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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49. 비하인드 워(Behind War)>

by leeesssong 2020. 4. 27.

한줄평 - 전쟁의 뒷모습에 숨겨져 있는 인간 본연의 모습들, 영원한 동지와 적은 없고, 진정한 승리와 패배도 없다.


ㅇ본론

 

제 1장. 제국의 심장을 지켜라

 

제1제국은 신성로마제국, 제2제국은 1871년 성립된 독일제국, 제3제국은 나치 독일을 일컫는다.

 

ㅡ 1866년 보오전쟁, 1870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수백년 동안 수백개의 영방 등으로

찢어져 있던 독일을 통일하는데 중추세력이 되었다.

1914년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War to End all wars)' 으로 알려진 1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

패전국이 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옥죄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 동프로이센의 심장인 쾨니히스베르크를 합병당하게 된다.

 

ㅡ 칸트의 무덤 같은 프로이센의 유산이 많이 남아 있어,

지금도 독일인들의 큰 애착을 갖는 쾨니히스베르크는 패전 직후 독일인들이 강제로 내쫓기면서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뀐 후 러시아의 역외 영토로 현재까지 존속해 있다.


제2장.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ㅡ 히틀러는 소련과 벌이는 전쟁을 말살전(전멸전, Vernichtungskrieg)으로 규정했다.

그가 볼때, 소련은 독일과 유럽문명의 주적인 유대인, 볼셰비키, 슬라브 족의 집약체였다.

히틀러는 독일이 패전국의 멍에를 쓰게 된 것은 등 뒤에서 비수를 꽂은 독일 좌파의 음모와

그 배후의 공산주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소련이 세계인 모두가 평등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민족주의를 타파하겠다고 외치는 것이 심히 못마땅했다.

게르만 혈통 우월사상을 가진 히틀러가 백인도 민족별로 우열을 구별했을 정도니 황색, 흑색 인종을

저질로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ㅡ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이 침입했을때 한동안 저항을 하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충성스러운 피지배인을 자청함으로써 몽골로부터 대공국의 칭호와 함께

다른 공국들보다 월등한 자치권을 부여받은 나라였다.

오늘날 유라시아를 함께 지배하는 러시아의 거대한 영토는 몽골제국의 성립으로부터 그 기원을 따져야 한다.


제3장. 역사의 변방에 선 나라들

 

ㅡ 1911년 이탈리아는 아프리카를 침공하며, 리비아와 튀니지를 점령한다면

고대 로마가 세계제국으로 발전했던 영광의 역사를 다시 재현할 수 있을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당시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와 아라비아의 각지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로 인해

제국의 중심에서 멀어진 그 지역까지 관리하기가 벅찼던 상황이었다.

 

ㅡ 1912년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은 이탈리아와의 강화조약으로 북아프리카의 종주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전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오스만 제국이 스스로 물러났기에,

당시 실질적으로 살고 있던 베르베르인들의 독립전쟁이 20여년간 진행되었다.

군사적 능력이 부족했던 이탈리아는 독립투쟁에 효과적으로 대치하지 못했고,

베르베르의 '오마르 무크타르'는 마치 한니발의 재림이라 불릴만큼 사막과 산악을 이용해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에 이탈리아는 양민학살로 결국 1931년 '무크타르'를 생포하고 리비아를 점령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은 세계질서를 재편한다는 명목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패전국들을 쪼개고 분리시켜 철저히 무력화시키기 위한 명분이었다.

이후 유럽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탄생한 대부분의 신생 국가들이

패전국 지역에 세워졌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ㅡ 평화는 결코 거저 얻을수 있는것이 아니라 준비된 힘이 있어야 지킬수 있는 것이다.

고려에 대한 거란의 침략 야욕을 결정적으로 포기하게 만든 것은 서희의 입이 아니라 강감찬의 힘이었다.

물론 서희의 입은 힘으로도 대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내포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병자호란때처럼 힘도 없으면서 모화사상에 물들어 입으로만 평화를 원한다고 해보았자

그 결과가 어떠한지는 역사가 알려주고 있다.


제4장. 진정한 승자도 완전한 패자도 없는 전쟁

 

ㅡ  실제 마지노선은 최후의 보루가 아니라 적을 가장 앞에서 방어하는 최전선의 요새였다.

그러나 뚫릴수 없다는, 또는 뚫려서는 곤란하다는 의미로 종종 사용되는 단어와는 달리

막상 전쟁이 발발했을때 나라를 구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종말을 마치했기에 마지노선은

정작 필요할때 자기역할을 못한 경우를 읠미하는 단어가 되어야 하는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ㅡ 히틀러가 3일간 됭케르크의 진격을 멈춘 것에 대해 그동안 많은 이야기가 있고,

연합군의 철수에 큰 도움을 준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30만명의 대병력이 거의 피해를 입지않고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도 아니다. 과장된 측면도 있다.

됭케르크에서의 해상철수 작전은 5월 26일부터 시작되어 6월 5일 종료되었는데,

히틀러의 명령으로 멈추었던 독일의 진격이 5월 27일 다시 시작되었으니

정작 연합군이 혜택을 본 시간은 단지 하루뿐이었다.

 

ㅡ 독일군의 크레타 섬 침공전은 실제로 섬은 점령했으나 최정예 팔슈름야거들의 피해가 너무커

사실상 실패한 작전이었다. 반면 독일의 대규모 공수작전에 감명받은 연합군은 독일군의 실패원인을

심층 분석하여 대규모의 공수부대를 양성했다.


제5장.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전쟁

 

ㅡ 영국의 해군장관이었던 처칠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요충지인 '갈리폴리'를

점령하겠다며 제대로 준비도 안 갖춘 상태로 상륙작전을 감행시킨적이 있었고

엄청난 사상자와 더불어 역사에 길이 남을 참패를 당했으며 본인도 책임을 지고 사임한 뼈아픈 경험이 있었다.

 

ㅡ 그럼에도 처칠은 그떄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듯하고 '디에프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비록 해군력이 강한 영국은 안전하게 상륙군을 바다로 이동시켜 해안가에 올려놓을 힘은 있었지만,

막상 해안가에 설치된 독일의 견고한 방어막은 우습게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ㅡ 1942년 디에프의 독일 302사단 571연대 2500여명은 훈련상태 및 무장도 충실했고,

상륙예상지점을 감제할 수 있는 주요 지점마다 요새화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무엇보다 계속된 전쟁으로 실전 전투경험이 풍부하기도 했다.

 

ㅡ 무모하게 시도된 선도 부대의 침투가 참담한 실패로 끝나자

후속할 본진의 상륙과 관련한 기습의 이점이 없어졌다.

그만큼 처음부터 디에프 상륙작전은 계획 자체가 부실했다.

영국함대가 해안 타격을 펼쳐보기도 전에 독일군 해안 포대들이 바다에 떠 있는

영국 함대를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고, 전초부대가 몰살당한 것도 모자라

화력을 퍼부어야할 영국 함대는 대열이 흐트러졌고, 연속해서 상륙할 부대들까지 무너졌다.

 

ㅡ 디에프 상륙작전은 방파제의 높이도 몰랐을만큼 사전 정보획득에도 허술했고,

병과간의 협조도 엉성했으며, 이원화된 지휘체계로 인해 지휘부는 작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ㅡ 노르망디 상륙작전 D-Day 당시 서부전선의 독일군 전투서열을 삺보면,

서부전선 최고사령관은 독일군 최고 원로이자 명장인 폰 룬트슈테트였다.

예하에 북프랑스와 대서양을 담당하는 B집단군, 남프랑스와 지중해를 방어하는 G집단군,

그리고 서부전선 최고사령부 직할부대인 기갑집단이 있었다.

 

ㅡ B집단군 사령관 롬멜은 어느덧 영웅의 위치에 올라갔고 연합군에도 경외시 되었다.

또한 G집단군 사령관 블라스코비츠, 기갑집단 사령관 폰 슈베펜부르크 또한 독일의 명장으로

손색이 없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롬멜은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툭하면 총통과 직접 연결하고는 했다.

이에 룬트슈테트가 전선 전체를 조율하는데 애를 먹은 것은 당연했다.

또한 롬멜을 평소에 경원시하던 반대파가 많았다. 슈베펜부르크나 예하 7군 사령관인 돌만과도 마찰이 있었다.

 

ㅡ 당시 군부의 상륙작전 방어계획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먼저 최대한 해안가 가까이에 기갑부대를 배치해놓고 있따가 상륙하는 적을 즉시 바다로 밑어붙이자는 의견과

내륙으로 연합군을 최대한 끌어들인 후 기갑부대를 앞세워 일거에 소탕하자는 주장으로 대립했다.

 

ㅡ 이처럼 서부전선을 제 1선에서 방어할 롬멜을 기준으로 전후좌우 중구난방인 상태라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핵심인 기갑부대를 룬트슈테트나 롬멜,

기갑집단 사령관인 슈베펜부르크까지 지휘할수 없었다.

독일의 기갑부대는 히틀러의 직접 명령 없이는 이동이나 작전 투입이 불가능한 별개의 조직이 되어버린 것이다.

D-Day 당시 독일의 일선 지휘관들이 할수 있는 일이란 잠자리에서 총통이 빨리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제6장. 세계 전쟁의 또다른 체스판

 

ㅡ 일제는 수용소 포로들을 각종 전략시설을 보호하는 방패막이로 삼았다.

수용소의 위치를 일부러 노출시키고 분산수용하여 중요시설 부근에 수용소를 유치하여 폭격에 대비하였다.

 

ㅡ 한강철교와 더불어 경인선이 개통되자마자 일본은 이를 이용해 2~4년 사이에 경부선, 경의선을

개통시키며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대륙 침탈을 위한 교통망 확보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제7장 끝나지 않은 625전쟁

 

ㅡ 김포지구 전투사령부는 1950년 6월 26일 정보학교장이었던 계인주 대령을 사령관으로 창설되어

최일선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막아내야할 부대였다. 그러나 28일 사령관의 실종사실을 알게되었고,

그의 행방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전투 이틀만에 행방불명된 계인주가 나타난 곳은 어처구니 없게도 부산이었다.

그는 전황이 불리하고 육군본부가 수원으로 이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본으로 밀항하기 위해

부대를 무단으로 이탈해 가족을 데리고 도망을 갔던 것이다.

 

ㅡ 천안시 '마틴의 거리'는 625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 첫 고위 장교 로버트 마틴을 기념하며 명명된 거리이다.

 

ㅡ 워커 부자, 벤플리트 부자, 아이젠하워 부자, 클라크 부자 등 총142명의 장군 자제들이 참전해

이들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으며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였다.

또한 중공군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도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미국과 중국의 지도층은 낯선 한반도까지 와서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는 행동을 직접 보여주었고 그런 와중에 발생한 희생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ㅡ 우리가 기억하는 지평리 전투의 영웅중 한명인 몽클라르 중령은 '마그랭-베르느네'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다.

 

ㅡ 51년 동해안에서 작전을 벌이던 백선엽 소장의 1군단은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화력지원이 충분하지 못했다.

이에 미7함대 5순양분대의 사령관으로 작전 중인 알레이 버크 소장을 찾아가 함포지원을 요청했고,

국군의 요청이 있을때마다 거침없이 함포사격을 지원했다.

백선엽 장군은 버크 제독을 1군단의 포병사령관이라 자랑하고 다닐 정도였다.

호인이었던 버크는 전후 대장으로 진급해 미 해군 발전을 위해 전력을 다해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미 해군은 버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미 해군 사상 최초로 생존해 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새로 건조한 구축함의 이름을 명명했다. (미 해군의 주력 이지스 구축함 1번함 DDG-51알레이 버크)

 

ㅡ 마라톤 역사의 전설인 '아베베 비킬라'는 51년 주한 에티오피아군 제 2진으로

625전쟁에 파병되어 1년간 복무한 참전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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