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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13.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사>

by leeesssong 2020. 2. 10.

 

 

한줄평 -


ㅇ서문

 

ㅡ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의 산악지형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비슷한 형태의 산악 게릴라전을,

북한의 도시지역에서는 이라크 전쟁과 같은 시가전이 진행될 것이다.


ㅇ본문

 

ㅡ1979년 소련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석유가 묻힌 미국의 최대 전략 자원인 중동지역까지 밀려 내려올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소련 역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당시 소련의 일부였던 중앙아시아 지역 무슬림을 자극해 소련 연방분열을 사주할 것이라 우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기원을 알 수 없는 우려와 시기심, 공포는 소련으로 하여금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 개입이란 사태를 일으키게 하였다.

 

ㅡ1978년 소련의 KGB의 공작활동으로 인한 아프가니스탄 내의 사회주의 쿠데타가 발생한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의 물결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소련은 이를 막지 못하면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대한 지배권 상실을 넘어 소련의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혁명이 확산되어 소련연방 해체라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ㅡ소련의 침공에 파키스탄 정부는 패닉에 빠지고 머리위의 소련군과 발 밑 인도의 핵무장에 대응해 핵 개발을 시작한다.

이로 인해 파키스탄은 미국과 국제의 제제를 받게 되다가, 추후 미군이 탈레반과 알카에다를 제거하기 위해 파키스탄의 협조를 구하며 다시 지원을 받게 되는 애매한 상황이 발생한다.

ㅡ무자헤딘은 이슬람을 위협하는 이들과 싸우는 성전(지하드)에 임하는 전사란 의미다. 

즉 성전에 임하는 전사들이란 의미이다.

현재 서방에서 무자헤딘이란 명칭은 이슬람 테러를 상기시키지만 1980년대 무자헤딘은 소련 공산주의 침략자들과 싸우는 용감한 투사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 뉴욕과 워싱턴 등지에서는 '무자헤딘에게 원조를'이란 플랜카드가 선을 보이고 모금도 하였다.

 

ㅡ무자헤딘은 구형인 리엔필드 소총을 주력으로 사용했지만, 사냥으로 인해 숙련도가 높았고 AK-47/74보다 먼거리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ㅡ공격방식은 교과서에 적힌 그대로 RPG-7로 소련군 전차의 최선두와 후미를 공격한다.

그 후 판자시르 계곡 양 기슭에 숨어있던 주력 병력이 소련군을 난타하였다.

마수드의 병사들은 소련군에게서 노획한 7.62mm PKM 경기관총, 리엔필드 소총을 사용해 600m 밖에서 정밀공격을 수행하였다.

 

ㅡ소련과 마수드 피해가 엄청났지만 결국 소련의 6차 공세가 실패하면서 마수드는 '판자시르의 사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이 함께 하였다.

 

ㅡCIA는 RPG-7과 AK-47소총, 리엔필드소총, Dshk중기관총 등을 무자헤딘에게 제공하며 지원했다.


ㅡ1984년

소련은 초토화작전을 개시하며 융단폭격을 실시하고 스페츠나츠의 투입과 더불어 KGB의 방해공작으로 무자헤딘의 저항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에 CIA는 파키스탄 정보부와 협력해 무자헤딘에게 IED 제조법과 각종 사보타지 전술, 소련의 지휘체계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법 등의 효과적인 테러전술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ㅡ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이슬람의 맹주를 자처하던 사우디아라비아를 크게 자극했다.

무신론자 공산주의자들이 무슬렘 형제국가를 침략한 것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이 점령되면 그 다음은 걸프지역이 될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으로 날아간 수많은 사우디인 중에는 오사마 빈라덴이란 젊은이도 있었다.

 

ㅡ빈라덴은 무자헤딘의 모집과 지원에 관여하였고 사자굴 전투는 빈라덴과 아랍 전사들이 용감히 전투를 수행한것으로 과대 포장되어 아랍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ㅡ1986년

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에 건설된 게릴라 훈련시설에서 양성된 정예 무자헤딘 병력이 투입되기 시작한다.

 

ㅡ1988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시작했다.

빈라덴은 다음 지하드를 위해 유명한 '알 카에다(기반이란 뜻)'를 창설하고 급전적 투쟁 노선을 정한다.

알카에다는 사우디군과 미군 시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기 시작한다.

 

ㅡ탈레반(학생 혹은 지식의 추구자란 뜻)은 아프가니스탄 최대 민족인 파슈툰족, 이슬람 신앙, 파키스탄의 지원이 만들어낸 복합적 산물이다. 이들은 무자헤딘 투쟁에 참가하였고, 긴 전쟁기간 동안 조직화되고 강력한 군사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탈레반은 점차 아프간 농촌지역을 장악하였고 내부적으로 이슬람 원형으로 돌아가자는 데오반디즘을 주장하며 점차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ㅡ1992년

북부지역 도스튬과 마수드는 카불 요충지를 장악하고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다른 군벌들은 이를 인정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곧 마수드와의 기나긴 진흙탕 싸움이 시작된다.

 

ㅡ1994년

아프가니스탄은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고, 결국 파키스탄 정부는 탈레반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카불 함락을 목전에 두게 된다.  지속적인 테러로 인해 국제적인 제재를 받으며 쫓기던 빈라덴은 아프간에서 탈레반 오마르에게 충성을 하고, '위기에 몰린 상태로 내 집에 온 손님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낸다'는 아프간 민족의 전통으로 둘은 가까워지게 된다.


ㅡ2001년

9.11테러 이틀전 마수드는 폭탄테러로 암살당하면서 탈라벤에게 항전하고 있떤 최대의 적은 사라진다.

9.11테러가 일어난지 8일 뒤 CIA 공작팀(조브레이커)가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다.

 

ㅡ특수전 부대를 아프간 지역까지 나르기 위해서는 주변국에 대형 거점 공항이 필요하였고, 전문 구조부대, 공중급유를 수행할 전문 항공부대도 필요했다.

 

ㅡ미 국방부는 아프간에 대한 지상전을 계획하고 있었음에도 아프간 지도가 없었다. 누구도 듣도보도 못한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고, 전술지도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ㅡ미군은 그 자리에 가장 경험이 많은 자가 책임자로서 지휘하면 손이 비는 이들이 모두 협력하는 임무지향적 수평 지휘구조였다. 이로 인해 특수전 장교와 부사관들은 실무를 책임지는 수송부대 병장들에게 핀잔을 듣기 일쑤였지만 그들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ㅡ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전투기가 아프간 지역을 폭격하기 위해서는 무려 5회의 공중급유가 필요했고 그럼에도 아프간 상공에서 겨우 20분정도만 머물수 있었다.

이에 반해 냉전 끝나는 시기에 개발이 완료되면서 작은 국지전에 사용되기에는 너무 크고 비싸며 비효율적이었고, 예산감축 압력에 시달리던 미운오리새끼로 전락하던 전략폭격기(B-1, B-2, B-52)들은 전투기가 도달하지 못하는 지역,

즉 이란과 아프간 지역의 작전수행에 유일하게 가능한 자원이 된다.

 

ㅡ2001년 10월

북부동맹 도스튬 장군과 접촉할 선발 파견대원들을 수송하며 첫번째 특수전 임무가 시작된다.

(이하 내용은 영화 '12솔져스'에서 잘 표현되어 있음)

 

ㅡ알카에다의 군사령관 아테프는 MQ-1 프레데터 무인정찰기에서 발사된 헬파이어 미사일에 사망하였다.

 

ㅡ탈레반은 과거와 같은 전면적인 전투를 버리고 게릴라 전투를 통해 끊임없는 희생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ㅡ2001년 12월7일

탈레반은 공식 항복했지만 이것이 전투의 끝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탈레반과 미군-아프간 연합군 사이의 지긋지긋한 게릴라전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ㅡ네오콘 미국 정치 수뇌부들은 미 특수전 병력과 강력한 공중전력만으로 당시 아프간을 지배하고 있던 탈레반을 타도할수 있음에 감명을 받고, 소수 병력만으로 얼마든지 빈 라덴 체포가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잘못된 과신은 또 다른 잘못된 결과를 불러왔다.

 

ㅡ충분한 지상군 병력 투입이 없는 작전은 전후처리 단계에서 끔찍한 결과를 불러온다.

 

ㅡ2002년 3월 1일

아나콘다 작전은 아프가니스탄 샤히코트 계곡에 숨어있는 탈레반과 알카에다 잔존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탈레반이 사라지자 아프간은 다시 혼란의 상태에 빠졌으며 군벌 사이의 갈등도 깊어져갔다.

미국은 3,5특전단, 10산악사단, 101공수사단을 동원하였고 미군을 도와 아프간 안정화작전에 ISAF(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 국제 안보지원군)이 함께했다.

 

ㅡ84mm 칼 구스타프 무반동총은 적의 사거리 밖에서 적을 유린할 수 있었고, 미군의 요청에 따라 16년 미군 제식화기가 된다.

 

ㅡ역전의 용사 탈레반은 결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였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구소련을 상대로 수많은 실전을 경험한 이들이 많았고, 그들은 경험에 따라 조준에 필요한 정확한 거리를 측정하고자 일정한 간격으로 돌을 쌓아놓기도 하였다.

또한 미군과 ISAF의 특성, 즉 아군이 추락하거나 고립되어 있으면 반드시 빠른 시간안에 구하러 온다는 점을 악용해

매복작전을 실시하고, 숙련된 RPG7사수는 헬기 착륙지점에 매복하여 공격을 하게 된다.

 

ㅡ탈레반과 알카에다가 많이 전사하였고 노획한 자료도 많기에 성공한 작전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사실 이들은 계곡으로 도망간 것이 아니라 대규모 함정을 파고 미군과 아프간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ㅡ미국은 91년 걸프전을 겪으면서 대규모 기갑장비의 운송이 얼마나 곤란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낀바 있었다. 당시 1개 기갑사단 운송비만 5억 달러에 달했고, 시간 또한 최소 2개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미육군은 전쟁 가능성이 높은 중동이나 한반도 주벼지역에 사전배치물자(APS; Army Prepositioned Stock)로 호칭되는 대규모 비축물자 기지를 건설하였다.

대한민국에도 경상북도 00지역에 미국의 사전배치물자 기지가 있으며, 일본에 배치된 사전배치물자도 빠른 시기 안에 광양항과 부산항을 통해 상륙하도록 준비되어 있다.


ㅡ2003년 3월 19일 이라크 자유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이 시작되었다.

이라크 국민들에게 자유를 선물한다는 것과 WMD가 테러리스트에게 유출되는 일을 차단하는 것이 목표였다. 미국이 최초로 사용한 전술은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였다. 이는 토마호크과 같은 순항미사일을 표적 3m 이내로 명중시키며 동시다발적으로 적의 지휘, 통신체계, 중요 군사기지를 타격하여 이라크군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렸다.

 

ㅡ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이라크군은 PRG2, 7, 57mm 무반동총 등 총동원해 사격했지만 어느것도 미군 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고 한다.

 

ㅡ이라크 자유작전이 끝난 이후에야 이라크 게릴라는 대처방법을 알아낸다. 미군 전차를 한번에 완파시킨 것인데,

이는 2개의 대형 대전차지뢰를 위아래로 겹쳐서 묻는 방법이었고 이는 이라크의 IED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ㅡ43일간에 걸친 이라크 자유작전에서 미국과 영국은 주요 도시를 점거하고 바그다드 시가로 진군해 후세인 동상을 무너뜨린다.


ㅡ미군은 얻은 큰 교훈은 시가전에 민간인들이 휘말리면 매우 골치아픈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고 민간인을 다른지역으로 소개하고 전투를 진행하였다.

 

ㅡ게릴라들은 무기를 미리 공격위치에 숨겨놓고 공격을 쏟아부은후 탄약이 떨어지면 재빨리 무기를 버리고 탈출하였다.

반면에 무거운 방탄에 군장까지 멘 미 해병대는 따라잡을수가 없었고 엄격한 미국의 사격원칙에 따라 저격수가 적의 사격을 관측하지 못했다면 빈손의 적이라도 함부로 사살할 수가 없었다.

 

ㅡ마약까지 동원해 공포를 잊은채 달려들었고 5.56mm 4발을 맞고도 벽을타고 도망가는 이들까지 있었다.

이로인해 적의 가슴에 확실히 2발 이상을 사격하는 특수전 부대의 제압기술이 일반화 되었고

무엇보다 7.62mm 탄은 한방으로 확실히 적을 무력화시켰다.

 

ㅡ2004년 본격적으로 아프간 영토로 복귀한 탈레반은 06년까지 도시지역을 점령한 ISAF 병력을 상대로 격렬한 기습과 시가전을 반복하였다. 대량의 IED 를 매설함과 동시에 장거리 매복을 중시하였다.

이들은 리엔필드, PKM 경기관총, DShK 12.7mm 중기관총 을 적극 동원해 미군 소화기 사거리 밖에서 집중사격을 실시한 이후 도망가는 히트앤런을 반복하며 피해를 강요하였다.

 

ㅡ지정사수(Desgnated Markman)은 일반사병중 사격솜씨가 우수한 자를 선발해 단기적인 저격교육을 시킨 후에 저격에 적합한 총기를 지급하는, 일종의 대량 양산형 저격수이다. 교전간 지정사수는 저격수의 역할을 수행하며 지휘관, 중화기 운용자를 사살하여 탈라벤의 공격을 마비시켰다.

 

ㅡ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우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미군의 불뮨률이었다.

우수한 군대는 퇴각 순간을 알게 된다고 한다.

 

ㅡ미군을 향해 돌진하는 게릴라 차량을 멈추게 한것은 결국 7.62mm 사용하는 M240 경기관총이나 12.7mm M2 중기관총이었다.

 

ㅡ미군 통계만으로도 일선 보병 가운데 19%가 전투중에 M4의 작동불량을 경험했으며 20%는 총기고장을 현지에서

회복하는데 실패해 전장에서 이탈해야만 했다고 증언했다.

 

ㅡ이에 미군은 M4A1으로 개량하면서 HK416기반의 M27 IAR이나 FN SCAR-H를 사용하게 되었다.

 

ㅡ과거 시가전 전술은 문을 파괴한 이후 내부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적을 청소한 다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에 대응해 아프간과 이라크 게릴라들은 문 뒤편에 어느정도 공간을 두고 가구나 의자등을 활용해 방어구조물을 구축하였다. 이는 수류탄 파편을 흡수할수 있었고, 그것을 모르고 들어오는 미 보병들에게 집중사격을 가해 상당한 피해를 입히곤 했다.

피해가 심해지자 미군은 민간인이 없다고 판단할 경우, 전차나 공격헬기를 호출해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ㅡ게릴라는 RPG-7을 2인조로 운용해 한명은 로켓탄 발사기를, 한명은 5~10발의 로켓탄을 휴대하여 화력면에서 사거리면에서 미군을 압도하였다.

이에 반해 미군의 M203유탄은 정확도나 사거리면에서 많이 부족하였고 벽을 뚫기에도 부족하였다.

미군은 M72LAW를 재생산해 급히 지급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40mm유탄 5발을 연속 발사할 수 있는 M32 유탄발사기를 도입하기도 하였고, 지정사수, M203의 정밀 조준사격능력을 보여하는 조준기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ㅡ포트어윈의 NTC(National Training Center)는 1980년대 당시 소련 시절 전차부대와의 교전을 모의하기 위해 개설된 훈련시설이지만 이를 대신해 이라크와 아프간 시가지를 모의한 훈련장으로 변모하였다. 최종적으로 NTC는 1개 여단 규모의 통합 훈련을 수행할 수 있는 대규모 훈련장으로 확대되었고 추적장치와 카메라 등을 통해 NTC 내에서 이동하는 모든 차량과 대부분의 병사들을 추적하는 기능이 완비되어 감시와 평가를 진행할 수 있다. 또한 NTC의 대항군은 1600페이지에 이르는 대본에 따라 백색(우호), 흑색(적대), 회색(중간) 등으로 구분되어 활동했으며 이를 통해 훈련자들은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확인된 대부분의 전투사례와 각종 상황 대응법을 학습할 수 있었다.

(그린베레 교육과정에서 로빈세이지 훈련을 실시하는 가상국가 '파인랜드'와 비슷한 기능으로 이해)

 

ㅡ특수부대의 작전형태와 노하우가 공개된 '브라보 투 제로'와 '노이지데이'의 작가들은 사회적인 비난과 SAS, 네이비씰 동료들에게 배척당하기도 한다.


ㅡ시리아 내전은 국제전 양상을 띄고 있다.

알아사드 정부군+헤즈볼라+이란(시아파 맹주)+러시아 VS. 반정부군 자유 시리아군(FSA)+사우디(수니파 맹주)+터키

여기에 시리아 내전에 참여한 알케에다 세력은 갑작스럽게 ISIL를 선언하며 알카에다와도 갈라섰다.

알카에다는 전 세계적인 이슬람 성전의 확대를 중시하는것과 비교해, IS(ISIL 혹은 ISIS)는 단순히 시리아와 이라크에 수니파 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목표가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ㅡ쿠르드족은 IS 와 같은 수니파이지만 가는길이 달랐고 자신의 지역에 침입한 IS와 격렬한 전투로 이들을 막아냈다.

 

ㅡ미국은 내심 쿠르드족에게 강력한 무기지원 및 군사원조를 보내 IS를 진압하고 싶었지만, 쿠르드족의 군사강화는 이라크 정부도, 터키 정부도 원치 않는게 문제였다.

 

ㅡ철천지원수인 미국과 이란이 공동의 적인 IS를 향해 향해 군사행동을 같이함은 물론, 미국이 최악의 테러리스트로

지목한 레바논 헤즈볼라가 미국 측을 지원해 IS에 대한 지상작전을 지속하고 있는 역사적 이변이 발생하고 있다.

 

ㅡ반면 터키는 IS 보다 쿠르드족을 더 두려워한다.

IS가 붕괴되고 쿠르드족이 차지하게 되면 이번에는 쿠르드족과의 독립전쟁을 각오해야 한다.

수니파의 맹주 사우디 역시 IS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알아사드 정권 및 시아파가 차지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ㅡ미국 입장에서는 알아사드편을 들자니 민주화를 역행하는 독재자를 지지하고, 중동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대를 돕는 꼴이 된다. 반 알아사드편을 들자니 이번에는 러시아와 충돌할 수 있고, 반 알아사드 세력은 시리아 정부군과 IS를 진압할 만한 역량이 없다는 평가가 많다.

그 결과 현재 IS 와의 전투는 알아사드 정부군과, 자유 시리아군, 이라크군, 쿠르드 민병대, 터키군, 러시아군, 영국군과 프랑스군, 미군까지 참여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ㅇ 저격수

 

ㅡ미군이 사용한 저격 총기는 M700, M21, M24, M40, MK11, MK12, MK14, M110, M82 바렛, M2010

 

ㅡ게릴라가 사용한 저격총기는 드라구노프SVD 저격총

 

ㅡ2인으로 운용되던 저격조는 시가전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편제로 바뀌게 된다.

6인 저격수 편제는, 저격수를 단순히 저격을 넘어 강력한 전투수단으로 운용하려는 사상에서 출발하였다. 저격수, 감적수, 그리고 수색과 엄호를 맡는 4명의 엄호 보병이 따라 붙는다.

 

ㅡ저격수 옆에는 전방항공통제관(FAC)이 함께하곤 했다. 지상군에 필요한 항공엄호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ㅡ저격임무의 특성상 감적수는 고참저격수가 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감적수는 보다 높은 배율과 넓은 시야를 가진 탐색망원경으로 적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저격수에게 저격위치와 함께 핵심적인 데이터, 즉 저격지점의 풍향과 풍속을 추정해서 전달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ㅡ미국은 공식적으로 이라크 전쟁을 2011년 12월 15일, 아프간 전쟁을 2014년 12월 19일에 종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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