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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15. 전쟁, 그리고>

by leeesssong 2020. 3. 4.

한줄평 - 우리가 전쟁에 관심이 없더라도 전쟁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트로츠키曰)​


ㅇ서문

 

표면적인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제외하고는 역사를 논하거나 제대로 바라보기 힘들다. 인간 군상이 벌이는 극단적인 행위의 총체가 전쟁이다보니 치열한 싸움 이면에 수많은 현상들이 나타날 밖에 없고 중에는 역설적이지만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 혹은 모르는 사이에 함께하는 부분들이 있다.

 

책은 역사의 동인으로서 전쟁이 세상과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여러 측면에서 살펴본

전쟁이면사라고 있다.


ㅇ본문

 

1.문화

 

-몽골에 장기간 지배를 받은 러시아, 헝가리 지역과 교류하던 독일 함부르크 지역의 상인이

훈제나 육포로 만드는 요리법을 소개하고 날것을 익혀먹기 시작하면서 햄버그 스테이크라고 부르게 되었다.

1904 미국의 만국박람회에서 관람객들에게 즉시 요리해 공급하기 위해 패티라고 부르며 함부르크 스테이크를

빵속에 야채와 함께 넣어 간편식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햄버거이다.

 

1944 12, 수세에 몰린 독일군은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 또는 '벌지전투' 통해 대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독일 특작부대가 미군 후방으로 침투하게 된다.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줄 아는 대원들이 군복을

입고 노획한 미제 지프로 나눠 미군 진영에 잠입해 후방 교란을했다.

비록 소규모 작전이였지만 유언비어에 속아 아이젠하워가 사령부 밖으로 나오지 못할 정도로 효과는 대단했다.

단시간 내에 급격히 혼란에 빠지게 되면서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런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하자

미군은 독일군을 색출하기 위해 '미키마우스의 여자친구는?' '올해 월드시리즈 우승팀은?' 등의 질문으로

독일군이 대답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나폴레옹 시대는 너무나 컬러풀한 군복으로 멋을 군인들이 일렬로 도열해 진격과 방어를 하는 장면들이 있다.

적에게는 이쪽의 전력이 세다는 것을 은연중 과시하기 위해 그랬다는 설이 있지만 가장 이유는 통신사정과 관련있다. 당시 지휘관들은 작전을 원활히 구사하기 위해서 아군과 적군을 쉽게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매복이나 기습보다는 정면대결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노출을 시키고 싸워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1 대전이 이전의 전쟁과 비교할수 없을 만큼 사상자가 많았던 이유중 하나는 이런 고루한 군대 복식 문화 전통에

따른 군복도 한 몫했다고 있다.

 

일본이 영국 해군을 철저히 모방했기에 국군주의 일본은 학교를 군사조직 형태로 운용하면서 남학생들에게는

전투복 스타일의 교복, 여학생들에게는 세이러복 스타일의 교복을 입게 했다.

 마린룩, 야상, 워커, 트렌치코트 이렇게 군복이 자연스럽게 일반인의 의복 문화에 흡수되어 밀리터리 룩으로서

사랑받고 있다.

 

2 대전 당시의 독일군 군복이 어색하지 않고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나름대로 디자인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휴고보스는 이를 디자인하며 군복은 독일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적국에 강한 인상을 심어시작했다.

 

2 대전 당시 독일군의 군복과 더불어 독특한 헬멧은 외형적으로 독일군을 특징짓는 뚜렷한 상징이었다.

귀와 관자노리를 덮는 형태로 제작되, 이것을 '프리츠'헬멧이라고 불렀다. 공식 명칭은 '슈탈헬름' 그대로 철모라는

단순한 뜻이었다슈탈헬름이 침략자의 상징물이라고 여겼지만 헬멧이 진화를 거듭해도 일단 두부의 주요

급소부위를  보호해야한다는 본연의 기능을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기능성이 좋은 슈탈헬름 스타일의 헬멧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PASGT'헬멧 또는 케블러 헬멧이라 부른다.


2. 올림픽

 

마라톤은 BC 490 그리스군과 페르시아군의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의 소식을 전하며 산화한 페이디피데스의

고사에 감명받아 만들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떄문에 패전한 페르시아의 후예인 이란은 마라톤을 하지 않는다.

 

11 베를린 올림픽은 정치적인 색채가 강했고 날조된 게르만 민족우월주의를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나치는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올림피아에서 성화를 채화해 베를린까지 봉송하는 행사를 치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이후 올림픽부터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

 

11 베를린 올림픽에서 식민지의 백성으로 망국의 한을 안고 민족차별이라는 수모의 눈물을 감춘채 달리고 달려

마라톤에서 1위를 손기정씨는 우리 민족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다.

친구인 남승룡 선수도 3 동반 입상하였다당시를 회상하며 남승룡씨는 이렇게 말했다.

"손기정이 1 한것보다 가슴에 일장기를 가릴 있는 올리브 나무를 갖고 있어서 부러웠다."


3. 문화

 

원래 견원지간이이던 영국과 프랑스가 동맹관계가 것은 순전히 통일된 프로이센, 독일 때문이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독일의 국력이 급속히 강화되고 빌헬름 2 등극 이후 대외 팽창이 가속화되자,

프랑스는 영국과 손을 잡았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애국을 강조한 계몽적 작품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선이고 약자이며 독일은 악이고 침략자라고 은연중에 세뇌당하기 쉽다. 

프랑스의 침탈로 유사 이래 계속 피해를 당해왔던 것은 사실 독일이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1870 독일이 승리하고 제국 통일을 달성한다.

이것은 역사 이래 처음으로 독일이 단독으로 프랑스와 일전을 벌여 승리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계속 수난을 받아왔던 독일이 처음으로 프랑스를 제압하고 고토를 회복한 것이다.

 

문화 파괴자

1) 나치의 분서 = 진시황의 분서갱유 = 천안문 사건

2) 독일의 레벤스라움 =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5. 경제

 

대부분의 전쟁은 승리로 얻게되는 이익이 경우게 발생했다. 다시 말해 경제적인 이유로 전쟁이 벌어졌다는 의미다.

 

유목민족들이 반복적인 정복 전쟁은 먹고 살기 힘들만큼 경제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거나 기후가 나빠져 초지를

이상 찾지 못하게 되면 살기 위해 남의 땅을 정복할 수밖에 없었다.

 

ㅡ20세기 들어 벌어진 세계대전도 선발 제국주의 국가와 후발 제국주의 국가간의 시장쟁탈전이었다.

소련을 침공해 사상 최대의 전쟁인 독소전쟁을 일으키게 것도 카프카스에 매장된 엄청난 석유 때문이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급습하며 태평양 전쟁을 개시한 결정적인 동기도 미국의 석유 금소조치 때문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에 쫓겨 수세에 몰려 도망 다니는 영국군이 와중에도 1941 이라크를 전격 침공한 것도

앞으로의 전쟁 수행을 위해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IMF 2 대전 이후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다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대공황을 극복하려면 나의 고통을 최대한 남에게 전가함으로서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이와 더불어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려면 가장 위협적인 세력, 공산주의와도 경쟁을 해야 했다.

이에 따라 다른나라에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정책을 폐기되어야 하고,

국제간 금융거래도 자유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일국의 통화, 환율, 외환 정책이 실패했을 경우

다른국가에 끼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있도록 세계 금융을 거중조정할 있는 기구가 필요했다.

나라에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지는 UN 달리, IMF 마치 주식회사처럼 출자 비율에 따라 발언권이 다르다.

 

1967 당시 국방장관 맥나마라, 국군의 현대화 사업과 관련해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게 그는 이후 세계은행

총재로서 우리나라 경제 발전 과정에도 많은 도움을 인물이다.

 2 대전 군수계통의 효율적 시스템을 개발하는 임무를 맡았던 맥나라마는 국방장관이 되자,

그때의 경험을 살려 개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방대한 국방예산의 효율적 집행으로 제식번호와 관리체계를 일원화하고 경영학적 마인드로 물량공세에서

비정규전과 핵미사일에 의한 전쟁 억지를 혼합한 '유연한 대응'으로 미국의 군사전략을 바꿔놓았다.

그는 세계은행 회의에서 한국의 성공사례를 예로 들면서 최빈국의 기본적인 문제는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니

지도자 양성을 위한 국제적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역설했었다.

 

1947 소련에서 개발된 AK47, 1957 미국에서 개발된 M16

AK47 경우 파생형까지 포함해 1억정 생산된 것으로 추산되는데 반해,

M16 800만정 정도 생산된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돌격소총의 생산량의 차이가 이처럼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성능의 문제가 아니라 특허권 때문이다.

M16 만든 스토너는 특허를 내고, 백만장자가 되었다.

반면 특허 개념이 희박한 소련에서 탄생한 AK47 제작자 칼리시니코프는 단지 훈장만 수여받았다.


8. 과학

 

에니악은 탄도계산뿐만 아니라 난수연구, 풍동설계, 일기예보에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에니악이 탄생한 이유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었다.

 

소련의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를 커다란 두려움으로 덮쳤다.

이에 국가의 비상경영과 군대 지휘를 위한 별도의 비상 통신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화나 전신용 케이블은 데이터가 호환되지 않아 각각 별도의 단말기를 운용해야하고 자칫 네트워크가 있어도

비상사태시 사용하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가능성이 있었다.

컴퓨터 간의 정보 공유기술이 확보되면서 거대한 정보 통신망인 인터넷이 등장을 한다.

 

암모니아 합성법을 발견한 독일의 화학자 하버

암모니아 합성법을 통해서 세계 인구가 섭취하는 단백질의 1/3 질소 비료로부터 나올 정도로

그가 인류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더불어 폭발문 제조에 필수적인 질산을 대량으로 생산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버는 지구상의 수십억 인류가 살아갈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을 만들어준 인물이기도 했지만,

수백만명의 생명을 죽인 인물이기도 하다.


10. 국가

 

이슬람을 믿는 국가(터키)라고 모두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종교적 자유와는 별개로 유대인들은 당연히 병역의무 대상이다.

그리고 드루즈인들은 이슬람교의 종파로 시아파에서 분파했는데,

코란을 배척하고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가 절충된 형태의 경전을 따르고 있는데, 이들도 병역의 의무 대상이다.

중동은 이처럼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해서는 이해하기 힘든 곳이다.

 

폴란드의 기병대는 함락 위기에 빠진 수도 바르샤바를 방어하기 위해 이동중이었는데,

우연히 대규모 독일 전차부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망설임 없이 돌격을 선택했다. 돌격 행위는 무모했지만 항복보다는 영예로운 군인의 길을 택했다.

멍청한 바보들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가장 군인답게 취할 있는 행동을 행한것이다.

구데리안은 전쟁 이후 저술한 저서에서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신념에 찬사를 남겼을 정도라고 한다. 

(폴란드도 당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음)

 

우유부단한 영국과 프랑스는 악마와 밀약(뮌헨 협정) 맺어 약소국의 의사와 주권을 완전히 무시하고

'우리 시대의 평화'란느 성찬과 사기극으로 1938 주데텐란틀르 독일 땅으로 병합시키는데 동의했다.

당시 입으로는 유럽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희대의 사기극임이 밝혀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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