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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48. Fog of War - 인천상륙작전 vs 중공군>

by leeesssong 2020. 4. 27.

한줄평 - 인천'상륙작전'의 위엄! 그로 인한 전장의 불확실성!

혜안(Coup d'oeil), 신사고(vitru), 임기응변의 지혜를 얻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


ㅇ서론

 

ㅡ 인천상륙작전의 전술, 전략적 가치를 분석하고,

이후 중공군의 각 공세에서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로 인해 증폭된 불확실성이

당시 팽덕회의 작전지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하였다.

 

ㅡ 일부 연구에서 유엔군의 상륙위협에 대한 언급 없이 중공군의 운동전에 영향을 미친 제한사항으로

단순히 공군의 부재, 군수지원의 제한 등에 국한시킨 연구자료만 있는 실정이다.


ㅇ본론

 

제1장. 불확실성(Fog of War)과 워게임(War-game)

 

ㅡ 공격자는 항상 주도권(Initiative)을, 방자는 지형활용(Key Terrain)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전쟁은 공격자와 방어자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제 3의 요소인 '시간'이 존재한다.

여기서 시간은 공격자나 방어자의 이점을 상쇄시키는 이른바 '군시(Military Hour)'를 의미한다.

 

ㅡ 군시는 공격자에게는 짧으면 짧을수록, 방어자에게는 길면 길수록 좋은 것이다.

 

ㅡ 클라우제비츠는 "전투의 대부분은 불확실한 안개에 잠겨있기 때문에 올바른 상황인식 및 조치를 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지성이 요구된다."라고 정의하면서, 전장의 불확실성(Fog of War)이란 군사용어를 만들었다.

 

ㅡ 이런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지휘관의 탁월한 통찰력인 '혜안(Coup d'oil)'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를 '장군들의 신사고(virtu)'라고 하였고, 손자 또한 변화하는 전장의 상황을 살피면서

유동적인 전장상황에 임기응변할 수 있는 지혜를 장수가 갖춰야할 최고의 덕목으로 꼽았다.

 

ㅡ 불확실성과 마찰의 연속적인 전장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에 적시에 대처하는

지휘관의 상황판단 및 조치능력. 이런 능력은 단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군사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습득과 많은 실전경험을 토대로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ㅡ 기동성의 향상은 전쟁에서 작전템포(tempo)가 빨라지게 되었고,

지휘관의 신속 정확한 상황판단 및 조치능력은 더욱더 중요시되었다.

그 결과 독일군 참모제도와 같이 지휘관을 보좌하는 참모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작전술'이 등장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광역화된 전장에서는 임무의 분업과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추어야만

넓은 전장에서 동사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우발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ㅡ 워게임은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기 위해 참모조직의 역할분담을 통해 적의 행동과

아군의 실현 가능한 방책을 도출해내는 일종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다.

19세기 프로이센군에서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되어 작전계획 수립 및 교육수단으로 발전되었다.

 

ㅡ 워게임은 3가지 활용가치가 있다.

첫째, 반복적으로 숙달함으로써 훈련성과를 제고시킬수 있으며,

무엇보다 장교들의 전략적 전술적 안목을 증대시킬 수 있다.

전장상황을 공유하면서 지휘관과 참모사이에 전략적 전술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자연스럽게 전장을 파악하는 혜안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워게임은 승패보다도 기존의 계획수립 및 실행상의 허점을 발견하여

변화된 전장 환경에 부합된 전략전술을 발견해가는 과정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둘째, 지휘관과 참모는 워게임을 통해 다양한 상황과 결과를 경험하므로 사고의 유연성을 배양할 수 있다.

 

셋째, 불확실성에 전략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한다.

전장이 광역화될수록 적에 대한 정보는 적어지게 되고, 그 결과 전장의 불확실성은 증폭되기 마련이다.

워게임을 통해 적이 취할수 있는 실현가능한 모든방책을 모의실험 한다면, 전장을 가시화할 수 있고

상황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더라도 이에대한 보완책을 쉽게 마련할 수있다.


제2장. 인천상륙작전

 

ㅡ 미 합참의 인천상륙작전 반대이유 5가지

1. 인천은 부산에서 420km떨어져있다. 이는 병력 분산이다.

2. 해병대를 방어선에서 제외하면 부산 확보 자체가 위험할 수 있다.

3. 일본의 미 7사단 상륙작전 투입시, 일본 본토의 육상방위력이 위험할 수 있다.

4. 실패시, 미8군의 보급, 한반도에서의 철수에 커다란 지장이 생긴다.

5. 인천의 지리적, 지형적, 해상적 조건은 상륙작전에 적합하지 않다.

 

ㅡ 맥아더의 4가지 선정이유

1. 서울은 인천과 30km 이내며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것은 전략적, 정치적, 심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북한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포위할수도 있게 된다.

2. 북한군은 부산에 묶여있으므로 후방에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으므로 기습이 가능하다.

3. 자신감회복과 북한의 이미지 저하에 큰 효과를 가진다.

4. 부산만의 반격에 의한 전선회복에는 약 10만명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예상이 있는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그 생명을 구하게 된다.

 

ㅡ 북한군 입장에서는 낙동강 방어선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유엔공군과 해군의 군수지원차단작전으로 북한의 보급품은 제대로 보충되지 않았다.

또한 북한 전선 사령부가 병력을 집중하지 않고 낙동간 전 전선에서 분산 공격하는 전술적 과오를 범했기에

전투력은 하루가 다르게 저하되었다.

(북한의 병참선은 300km로 신장되었으며, 보급전담 사단인 36사가 김천에서 주민 36만명을 강제로 동원하여

1인당 20kg 의 보급품을 하룻밤에 20~30km씩 릴레이식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이동시켰다.)

 

ㅡ 미 극동군 사령부는 군산을 상륙지점으로 기만하기 위해 인천과 군산에 폭격을 균등하게 실시했다.

제7합동기동함대는 인천과 서울을 포격하고, 미 극동공군은 군산일대를 폭격했다.

 

ㅡ <패전분석> 저자 Dupuy

공격자가 작전한계점에 도달하는 경우는 유형적 상황과 무형적 상황으로 나눌 수 있다.

제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등 참전미군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대부분의 응답자들은

'적이 측면 또는 후방으로 기동하여 아군을 포위하는 경우'를 작전한계점에 도달하는 치명적인 요소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연구는 공격자가 전투근무지원의 부족이나 결핍, 높은 사상자율 같은 유형적 상황보다는 적군이

후미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심리적 불안이 공격자를 작전한계점에 도달하게 만드는 주요요인으로 지적하였다.

 

ㅡ 유엔군이 한달반 동안 낙동강 방어선 일대에서 실시한 소모전은 북한군의 힘을 빼기 위한 전력이었다.

적 주력의 전투력이 저하되면 적은 자신의 예비대를 증원시킨다는 빨대효과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여건조성작전이었다.

 

ㅡ 인천상륙작전의 성과

1. 북한군의 주력을 와해시킬수 있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중공군의 3차 공세 이전까지 독자적인 작전수행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2. 시간과 병력을 절약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반격작전은 상륙작전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3. 한반도와 같이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폭이 좁은 지역에서는 상륙작전이 유용하고,

특히 제공권과 제해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얼마든지 상륙작전을 통한 기습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4. "제공권과 제해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할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공군이 참전하기 전부터 피동에 빠지게 하는 전략적 가치를 가졌다.


제3장. 원산상륙작전

 

ㅡ 승선 완료시간 10월 17일, 국군 1군단이 10월 11일에 원산을 점령해버림으로써

원산상륙작전은 행정적인 상륙작전으로 전환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설된 기뢰로 인해

10월 26일에야 원산에 상륙할 수 있었는데, 이날 국군 6사단 7연대는 압록강 초산에 도달한 상태였다.

 

ㅡ 무려 1달 동안이나 1개 군단이 바다 위에서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다.

이로 인해 미 8군과 미 10군단 사이에 간격이 발생했다.

 

ㅡ 미 8군의 보급체계가 마비되었다.

맥아더의 북진 명령 이후 모든 수송선이 원산상륙작전에 동원되면서 심각한 보급난이 발생하였다.

또한 평양을 점령하고 다시 북진을 전개했을 떄, 진남포에 설치된 기뢰를 제거하지 못해

미 8군의 보급은 더욱 어려워졌다. 기뢰 소해정 또한 원산으로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ㅡ 하지만 인천상륙작전 뿐 아니라 원산상륙작전의 성과는

한반도 어느곳에서나 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킨 것이었다.

 

ㅡ결론적으로 원산상륙작전은 유엔군의 협조된 작전과 보급지원에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부정적인 측면(반작용)도

있었지만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불확실성을 증폭시켜 이들의 작전지휘와 행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긍정적인 측면(작용)도

있었다.


제4장. 인천상륙작전이 중공군에 미친 영향

 

ㅡ 중공군의 최초계획은 청천강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철수하는 북한군을 엄호하고,

유엔군의 북진을 ㅚ대한 저지한 후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진격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결국 계획을 수정하고 중요지역에 매복하여 공격중인 유엔군을 기습하는 것으로 변경하였고,

최대한 많은 수의 유엔군을 섬멸하는 것을 작전목적으로 삼고, 비교적 화력이 약한 국군 지역을 돌파하여

유엔군의 후방을 차단한 후, 정면과 후방에서 유엔군을 각개격파하는 운동전을 계획한다.

 

ㅡ 1차 공세시 유엔군은 보급난으로 기동력과 화력이 약화되었고, 산악지역이라 육해공 화력지원은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중공군의 참전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완벽한 기습이였고,

유엔군의 주력을 섬멸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정면압박부대와 우회기동부대에 예비대를 편성하지 못해 전과확대를 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견제부대를 편성하여 결정적인 전투에 투입할 예비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미 10군단의 측방 유입, 미 1군단의 견제 및 유엔군의 상륙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전투력을 분산했기 때문에

중공군은 운산 전투와 비호산 전투에 투입할 예비대를 편성하지 못했다.

 

ㅡ 2차 공세는 분명 1차 공세와는 달랐다. 1차 공세에서 실패한 대규모 우회기동도 어느정도 성과를 이룰 수

있었으며 1차 공세보다 많은 유엔군을 섬멸했다. 그러나 1차 목표였던 국군 2군단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지만,

2차 목표였던 미군에게는 그다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하였다.

이렇듯 중공군이 전과확대를 제대로 할수 없었던 이유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전투력의 분산이었다.

중공군은 해안경계를 위해 1개 군을, 측방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2개 군을 편성했던 것이다.

이처럼 유엔군의 상륙위협과 강력한 기동력, 화력은 또다시 중공군에게 불확실성을 증폭시켜 그들의 작전

전반에 영향을 미쳐 전투력을 분산시키게 햇고, 결국 전술적 승리를 전략적으로 확대하지 못하게 했다.

 

ㅡ 3차 공세 당시, 미 8군 리지웨이는 어떤 형태의 반격작전(상륙 등)도 계획하지 않았고

그저 중공군의 공격기세에 밀려 철수 및 철퇴를 했다.

물론 두차례의 공격으로 중공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미 8군 장병들의 전투기피현상도 큰 몫을 했다.

유엔군이 아무런 이유없이 철수하자 중공군의 의심은 더욱더 증폭되어 갔다.

 

ㅡ <3차 공세를 위한 사령부 작전토의 - 중공군>

-유엔군은 아직 전투력이 약화된 것이 아니고, 강력한 예비대를 보유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화력은 막강한데 왜 서울을 포기하고 철수 했을까?

-적은 38도선상과 그 이남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는데,

왜 방어를 하지 않고 우리와 접촉도 하지 않은채 철퇴했을까?

-중공군 후방의 비전투요원을 전선으로 충당해도 대부분의 전투병력은 참전초기의 2/3수준밖에 되지 않고,

영-양상태가 지극히 나빠 더이상의 공격은 무리다.

-병참선은 이미 550~700km로 신장되었고, 남쪽 대부분 개활지여서 적의 항공기 공격에 취약하다.

-리지웨이는 강력한 해공군으로 우리의 후방 병참선을 차단하고

심지어 제 2의 인천상륙작전도 감행할 수 있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ㅡ 1,2차 공세에서 유엔군의 상륙작전 위협은 단지 중공군의 전투력 분산시키는 한 요소였다면

3차 공세에서는 전장의 불확실성을 증폭시켜 그들의 전반적인 작전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ㅡ 중공군의 전투력이 3차 공세이후 급격히 저하됐음에도 워싱턴과 유럽에서는 휴전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일본 방위전력까지 모두 소진되거나, 유럽방어선의 전력공백을 우려했기 떄문이다.

 

ㅡ 리지웨이 장군은 적이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력 복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위력수색을 실시하고, 이러한 성공은 철군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ㅡ 4차 공세 1단계 작전에서 중공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증파된 19병단, 3병단과 전투력 복원중인 9병단이 38선 부근에 전개를 완료할 때까지

유엔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병력과 장비를 2선으로 배치하는 기동방어로 전환했다.

이에 팽덕회는 병력은 전경후중, 화력은 전중후경의 원칙으로 배치하였다.

 

ㅡ 리지웨이의 제한목표 공격지침과 유엔군의 상륙위협은 중공 지도부의 전략도 수정케 했다.

4차 공세이전까지만해도 연속적인 승리로 모택동은 한반도에서 미군을 충분히 축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4차 공세의 결과 중공군은 전투력이 소진되어 주도권을 유엔군에게 넘겨주고 작전형태를

기동방어로 전환하게 되자, 모택동은 전략을 바꿔, 625전쟁의 양상은 장기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중공군의 참전목적을 현대화로 수정하고, '윤번제 순환참전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ㅡ  5차 공세 시작무렵, 서방세계에서는 휴전의 논의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유엔군의 전투행동은 전술적으로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유엔군의 소극적인 전투행동은 중공군으로 하여금 유엔군이 무엇인가 다른 행동

(대대작전 반격작전, 상륙 혹은 공정 등)을 준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ㅇ결론

 

중공군의 병참선을 지향하는 유엔군의 상륙위협과 중공군의 유색역량을 소멸시키는 유엔군의 강력한 화력은 전장의 불확실성을 증폭시켜 중공군의 작전술을 '운동전'에서 '지구전과 적극적 방어'로, 중공 지도부의 전략을 '한반도에서 유엔군 축출'에서 '충분한 준비를 통해 평화회담을 쟁취'로 수정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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