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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45.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by leeesssong 2020. 4. 22.

한줄평 - 과거 전쟁사를 통해 전략, 경영, 리더십에 대해 주로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읽다보면 현재 우리네 모습과 크게 다를바 없는 과거 사례들... 씁쓸하다


ㅇ 서문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사고가 뛰어난 사람, 실행이 뛰어난 사람, 체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 영웅이 되었다.

 

카이사르, 이순신 명장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들이 불혹을 넘긴 나이에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있었던 이유는 충실한 이론에 더해

수많은 실전을 통해 이론들을 직접 체득해 40대가 되서야 실력을 발휘할 조건 갖추었기 때문이다.

30대는 물론 40대도 아직 치열하게 싸워야 때다.


ㅇ본문

 

Strategy 1. 먼저 생각을 바꿔라

 

#1. 마라톤 전투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전제군주 vs 부패한 시민사회

페르시아 전쟁 내내 아테네가 보여준 민주주의와 시민정신이란 부패하고 야비한 협잡과 선동 정치이며

치졸한 지역주의와 집단이기주의의 결합일 뿐이었다.

오죽하면 그리스인들조차 적국인 페르시아 황제의 공정함과 도량에 매료되고 그들을 지도자의 표상으로 추앙했을까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은 페르시아의 황제 키루스를 지도자의 모범으로 찬양함)

 

"황제인 나도 모든 아들과 사위, 친척이 참전하고 있다" - 크세르크세스

라고 말하며 5명의 아들중 장남만 남겨달라는 부하의 부탁에 장남을 반토막 내서 양쪽에 놔뒀다고 한다.

페르시아 황제들의 엄정함과 놉늘리스 오블리주는 이정도였다.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 밀티아데스 인기가 높아지자

모함을 받아 재산을 몰수당하고 쫓겨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2 페르시아 전쟁에서 살라미스로 끌어내 전멸시킨 테미스토클레스 전쟁이 끝나자마자

시민들에게 배신당해 페르시아로 명명했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나보다 잘난 사람은 절대 용납할 없다 이것이 그리스 시민정신의 본질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페르시아의 장점이자 단점은 다양성이었다.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적절한 대처능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높았으나

보유한 자원을 적에 따라 적절하게 조합해서 특성화하는 시스템은 없었다.


#2. 별무반의 여진정벌

고려군은 훈련을 통해 병사들의 실력을 키우는 동시에 소속부대에 대한 일체감과 자긍심을 불어넣었다.

또한 지휘관과 지배층의 솔선수범도 한몫했다. 관료 자제들도 예외없이 철저하게 징집했다.

마지막으로 별무반 활약의 숨은 비결은 바로 신분제를 파괴하고 능력본위로 등용한다는 원칙이었다.

(명의 척계광만해도 시골 향리집안 출신이었으나 최고의 장군까지 승진했다.)

 

여진정벌이 곤경에 빠진 결정적 이유는 함북 지역의 지형을 잘못 파악한 탓이었다.


#3. 무적함대

15세기 후반에 시작된 대항해시대의 선구자는 포르투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개척한 주요항구에서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동남아시아의 향료 무역을 선점했다.

펠리페 2세는 포르투칼을 합병함으로써 식민지와 , 항해기술을 손에 넣었다.

펠리페 2세의 통치기에 스페인은 네덜란드를 식민지화하고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걸쳐있던 마야잉카제국을 정복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신의 축복을 받은 함대) 영국해군을 박살내려는게 아니라,

최강의 파르마 부대를 영국에 상륙시키고자 했다.

 

돛으로 항해하는 갈레온선이 갤리선을 대체하고, 대포까지 발달하는 시기에 맞춰 상대편 배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에서 갈레온선이 거리를 두고 포격전으로 새로운 해양전술이 태동했다.

 

지휘관의 진정한 능력은 옳은 지적을 하는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피곤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부하들이 명령과 지시를 받들도록 하는 것이 지휘관의 진짜 능력이다.

 

아르마다는 전략적 구조, 방향, 목적, 함대의 건조와 운영분야에는 준비가 올바르고 철저했으나

전술적 준비와 중간 보급기지, 병참 실전분야에서 구멍투성이었다.


#4. 7 전쟁

ㅡ 1756 유럽의 모든 강국이 프로이센을 향해 덤벼들었고, 오늘날 독일의 일부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이

유럽의 강국을 상대로 싸우는 유례없는 투쟁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7 전쟁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군주론을 비난하는 마키아벨리론을 저술하며

'왕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절대군주가 아니라 국민의 노복이 되어야한다' 계몽전제군주론을 언급했다.

 

로이텐에서 오스트리아군과의 결전에서 프로이센의 비밀병기는 횡대에서 종대로의 전환이었다.

여러 횡대로 구성된 대형이 행진하면서 분해결합하는 방식은 고난도 전술이다.

오늘날 제식훈련에서 열과 오를 맞추고 간격을 유지하는 것은 바둑판처럼 가로세로의 줄이 맞는 직선의 미학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중장보병 전투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훗날 어느 대위가 프리드리히 2세에게 '폐하처럼 훌륭한 전략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라고 물으니

왕은 전쟁사를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했다. 나중에 나폴레옹도, 몽고메리 원수의 대답도 동일했다.

대위는 자신은 그런 이론보다는 실전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우리부대에 전투를 60회나 치른 노새가 2마리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노새다"

 

경험은 교리를 외우는 행위와 다를게 없다.

프리드리히 2세가 전쟁사를 추천한 이유는 전술의 역사에 숨어있는 원칙과 전제를 찾으라는 의미였다.

그래야 경험을 분석하고, 창조적으로 적용할 수 있기에!

 

프리드리히 2세는 베를린에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독일 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하지만 과정에서 그는 완전한 독재자로 변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젊은날에 비판했던

마키아벨리즘의 가장 완벽한 구현자가 되었다.


#5. 솜전투

이때까지도 장교문화에는 귀족사회의 풍습이 남아있어

장교들은 무기를 착용하기보다는 지휘봉 드는것을 선호했다.

상당수 장교들은 품위와 지휘봉으로 우아한 전투를 이끌어낼 있다는 구시대적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개틀링이 기관총을 개발한 이유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서 전쟁을 빨리 끝냄으로써 인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라고 한다.

 

영국군 지휘부는 탄막포격에 엄청난 기대를 걸었으나 실패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엄청난 양의 불발탄이었다.

둘째로 포탄 선정도 잘못되었다. 금속구슬을 날리는 유산탄은 대피호를 파괴하는데는 쓸모가 없었다.

또한 부실한 고폭탄으로 벙커를 부수려면 집요하고 지속적인 타격이 필요했으나 포격의 밀도는 상당히 낮았다.

마지막으로 기술, 경험, 훈련 부족도 화근이 되었다.

 

아무리 좋은생각, 당연하게 느껴지는 논리라도 현장에서 확인하고

실험과 검증을 통해 실용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정확한 실험을 통해서 판단하고, 실험으로 판단하려는 자세가

인류역사에 자리잡은지 100년도 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타라와, 이오지마에서 미군은 섬을 통째로 날려버릴듯한 기세로 포격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3~5 이상의 포격을 했어야 했다는 결론을 얻기도 했다.


#6. 크라곤자 전투

롬멜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그의 전술이 천재의 작품, 일종의 예술적 경지의 전술이므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하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의 전술은 원칙과 정형이 없고 너무 즉흥적이어서 위험하며

군수와 보급을 무시하고, 전술 교리와 상식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기존 전통과 교리를 외우고 맹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을때,

끊임없이 현상을 분석하고 연구했다는 , 롬멜은 한번의 경험도 소홀히 넘기는 법이 없었다.

적의 진지를 향해 돌격할때도 거리, 지형, 방어상태, 직군의 훈련 상황에 따라

어느정도 희생이 나는지를 관측하고 연구했다.

그래서 막상 자신의 중대를 돌격시켜야할때면 기관총 엄호만으로 충분한지,

포병의 지원사격이 있어야하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했다.

 

롬멜은 병사들이 이정도 거리를 행군하면 어느정도 지치고,

어느정도로 싸울수 있다는 데이터를 정확히 뽑아내 전략과 전술을 세웠다.

 

그의 전술이 원칙과 상식을 무시한다거나 운이 좋았다고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 롬멜은 이렇게 말한다.

"경직된 조직문화, 관행과 습관에 권위를 부여하는 사람, 새로운것에 두려움과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과거의 교리에 얽메여 있는 사람, 자신을 한계 이상으로 몰아붙이고 도전과 새로운 것을 성취하는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비참한 실패를 맛볼 것이다."


Strategy2. 변화를 이룰때까지 계속 도전하라

 

#7. 스팍테리아 전투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오랜세월동안 중장보병 중심의 스포츠같은 전투방식을 고수한 이유는

약점을 몰라서가 아니라, 값비싼 전투장비를 자력으로 장만해야 하므로 부유한 중산시민층만이 활약할 있었고,

중장보병이 되어야 참정권과 투표권을 얻을 있었다.

이처럼 중장보병 자체가 신분적 권위와 직결되다보니 그들은 전쟁에서도

우월한 신분의 특권과 품위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싸우기를 원했다.

 

몽고메리는 <전쟁의역사>에서 그리스에서 중장보병 전술이 발달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라고 꼬집었다.

그리스는 산이 많고 평야가 드문 곳이어서 중장보병보다 경보병이 훨씬 적합하고 쓸모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인에게 전쟁에서 전투의 효율성보다 시민층의 특권이 먼저였다.


#8. 십자군 전쟁

공성기술이 발달하면, 축성기술도 한계를 뛰어넘는다.

 

축성의 기본원리는 크게 3가지이다.

첫째, 침략자가 공성작업을 수행하거나 공성구를 있는 공간을 주지 않는다.

둘째, 성벽의 굴곡과 돌출한 탑을 통해 어느 지점에서든 침략자를 십자포화나 이중삼중 화망속에 가둬야 한다.

셋쨰, 탑과 성벽을 여러겹으로 배치해 적이 어느 지점을 돌파해 들어오더라도 이차, 삼차 방어선의 구축

 

십자군은 1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세운 예루살렘 공국을 중심으로

지금의 지중해 해안가를 따라 여러 개의 영주국가를 세웠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단결력이 떨어졌고, 수십배가 넘는 아랍 민족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또한 대부분 직업군인이 아니었고, 유럽 각국의 지원병으로 구성된데다 병력 이동도 심해

체계적인 훈련과 조직관리가 불가능했다.

병력을 보호하고 부족한 조직력을 커버하기 위해 그들은 요새전을 택했다.

 

대포의 등장으로 성이 쇠퇴하기는커녕 포탄을 미끄러뜨리고 타격력을 분산하기 위해 성벽에 곡선이 도입되었다.

성벽을 사선으로 누이고, 낮추는 대신 두껍게 만들었다.

이처럼벽의 형태를 바꾸다보니 돌이나 벽돌 건축으로는 원하는 구조를 만들어낼 수 없었기에

시멘트와 콘크리트 공법이 등장하게 된다.

 

대포와 컨크리트 건축은 엄청난 비용을 요했기에 영주와 기사 수준의 재력으로는 성을 쌓을수도 전쟁을 수행할수도 없었고, 이것이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국가를 탄생시키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지 모른다.


#10. 진포해전

자동차가 아니라, 자동차가 바꿀 세상을 보라

 

새로운 것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것은 발명만큼 중요하다.

서양인들은 화약을 보자마자 대포와 총을 만들어낸 반면, 중국인들은 화약을 군사적으로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화기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최무선 뿐이었던 것이다.


#11. 나폴레옹 전쟁

통조림 발명의 최대공로자는 나폴레옹이다.

 

프랑스군은 행군의 부담을 줄이고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텐트도 휴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에게 텐트보다 중요한 장비는 냄비였다. 어떤 식료품도 스튜로 만들거나 삶아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맛있는 음식, 소소한 간식이 병사들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극한 상황일수록 인간은 기초적 욕구에 대한 집착이 커진다. 그리고 기초적 욕망의 해결이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사기를 진작하며 전투의 목적과 사명을 재정비할 계기를 마련해준다.

차가운 고지에서 인간다움을 느낄 있는 소재는 따뜻한 식사뿐이다.

새벽 미명에 일어나 공격선으로 이동하는 병사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것이 한잔의 커피다.

어느 전투에서 커피를 준다는 말에 아무도 하지 않으려 했던 수색정찰에 전원이 지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투는 작은 차이가 승부를 가른다.

그래서 사기, 인간다움과 생명의 가치를 회고할 있는 작은 순간들이 소중해진다.


#12. 남북전쟁

남북전쟁은 오랫동안 공식이 되었던 밀집대형을 버리지 못해서 인명피해가 컸다.

 

남북전쟁 직전 미국과 유럽의 사관학교와 군대에서는 한결같이 나폴레옹을 신봉했다.

핵심은 대형유지였다. 총과 대포의 살상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최종승부는 백병전으로 결정되었다.

백병전은 집단전투이므로 대형유지가 필수였다.

 

밀집대형에서 산개대형으로의 전환은 깨달음이나 훈련만으로도 안되었던 것이다.

그들을 싸우게 하려면 전우애가 필요했고, 장교와 병사의 관계도 신분제 사회의 연장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공유하는 막역한 사이가 되어야 했다. 외에도 많은 것이 필요했다.


Strategy3. 실패를 거울 삼아라

 

#13. 절령전투

전쟁에서는 전사자보다 병사자가 훨씬 많이 나왔다.

장비와 보급이 열악하고 항생제가 없어 추위와 피로로 인한 감기와 폐렴에 속수무책이었다.

 

'장거리를 이동한 적군을 과감하게 공격하면 승리할수 있다' 명제나 외워서는 제대로된 리더가 없다.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적군의 이동거리, 기후, 훈련상태, 보급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해서

그들이 현재 어느정도로 지쳤고 전투력은 얼마나 감소했는지 판단하는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뻔한 교훈을 외우고 남발하는 것이 지식의 목적이자 전부인줄 아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14.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수도로 했던 비잔틴 제국은 610년에서 1453년까지

1000 가까이 생존한 진정한 천년왕국이었다. 일등공신은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이라고 불린 성벽이었다.

성벽길이 22.5km, 성벽의 앞에는 항상 물이 차있는 18m 커다란 해자, 성벽은 대단히 두꺼웠고

기단은 계단형의 2 구조로 되어있었다.

 

파상공세로 공격하는 오스만투르크의 침공을 막아내던 수성전문가이자 최고의 공로자인 주스티아노가 부상을 입고,

마음약해진 황제는 그를 제노바 함선으로 후송해주었고, 모습을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부와 편안함의 유혹에 빠지면 전쟁이나 경쟁과 같이 험하고 피곤한 작업에서

절대 승리할 없다는 것이 역사가 알려주는 진리다.

편안함과 풍족함을 포기하고 고통을 벗해 즐길줄 아는 자세가 결여되면, 결국 돌이킬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15. 이탕개의

여진족의 기습전술에 대응하기 위해 46진은 관할구역안에 여러개의 작은 진과 보루를 설치해

중간기지 초소로 삼았다. 소진과 보루에는 60~150명이 배치되었다.

일반화살 2 3603, 편전 2 6941 5 544발의 화살과 282개를 구비했다.

유사시 활은 432(150+282)이다. 따라서 1개당 쏠수 있는 화살은 117발이다.

1분에 5발을 쏜다고 할때 1시간이면 떨어지는 양이다.

그러므로 적의 기습을 받았을때 보루가 버틸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불과하므로 구원군이 와야한다.

 

일벌백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는 억울한 면이 있겠지만 전체를 배려해야한다고 말한다.

조직이 정당하고 공정하게 운영되며 구성원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다면 일벌백계가 필요없다.

합리적인 규정에 의거한 처벌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16. 광성보 전투

강화도 해안선 전체를 둘러 50개가 넘는 돈대를 설치했다.

 

어재연 휘하 600명의 병사들은 미군이 조준선에 들어오자 광성보의 포수가 발포했고,

양쪽에서 발사된 포탄이 하늘을 새까맣게 덮었다.

엄청난 수의 포탄 가운데 명중은 고사하고, 근처에 떨어지거나

심지어 물보라라도 배에 튀기는 포탄이 하나도 없었다.

 

광성보는 설계와 위치 선정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또한 조선군의 포는 포신을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장치가 없어서 조준선 변경이 불가능했다.

포진지는 견고하고 튼튼했으며 지붕도 갖춘 유개진지에 포구는 겨우 포탄 한발이 통과할 정도로 좁았다.

포가 완벽하게 고정된 바람에 조준을 변경할 없었다.

 

관료주의와 경직된 행정체계, 세계가 어떻게 바뀌든 오직 우리의 관점과 기준으로

전쟁에 대비하려는 태도가 문제였다.


#17. 과달카날 전투

해병대는 전투경험이 전혀없는 반면,

일본군은 1930년대부터 중국에서 남태평양까지 지구의 한단면을 종단하며 싸워왔다.

미군은 섬의 지형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정글로 도주한 일본군은 미군진지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사령부로 보내주었다.

 

일본군은 자신감이 넘쳤고 돌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철조망과 맹렬한 기관총 세례였다.

미군에게는 상황이 마치 움직이는 목표물을 쏘아 맞추는 사격연습장 같았다.

 

일본군은 준비성이 투철하고 정밀한 집단이다.

그탓에 일본군의 부대별 배치와 포진, 작전명령이 너무 교모하고 복잡했다.

작전이 복잡하다보니 현장에서는 뭔가가 어긋나고 부대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반면 그들은 협력공격이 안되는 약점을 상쇄하려는 듯이 무모할 정도로 정면돌격을 선호했다.

 

준비는 철저하게 전투는 맹렬하게! 옳은 같지만 사실은 반대가 되어야 한다.

계획은 명료하게, 현장에서는 융통성을 최대한 발휘해야 싸움에 이긴다.


Strategy 4. 멀리가려면 함께가라

 

#18. 크레시 전투

크레시전투는 오직 수비로만, 그리고 거의 궁수에 의해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는 점에서 아주 드문 사례다.

기사와 궁수의 격돌이라는 점에서 중세 1000년을 지켜온 고귀한 기사집단과

언제나 그들의 하인이거나 보조병이었던 평민 출신 궁수가 동등하게 맞붙었다.

시대의 종언과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직업군인으로 편성된 영국군은 충분한 훈련을 받았고, 조직력과 협력전술을 보여주었다.

전투 내내 전열을 흐트러뜨리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반면 프랑스군은 용감하기는 했지만 잡다한 부대의 연합체로, 조직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19. 을묘왜변

오랫동안 을묘왜변은 조선의 군제가 해이해진 탓에 발생한 참변으로 해석되었다.

군사들은 부실해지고, 군역 대상자들은 힘든 군역을 피해 다른 사람을 사서 대신 보냈다.

조선군의 전투력이 이처럼 약화되어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임에도

방어시스템이 신속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진짜 패배의 원인은 조선의 전략이 완전히 노출된데 있었다.

 

현장의 목소리를 도외시한채, 중앙의 관료들이 지도와 정치논리, 모양새만으로 전략을 구상했다.

 

을묘왜변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조선의 국방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과 점검을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성문에 걸린 종은 사태를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갔다.

왕실의 불교우대 정책 때문에 을묘왜변이 발생했다는 이상한 결론이 도출되면서

을묘왜변에 대한 반성과 대책마저 산으로 가버렸다.

 

조선이 한참 활기차게 돌아가던 시절에는 고관이 되려면 실무직과 수령, 변방의 임무를 모두 역임해야했다.

그들은 현장 사정을 알았고 소통에도 신경을 썼으나 16세기가 되면서 엘리트 관리들은 편한 곳만 찾아다니고,

정작 현장과는 멀어졌다.

그러면서도 소위 중앙의 황금보직만 거친 덕에 자신들이 고급정보와 지식을 독점하고

모든것을 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과가 이런 상황 판단을 낳았고 국가를 위험으로 몰고갔다.


#20. 게티즈버그 전투

남북전쟁은 최후의 근대전이자 최초의 현대전으로 일컬어진다.

기관총, 철갑선, 잠수함 등쟁했고, 나폴레옹식 전쟁이 종말을 맞았다.

철도를 이용해 병력을 이동시킨 최초의 전쟁이기도 하다.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북군의 공격, 남군의 수비라는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남군은 우세한 북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막아낸 정도가 아니라 대승을 거두었지만 근본적인 힘의 차이는 절대적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장군은 미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 최고의 명장, 사관생도에게 가장 인기있는 장군이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비판받는 부분은 '너무 대단한 인격자'라는 점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친 적도 없고, 명령을 내릴때도 정중하고 신사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21. 노르망디 상륙작전


Strategy 5. 명장의 리더십을 배워라

 

#22. 갈리아 전쟁

갈리아인들은 매년 반란을 일으켰지만 카이사르에게 번번이 패했고 저항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도 징후를 느꼈고, 갈리아를 정말로 평정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갈리아인들의 마음속에 로마군의 힘을 인정하고 복종하려는 생각이 깃들기 시작하자,

동시에 전통적인 방식을 버리고 로마의 방법과 장점을 배워서 로마와 싸우자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벤치마킹의 힘은 의외로 강하다. 아무리 후진적이고 겉모습이 지지부진해보이는 사회에도 천재들이 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선각자에게는 2가지 고통이 따른다. 우선 자신의 깨달음을 공감시키기가 어렵다.

설득이 안되니 강경수단을 쓸수밖에 없다. 벤치마킹도 속성으로 되는것이 있고, 숙성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있다.

 

베르킨토릭스는 천재이자 선구적 지도자였다. 그는 나은 방법을 구상하고 시도했지만,

그가 속한 사회와 문명이 이해하고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불행이다.

리더의 역량과 자각이 아무리 뛰어나도 조직의 수준을 넘어설 수는 없다.

 

벤치마킹에서 진정으로 따라하기 어려운 것이 사고와 관습, 가치관의 훈련이다.

그러므로 교육을 통해 구성원들을 자각시켜야 한다.


#23. 임진왜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벌어지는 치졸한 정치싸움과 엄청난 대가에 대해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몰아내고 함경도를 탈환한 정문부도 역모에 휘말려 살해되었다.

위병장으로 최고의 공을 세운 곽재우는 아예 관직에 나오지도 않고 은거했다.

역시 의병장이었던 김덕령도 모함을 당해 죽었다.

숙종 무렵부터 당파싸움이 점점 치열해지더니 대규모 숙청과 정적에 대한 살해까지 나타났다.

 

정쟁이 치열해지는만큼 관리 등용과 인사행정에서는 혈연과 지연, 학연이 더욱 중시되기 시작했다.


#24. 미드웨이 해전

진주만 공습의 전과는 대단했지만 전략적 관점에서 목표였던 항공모함이 마치 기동훈련차 항구를 떠나 있어서

한척도 격침하지 못했다. 또한 일본군 비행단의 장교들은 항모격침을 위해 3 출격을 요청했으나

사령관 나구모 제독이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공격을 중단시켰다.

 

일본군은 승리에 도취했고, 승자의 자만감에 빠졌다.

더욱 황당한 것은 다음 단계의 전략이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치밀하기로 유명한 일본군의 전통을 감안할때 이해하기 힘들지만,

사실이었고 장기 계획의 부재 육군과 해군의 충돌을 낳았다.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에서도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는 분명 필요하지만,

전투를 복잡하게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일본군은 결과가 명확하지 않거나 모호하고 불확실한 부분이 있는 계획서나 보고서는 제출할 수가 없었다.

여러가지 변수와 불확실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겉보기에 완벽한 계획으로 작성하려니 괜히 복잡해지는 것이다.

예측가능한 변수에 대해 언제든 열린 마음을 가지고 대처할 알아야 진정한 리더가 있다.


#25. 지평리 전투

ㅡ <위워 솔져스> 모델이 무어는 프리먼 대령의 리더십을 이렇게 요약한다

'강인한 정신력, 뛰어난 판단력, 부하를 존중하는 태도'

또한 무어는 프리먼이 괜히 화를 내거나 쓸데없는 명령을 내린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부대원 모두가 연대장이 진심으로 자신들을 아끼며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믿었다고 말했다.

 

리더십과 관련해서 프리먼과 알몬드의 사례는 상대를 존중하고 신뢰를 얻는 리더십의 권위와

자기만족에 빠진 리더십이 얼마나 위험하고 맹목이 될수 있는가를 극명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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