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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51. 6.25 전쟁과 중국>

by leeesssong 2020. 5. 4.

한줄평 - 국제정세를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

힘 없는 평화는 없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도 없다.


ㅇ서론

 

필자는 한국전쟁이 스탈린이 고안한 대중대미 이중 전략이었다고 주장한다.

스탈린은 주적인 미국과 차적인 신중국을 동시에 제압하는 방법으로

김일성이 가져온 남침계획을 승인해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을 유도,

미국과 중국의 힘을 소진시키고 상호협력의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다.

 

다른 한편, 마오쩌둥의 신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동기는

우선 미국으로부터 오는 안보위협을 제거하고, 동시에 당시 소련이 지배하다시피한

자국의 만주지역을 되찾아 국토를 안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ㅡ 1950 6 27, 유엔의 한국전쟁 개입을 결의한 유엔 안보리 회의에 소련이 불참한 이유를

설명한 비밀전문은 스탈린이 자신의 한국전쟁 계획을 고백한 것이었다.

 

"미국이 한국파병을 마음대로 하게 함으로써 한국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여

미중이 한반도에서 싸우게 되면, 가까운 장래에 3 대전을 일으킬 없게되고,

이는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주게 되어, 세계의 세력균형이 소련에게 유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ㅇ본론

 

1.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관계

 

. 중공혁명 초기의 중소갈등 : 핍장항일 반대, 연장항일 지지

. 스탈린의 장제스 우대와 마오쩌둥 차별

.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각자의 필요성과 상대의 약점을 교묘히 활용할 뿐

실제로는 서로를 극도로 싫어하고 불신했다.

 

신중국의 등장은 미국에게는 중국의 상실을, 소련에게는 만주에 대한 지배권 상실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그토록 원하지 않았던 중공혁명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국민당 정부의 무능과 부패 때문이었다.

"국민당보다 공산당이 우리가 공급한 무기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국민당 장군들이 그들의 애인과 개인재산을 나르느라 비행기를 모두 가져간 탓에 사용할 없었다.

그들은 썩을대로 썩은, 전투할 의지는 하나도 없는 파산자들이었다. 장제스 국민당의 관심은

전쟁 승리보다는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금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신중국은 소련의 완충지대를 확대하고,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중국의 힘이 강해지면 아시아에서 소련의 강력한 경쟁국이 될수 있다는 점이 양날의 칼이었다.

그러기에 스탈린은 2 티토가 있는 마오쩌둥을 제어하고 압박해 자신의 예속하에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2. 스탈린과 소련

 

스탈린이 같은 시기에 마오쩌둥의 타이완 해방을 위한 지원을 거부하고, 북한 김일성의 남침 지원을 수락했는가?

북한은 남침시 소련의 단순한 군사원조만을 요구해 소련의 참전이 필요하지 않았다.

중국은 타이완 해방을 위해 소련의 경제적, 군사적 원조와 함께 공군과 특수부대의 지원을 요구했다.

북한의 남북 통일은 소련에게 이익이 있지만 통일된 중국은 부담이 될 있었다.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통해 추구한 목표

첫째, 미소 양대 진영의 대결논리에 따라 신중국을 소련 중심으로 하는 종주권 체제에 묶어 두는것.

이를 위해 중국의 타이완 해방에 앞서 한반도 전쟁을 먼저 하였다.

둘째, 유럽에서 가중되는 미국의 군사적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시키는 .

이를 통해 동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할 있는 시간을 있었다.

 

전쟁 개시 스탈린은 중소 동맹조약 체결을 위해

마오쩌둥을 70여일간 베이징을 비우고 모스크바에 잡아두었다.

이는 협상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 개시 이후 소련은 이해할 없는 태도를 보여준다.

스탈린은 직접 전쟁을 결정하고는 정작 전쟁이 시작되자 뒤로 빠지는 은폐의 행태를 보인다.

유엔 안보리 회의 불참, 소련 군사고문단의 활동을 38선 이북지역으로 제한,

공군의 작전범위도 중북, 중소 국경지역으로 한정

 

전쟁 중에도 소련은 결코 북한군의 조기 승리를 바라지 않는 행태를 보여준다.

긴급한 도하장비를 제때 제공하지 않았고 자국 고문단의 현장지휘를 거부, 통신장비의 사용도 제한했다.

특히 중국과 북한이 전쟁 승리의 적기로 7~8월에 중공군의 조기투입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 결국 8월말 전세가 북한군에게 불리하게 되자 거부의사를 밝힌 것이다.

 

스탈린의 목표에는 '한반도 공산화 통일'에 통일 같은건 들어있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묶여 유럽에 신경을 여유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국전쟁을 최대한 오래 끌어야 했고,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으로 북진해야 중공군이 개입하기 때문이었다.


3.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중국이 북한과 전쟁 전략을 논의하고 사전에 준비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중국이 스탈린의 전쟁계획을 통보받은 시기도 50 4 중순이었고,

그것도 스탈린을 통해서가 아니라 김일성의 방중을 통한 사후통보 형식이었다.

이를 전혀 예상치 못한 마오쩌둥은 부랴부랴 스탈린에게 확인하는 소동을 벌이는데,

이는 중국이 전쟁의 결정뿐만 아니라 전쟁의 개시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이 처한 현실 상황에서도 미리 참전을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

건국은 했지만 아직 타이완, 티벳 지역 해방과 국민당 잔당소탕, 산적한 정치경제사회적 문제 해결해야할

중국이 참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마오쩌둥은 소련과 경제발전 국가안보에 필수적인

동맹조약을 맺은 직후였기에 자신을 불신하고 있는 스탈린에게 충성심을 보여주어야 했다.

 

중국 측으로서는 전쟁 발발 최악의 시점이고, 소련군의 행태를 보아 참전을 거부하고 있었으나,

스탈린은 즉각 만주로의 북한군 철수와 망명정부 수립을 지시하는

중국을 압박함으로써 참전하지 않을수 없게 했다.

 

중국은 자신들의 통치기반을 강화하고, 타이완 해방과 경제난 해결을 위해

무엇보다 북한의 조속한 승리가 절실했다. 이에 중국의 조기 파병과 승리는 일석삼조의 카드였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중국과 북한의 중공군 조기 파병요청에 침묵, 끝내 요청을 거절한것이다.

 

참전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태도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9 중순 이후 매우 신중해졌고,

직접 참전요청을 받은 10월초부터는 참전의지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이 파병을 결정한 것은 동북지역의 안전을 고려햇기 때문이다.

북한 망명정부를 수용하는 것은 만주에 대한 소련의 개입과 미국의 진입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동북지방의 불안정은 중국 전체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었다.

특히 중국의 지정학적 요충지인 북한을 잃는 것은 자국에 지속적인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4. ​전후 미국과 중국의 참전 득실

 

. 중국의 경우

중공군은 소련군을 대신해 한반도에서 생지옥을 경험했고,

30 동안이나 국제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다가 개방을 있었다.

 

마오쩌둥은 큰아들 마오안잉을 잃었고, 타이완 통일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

수천만 명이 희생된 중국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도 한국 전쟁 참전이 몰고온 상황에서 일어난 재앙이었다.

 

그러나 북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증대되었고,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행사할 있게 되었다.

소련으로부터 대규모의 지원을 받아 경제회복과 국민경제의 발전은 물론

군의 현대화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만주도 되찾았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거대한 장기판에 놓인 하나의 () 불과했다.

김일성에게 한국전쟁을 소련과 중국이라는 보호자들에게 의자하다가 

지속적으로 굴욕과 배신을 경험한 불신과 분노의 전쟁이었다.

 

 

. 미국의 경우

한국전쟁은 '잘못 선정된 장소와 시간에서, 잘못 선정된 적과 전쟁에 휘말린 '이라고 표현하고,

미국에게 한국전쟁은 '정보의 실패' 일어난 실수와 같은 것이었다.

 

ㅡ '불쾌한 전쟁', '원치 않은 전쟁', '잊힌 전쟁'

맥아더 원수가 전쟁기간 내내 한국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았던 것은 아마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트루먼은 대소련 봉쇄망(NSC-68)을 완성, 타이완 방어, 일본의 경제부흥과 미일 동맹, 한미동맹,

독일의 재무장과 나토의 군사동맹화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대소 봉쇄망을 완성한 애치슨은 여러해가 지난 프린스턴 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 당시의 상황에서 사실 한국이 우릴 살린 겁니다."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용광로에서 타이완과 일본은 구원을 받았고, 위기의 이승만 정권은 재기할 수 있었다.


ㅇ 결론

 

총을 전쟁 발발의 주체는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북한의 김일성이 분명하지만,

전쟁의 기원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요인들, 특히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의 갈등과 암투

한국전쟁을 유발한 가장 중요한 배경이라고 본다.

 

남북한은 공히 전쟁에 임하면서 온갖 수모와 고통, 갑절의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상황에서 믿을 오직 자신의 힘과 능력뿐,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소련은 각각 최악의 상황에서 남북한을 포기하려 했다.

우리가 힘이 없고 주도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한반도 통일의 기회는 커녕 찾아온 기회조차 살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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