대 전쟁의 가장 첨예한 문제중 하나인 리더나 전우들이 시야밖에 있을때 개인의 동기를 유지시키는 것에 관한 문제다.

19세기 말까지 전투의 전형이었던 밀집대형은 전술적, 심리적 목적 모두를 갖고 있었다.

 

병사들에게는 하루 3,000cal 가량이 필요하며, 담배, 술과 약물, 종교 모두 필요했다


13. 해전

 

군사사가들은 현대 전쟁의 시작을 나타내는 사건으로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지목한다.

1775~1840년에 해군 지휘관들은 점증적인 변화와 개선된 통신체계를 통해 자신들의 함대를 통제하고, 사선형 틀을 사용해 종적인 증가시킬 있도록 선박을 설계하며, 부싯돌식 점화장치 포를 활용하고, 좀더 혁신적인 전술을 사용해갔다.

 

'자유통행 선박의 물품은 자유로이 통행된다(Free ships, Free goods)'

' 선박은 통상을 금한다(Enemy ships, Enemy goods)' , '중립국의 선박은 자유롭게 통상한다'

 

함대작전의 전술적 핵심은 전함으로부터 항공모함으로 전이되었다.

그와 동시에 해군과 육군은 태평양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프랑스의 연안 전역에 걸쳐 이루어지는 일련의 육해 합동작전에서 협력할 있는 수단을 발견했다.


14. 항공전

 

소련은 미국의 원조를 통해 거의 100 마일에 이르는 전화선과 기지국 3 5000곳을 공급받았다.

 

오버로드 작전은 제병협동 전투의 모델이었다.

항공기 1 2천대, 공중이나 잠수함 공격으로부터 함대를 보호했으며, 나머지는 적의 요새와 전초기지를 폭격했다.

전투기들은 항공기들이 전장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전폭기들은 병력, 보급물자, 교통로를 가차없이 공격했다. 활공기들은 보급물자와 병력을 싣고 비행했으며, 디데이에는 낙하산으로 강하했다.

작전은 항공기의 유연성과 다재다능성, 항공력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통일성을 보여주었다.

 

연합군 공군은 유럽의 표적에 거의 200만톤에 달하는 폭탄을 투하했다.

독일인 40 여명이 죽었다. 폭격은 전시 민간인과 군인의 구별을 전적으로 잠식해버렸다.

8공군에 의해 실행된 정밀폭격전략은 높은 수준의 민간인 사상을 포함하기도 했다.

가옥 400만여 채가 파괴되었으며 독일인 800만명이 소개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야했다.

 

폭격이 독일의 생산을 중단시키지도 못했으며, 그것이 감당할 없을 만큼의 사기 저하도 발생시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5. 전쟁과 대중 - 총력전의 사회적 영향

 

대규모의 동원에서 긴요한 전제조건은 현대 관료제의 능력, 규모, 권한이다.

국가는 총력전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훨씬 깊은 이해를 가지고 2 세계대전으로 치달았지만 그곳에서도 점진적인 진화가 있었으며, 1942년에 이르러서야 전시 경제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영국의 생산부, 독일의 군비부, 미국은 전시생산국과 전시인력위원회를 창설했다.

 

두차례의 전쟁은 '국가의 과잉'으로의 전이를 보여주었다. 전시 국가행정부뿐 아니라 기타 출처로부터도 평시 국가의 개입을 확대시키기 위한 매우 다양한 제안이 제기되었다.

 

사업계와 협력이 경제적인 목표를 충족시키기 위해 매우 중요한

한편으로 전쟁은 완전고용을 가져왔으며, 그것은 다시 노동자들에게 힘을 제공했다.

 

국가는 일하는 엄마와 떨어진 아이들에게 책임을 다하기 위해 놀이방을 도입했다.

병사들의 손실된 임금을 보상해주기 위해 출산수당과 가족수입 보조금이 제공되었다.

 

사무원, 교사, 소상인, 기타 독일의 중하급 중간계급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거대 노조와 거대 산업 합의의 제단에 오른 희생물이라고 느끼지 않게 해주지는 못했다.

전시 협동조합주의가 대부분 중간계급의 소외감과 분노를 유발했다.

 

결핍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보호되었던 집단은 농민이었다

 

프랑스는 전쟁 동안 정부의 빚이 5배나 증가하고 물가도 4배나 올랐다.

영국에서는 정부의 빚이 1914~19년간 7 파운드에서 75 파운드로 증가했다.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경제인 영국과 독일이 그러한 빚의 유산에 시달리며 유럽의 회복이 더뎌지는 중대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독일은 인플레이션이 전후시기까지 지속되도록 방치하여 결국 인플레이션을 야기했고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 폴란드, 오스트리아, 헝가리에서도 연출되었다.


16. 여성과 전쟁

 

스파르타의 어머니 자신의 아들에게 방패를 들게 하거나 그것에 들려 돌아오기를 강권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아들을 시민사회의 요구라는 제단에 희생시키고자 양육하는 어머니이다.

 

성모 마리아 자신의 조국이 수행하는 전쟁을 지지할지는 모르지만, 아들의 죽음에 대해 기뻐 어쩔줄 모르기보다는 애통해 한다.

 

여성은 압도적으로 비전투원으로 남았지만, 그들은 이제 약탈을 일삼는 무리와 점령군에 의해서뿐 아니라 포위전의 장거리 무기와, 우리 세기에는 도시에 투하된 폭탄에 의해서도 공격받을 있다.

심지어는 전쟁이 총력화되가며 전쟁에 대한 여성의 개입은 다수의 기능성을 분화되었다.

 

여성은 가족의 수호자였던 반면 남성은 국가의 보호자였다.

 

"젊은 여성들은 비겁함의 상징으로서 하얀 깃털을 나눠주어 군복을 입지 않은 남성들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여성들은 살육을 혐오하지만 남성들이 죽이고 부상을 입히는데 최선을 다한 뒤에는 우리 여성들이 부서진 신체를 고치고, 죽어가는 이들에게 위안으 주며, 이름없는 무덤을 보고 준비가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남성과 군사주의의 어머니들, 헬러위스>

 

야전간호사, 통신원, 스피아

 

소련 여성들은 전쟁 동안 유일하게 정규 전투전력으로 형성했고, 80만에서 100만명 또는 전체 군사요원의 8%였다.

 

인력부족을 벌충하기 위해, 전시노동을 위해 공장으로 향했고 미국에서는 아들 한명을 잃은 여성이 정부로부터 '금성' 휘장을 받고 공식적으로 금성 어머니로 지정받았다.

'어머니-가정-고국' 극적인 이미지는 모든 국가에서 수사와 선전을 위한 무기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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