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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색다른 자극 & 새로운 도전 & 다양한 경험)/독서 일지(인문, 사회, 경제, 과학 등)

<#13. 인간의 흑역사>

by leeesssong 2020. 8. 8.

ㅡ '루시'가 유명해질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냉정히 말해서' 어이없이 횡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 후로 인류가 펴칠 온갖 바보짓의 예고편이 아니었을까

ㅡ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책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일을 말아먹는 재주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책이다.

인류가 아무리 눈부시게 발전하고 아무리 많은 난관을 극복했다 해도, 파국은 예고없이 찾아온다.

ㅡ 지질 연구 결과 루시가 살던 곳은 평범한 삼림지대의 개울가로 나타났으므로, 절벽이나 높은 바위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무에서 떨어진 것이다.


ㅡ 우리가 이동하면서 질병을 옮겨 오는 바람에 그 질병에 내성이 없던 네안데르탈인들을 본의 아니게 절멸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인류사의 상당 부분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서로 질병을 옮긴 역사다.)

또 어쩌면 기후가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급변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조상들은 보수적인 네안데르탈인에 비해 더 큰 사회잡단을 이루고 살았으며 훨씬 넓은 지역에 걸쳐 소통과 교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혹한기에 활용할 수 있는 자원도 더 많았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가 그들을 다 죽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도 우리 특기임은 틀림없으니까

ㅡ 네안데르탈인이라고 하면 흔히 어기적거리는 돌대가리쯤으로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도 우리만큼 뇌가 컸고, 도구도 만들줄 알았으며, 불도 잘 쓰고 추상미술과 장신구도 만들면서 유럽에서 수만년간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나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네안데르탈인보다 유리했으리라 짐작되는 특징들은 대부분 사고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이 적응 능력이었는지, 더 우수한 도구였는지, 더 복잡한 사회구조였는지, 아니면 집단 내부에서나 집단 간의 의사소통하는 방식이었는지는 몰라도.

ㅡ 우리 인간의 사고방식은 확실히 독특하다.

라틴어로 현명한 사람이지 않은가.

지식과 발명을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다음세대에 물려준다.

이제 개인이 상상만 하던 아이디어도 사람들을 설득하여 함께 구현해나갈 수 있고,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던 혁신을 낳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오만 가지 형태로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한때의 혁신이 전통이 되고 전통이 또 새로운 혁신을 낳다보면, 결국 '문화' 또는 '사회'라고 하는 것이 생겨난다.

 진화라는 과정은 영리함과 거리가 멀다.

멍청할뿐 아니라 아주 고집스럽게 멍청하다.

진화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래저래 죽을 수 있는 수천가지 시나리오를 피하고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잘 넘어갈때까지만 죽지않고 사는 것, 그것 뿐이다.

그렇게만 되면 성공이다.

안되면 어쩔수 없고, 다시 말해 진화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지금 당장' 이익이 되는 특성은 무조건 선택된다.

그 결과 훗날 9대손쯤에서 너무 구닥다리 특성으로 고생하지 않을지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미래를 내다보고 반영한다든지 하는 것도 물론 전혀 없다.

이를테면 '아 이 특성은 지금은 좀 거추장스러워도 100만년 후에는 후손들한테 진짜 유용하겠군, 좋아 선택하자' 그런 경우는 없다.

진화의 원리는 앞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다.

그냥 먹을 것과 짝짓기에 굶주린 개체들을 인정사정없는 세상에 무진장 많이 풀어놓고 누가 제일 덜 망하나 보는 것이다.

ㅡ 우리 뇌는 최고의 사고 기계를 목표로 세심하게 설계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저 요령과 땜질과 편법을 덕지덕지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은 예컨대 우리의 먼 조상이 먹을 것을 찾는데 2% 더 유리했거나 아니면 '앗 조심해 사자야!'라는 개념을 전달하는데 3% 더 유리했기에 선택된 요령들이다.

ㅡ 그렇게 별 생각없이 손쉽게 판단을 내리기 위한 요령 내지 편법을 조금 어려운 말로 '휴리스틱(Heuristic)'이라 한다.

ㅡ 패턴찾기의 오류를 가리키는 용어만 해도 '상관착각', '군집착각' 등 넘쳐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 시민들은 독일군이 공포의 신무기 V1과 V2 미사일을 도시 곳곳의 특정 지점을 겨냥해 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서 안전한 자리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고, 폭격을 안맞는 것처럼 보이는 동네에 독일 스파이가 숨어있다고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한 문제가 심각해지자 영국 정부는 클라크라는 통계학자에게 소문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게 했다.

조사의 결론은? 사람들이 인식한 '군집'은 머릿속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없는 패턴을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독일의 유도 미사일 기술이란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독일은 미사일을 대충 런던 방향으로 마구 쏘았을 뿐이다.

사람들 눈에 패턴이 보인 것은 그게 우리 뇌의 특기이기 때문이다.

ㅡ 가용성 휴리스틱은 우리가 모든 정보를 신중히 따지기보다는 무엇이든 제일 쉽게 떠오르는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장 최근의 사건이라든지 더 극적이고 기억에 남는 사실을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보려는 엄청난 편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할 만한 평범하고 시시한 정보는 그냥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ㅡ 기준점 휴리스틱이란 뭔가를 결정할때, 특히 사전정보가 부족할수록 제일 처음 얻는 정보에 따라 결정이 크게 좌우되는 것을 가리킨다.

정보가치가 전혀 없는 질문에 판단이 좌우되는 것이다. 왜일까?

우리 뇌는 무엇이든 '기준점'이 주어지면 그것을 일단 덜컥 물고, 거기서부터 출발해 가감하면서 답을 찾기 때문이다.

ㅡ 주사위를 높은 숫자로 굴린 판사들은 낮은 숫자로 굴린 판사들에 비해 형량을 훨씬 길게 선고했다.

무척 불편한 실험 결과다.

ㅡ 확증편향이란 우리가 자기 생각을 확증하는 정보만 레이저 유도탄처럼 집요하게 찾아가는 답답한 습관이다.

우리가 영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정보가 가득 쌓여 있어도 거기엔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자기와 정치 성향이 비슷한 매체를 통해서만 뉴스를 보려는 경향이 이와 관련 된다고 할 수 있다.

심각하게는 음모론자를 절대 설득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자기의 믿음에 부합하는 증거만 선택적으로 취하고 다른 증거는 외면하니 그럴 수 밖에 없다.

ㅡ 자기가 완전히 틀렸을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 뇌의 성향은 뿌리가 꽤 깊다.

아무리 그래도, 뭔가를 결정해 실행에 옮겼는데 누가 봐도 망한 결과가 떡하니 나오면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꿔야 하는게 순리 아닐까? 천만의 말씀

'선택 지지 편향(Choice-supportive bias)'라는 것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어떤 행동을 일단 선택하고 나면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ㅡ 선택은 이미 내려졌으니 그것은 옳은 선택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내린 선택이니까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에게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 오히려 잘못된 생각을 더 굳게 믿게 된다는 연구도 있다.

명백한 증거를 또박또박 짚어줘도 소용이 없다.

적이 공격해온다 싶으면 오히려 보루를 쌓고 더 끈적지게 버티고 앉는 것이다.

그래서 페이스북에서 인종주의자와 논쟁을 벌여봤자, 또 언론계에 투신해봤자, 희망이 없다.

결국 허무하기만 하고 적만 양산되기 쉽다.

ㅡ 우리는 혼자서도 이렇게 결정을 잘못하는데 남들과 함께 결정할때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라, 집단에서 혼자만 튀는 것을 아주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한다는 마음에 그나마 현명한 본능마저 억누르고 남들을 따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집단사고(group think)'에 빠지게 되는 이유다. 집단의 우세한 의견에 눌려 다른 의견은 일축되거나 아예 나오지 않는 것이다. 집단적 압력 속에서 누구도 '글쎼요, 그게 정말 최선일까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에라 모르겠다'하고 대세에 따르느 습성도 마찬가지 이유다.

ㅡ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하는 유명한 인지편향 현상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잘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엄청나게 과대평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점을 말 그대로 잘 모르니, 그 결점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당연히 모른다.

그래서 마냥 낙관하고 과신하다가 사고를 치고 일을 그르치기를 끝없이 반복한다.

ㅡ 인간은 또 위험평가와 미래 대비에 아주 소질이 없다.

물론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ㅡ 우리는 이렇게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로 미래를 바라본다.

그 바탕에 깔린 강력한 원동력 중 한가지는 물론 탐욕이다.

ㅡ 인간은 부를 거머쥐려고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도덕이나 법 같은 것은 내팽개치기 일쑤다.

탐욕과 이기심은 또 한 가지 흔한 실수를 낳기 마련이니,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이익을 좇다보면 결국 다함께 망하게 되는 현상이다.

사회과학에서는 이런 종류의 실패를 가리켜, '사회적 함정' 또는 '공유지의 비극'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사람들 각자의 행동이 단기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면 공멸하게 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ㅡ 세상을 '우리'와 '남들'로 가르고 '남들'에 대해 뭐든 안좋은 이야기가 있으면 철석같이 믿는 습성이다.

여기는 아예 우리의 모든 인지편향이 총집합해 잔치를 벌이는 마당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는 세상을 실제로 있지도 않은 패턴에 따라 이리저리 가르고, 제일 처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기준으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고, 원래 갖고있던 생각에 부합하는 정보만 선별적으로 취하고, 집단에서 튀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별 이유 없이 우리가 잘났다고 확신하니 편견이 꽃필 수 밖에 없다.

ㅡ 농경과 함께 '부의 불평등'이라는 별난 개념이 탄생한 것을 들 수 있다.

남들보다 가진게 월등히 많은 특권층이 등장하면서 남들을 이래라저래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농경은 또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유로도 볼 수 있다.

마을이라는게 생기고 나면 옆 마을이 습격해올 위험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농경을 통해 인간은 새로운 질병과 접촉하게 된데다가, 점점 큰 규모로 집단생활을 하다보니 전염병이 퍼지기 쉬운 조건이 되었다.

농경사회 이전 사람들이 더 잘먹고 일도 덜하고 건강했음을 시사하는 근거도 존재한다.

ㅡ 농업으로 강산이 바뀌었고 동식물 종이 대륙간에 뒤섞였을 뿐 아니라, 도시화와 산업화와 인간의 무분별한 쓰레기 투기 습성으로 토양과 바다와 공기가 모두 변해버렸다.

ㅡ 미국이 겪은 '더스트볼' 재앙은, 인간이 환경을 제멋대로 바꾸다가 의도치 못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로 남았다.

그러나 그 밖에도 대규모의 지구공학에서 미세 플라스틱 입자에 이르기까지, 또 산림파괴에서 강의 무분별한 개발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사례는 널려있다.

ㅡ 문제는 물이 줄어든게 다가 아니다. 호수물이 증발하면 물속에 있던 물질은 다 어디로 갈까? 어디 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물질은 대부분 소금이다.

물은 줄었으나 소금은 그대로 남아 호수 물이 점점 짜지면서 생명이 살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염도가 약 10배로 높아지면서 호수에 살던 생물들은 거의 절멸하기에 이르렀고, 활발하던 어업이 몰락하면서 6만명이 실업자로 내몰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근 공장과 농장에서 내뿜는 공해물질이 점점 가중되면서 바짝 마른 호숫바닥 위로 쌓여갔다.

다량의 유독물질과 소금이 먼지바람에 실려 수백만 인구가 사는 옛 호숫가 마을과 소도시에 직격탄으로 떨어졌고 주민들의 호흡기 질환과 암 발병률이 치솟았다.

아랄해는 인간이 주변 환경을 대대적으로 변화시키고도 별탈 없으리라 낙관하는 습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ㅡ 이스터섬은 폴리네시아 지역의 다른 섬들에 비해 후미진 곳에 위치한 데다가 좁고 평탄한 지형에 춥고 건조한 기후였다.

한마디로 나무를 베면 자연적으로 보충되기 힘든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보짓을 했던 것이, 라파누이인들은 더 좋은 집을 짓고 더 좋은 카누를 만들고 석상을 운반하는 설비를 더 좋게 개선하려고 열을 올린 나머지 나무를 계속 베어내기만 하고 나무가 다시 자라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나무가 한 그루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전형적인 '공유지의 비극'이었다. 

나무 한그루를 벤 한 사람은 잘못이 없었을지라도, 결국 모든 사람의 잘못으로 상황은 회복 불능이 되어버렸다.


ㅡ 개의 기원에 관한 가장 그럴듯한 설은, 그냥 늑대가 사람들을 따라다니다가 개가 되었다는 것.

인간은 먹을게 있었고 남은 음식을 자꾸 내버렸으므로 충분히 쫓아다닐만 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늑대들은 인간과 함께 사는 생활에 점점 적응해갔다.

한편 인간도 자기를 잘 따르는 늑대가 곁에 있으면 꽤 쓸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사냥도 해오는데다, 털이 복슬복슬한게 촉감도 좋았으니까

ㅡ 약 11,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염소와 양이 가축화되었다. 

그로부터 500년 전후에는 오늘날의 터키 땅에서, 이어서 오늘날의 파키스탄 땅에서 소가 가축화되었다. 

돼지도 약 9,000년 전 중국과 터키 두 나라에서 가축화되었다.

6,000~5,500년 전에는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카자흐스탄 부근에서 말이 가축화 되었다.

ㅡ 가축을 키우면 좋은점이 많다.

단백질 공급원을 확보하고 털로 옷을 만들어 입고, 배설물은 거름으로 쓸 수 있었다.

물론 앞의 장에서 알아보았듯이 다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좁은 공간에 가축을 몰아넣고 기르니 동물을 통해 인간이 병에 옮기 쉬웠다.

또 말과 소를 소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부의 불평등이 생겨난 것으로 보이며, 말과 코끼리를 전투에 사용하면서 전쟁은 훨씬 더 치열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간은 가축을 사유하면서 자신이 자연의 지배자이며, 동물이건 식물이건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잇다는 인식을 확실히 갖게 되었다.

지금부터 알아보겠지만, 동식물을 뜻대로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인간의 과신은 번번히 큰 화를 초래했다.

ㅡ 오스트레일리아에 토끼를 들여온 것은 오스틴이 최초가 아니였지만, 대재앙을 낳은 주된 원인은 그가 들여온 토끼였다. 

ㅡ 인간은 엉뚱한 곳에 새로운 종을 도입하려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심지어 세상에 없던 종을 새로 만들기도 한다.

ㅡ 마오쩌둥이 국난의 책임을 동물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모기는 말라리아를 퍼뜨리고 쥐는 흑사병을 퍼뜨린다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모기와 쥐를 잡는 범국민적 운동을 기획했다. 파리도 성가신 놈들이므로 박멸해야 한다고 했다.

네번째 유해동물은 참새였다.

이 운동의 결과로 쥐 15억 마리, 모기 1,100만 킬로그램, 파리 1억 킬로그램, 참새 10억마리가 소탕된 것으로 추산한다.

10억마리의 천적이 갑자기 사라지자 중국의 메뚜기들은 매일매일이 잔칫날이었다.

여기저기서 곡식을 조금씩 쪼아먹는 참새와 달리 메뚜기 뗴는 거대한 공포의 구름을 이루어 중국의 논밭을 통째로 싹쓸이했다.

ㅡ 1959년에서 1962년까지 중국을 덮친 대기근은 참새 소탕뿐 아니라 여러 잘못된 결정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게 원인이었다. 

당의 주도에 다른 전통적 자급 농업에서 고부가 가치 상품작물 재배로의 전환, 소련 생물학자 트로핌 리센코의 유사과학 이론에 기반한 파괴적 농경기법 도입, 농산물을 몰수해 지역 사회 내에서의 소비를 막은 중앙정부의 정책 등이 모두 제각기 몫을 했다.


ㅡ 절대 권력만 해도 종류가 많다.

세습 왕조가 있고, 왕권신수설에 따른 통치도 있고, 무력으로 정권을 뺏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각종 독재자도 있다. 

독재자란 아무리 천하의 바보라도 개인숭배체제를 구축할 수 있음을 훌륭히 증명하는 인물이다.

ㅡ 시대가 바뀌면서 통치자들은 엣날보다는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현대에 들어서도 옜날 못지 않게 황당하고 무능한 지도자들은 숱하게 많다.

ㅡ 민주주의의 주요 요건(요컨대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 시민이 마음에 들지 않을 정부를 교체할 권리 등)

누구까지를 시민으로 보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역사를 통틀어 여러 나라에서 여성, 빈민, 소수민족 등 보잘것 없는 약자들은 시민으로 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권력을 아무한테나 줄 수야 없지 않았겠는가?

ㅡ 민주주의의 또 한가지 문제는, 누구든 민주적 절차에 의해 권력을 잡는 것은 좋아하지만 권력을 빼앗길것 같으면 갑자기 영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계속 유지하는데만도 참으로 엄청난 노력이 들어간다.

ㅡ 민주주의가 영원히 유지될 거라 생각하면 바로 그 순간 큰 코 다친다.

ㅡ 1981년 캘리포니아 수놀이라는 작은 도시에서는 개 한마리를 시장으로 선출했다.

1967년 에콰도르의 소도시 피코아시에서 시장으로 선출된 풋 파욷 상표 '풀바피에스',

그는 심지어 선거에 공식 출마한 후보도 아니었다.


ㅡ 실제로 히틀러는 무능하고 게으르고 병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고 그의 정부는 완전히 코미디엿다는 사실을 알아둘만하지 않을까 

사실 오히려 그 덕분에 그가 득세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독일 지도층을 그를 시종일관 과소평가했다.

ㅡ 두달만에 히틀러는 오히려 나라를 완전히 장악했고, 자신에게 초헌법적인 권한과 대통령직에다가 의회까지 통째로 넘겨주게 될 법을 통과시켜달라고 의회를 설득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가 순식간에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게 되었다. 

독일의 지도적 인사들은 왜 그렇게 시종일관 히틀러를 얕잡아 보았을까?

히틀러의 무능함을 제대로 짚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능함도 히틀러의 야욕앞에서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히틀러는 정부를 운영하는 능력이 형편없었다.

그의 공보 담당관 오토 디트리히는 훗날 회고록 '내가 알던 히틀러'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히틀러는 12년간 통치하면서 문명국가에서는 유례가 없을 만큼 정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다."

히틀러 정부는 늘 난장판이었다.

관료들은 자기가 뭘 해야하는지 몰랐고, 누가 무슨일을 맡고 있는지 잘몰랐다.

히틀러는 어려운 결정을 해달라고 하면 결정을 한없이 미뤘고, 결국 느낌대로 결정해버리기 일쑤였다.

 

ㅡ 인두세 

마가렛 대처 정부의 최고 지성들이 더 공정한 방식이라며 생각해낸 세금제도로, 

부자나 가난한 자가 똑같은 액수의 세금을 내는것이었다.

이는 전국적인 납세 거부와 대규모 폭동을 낳았고, 결국 대처는 압력에 못이겨 사임했다.

ㅡ 금주법

미국은 1920년에서 1933년까지 금주령을 시행한 결과 술 마시는 사람을 줄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범죄조직이 주류업을 독점하게 되어 전국 각지에서 범죄율이 치솟았다.

ㅡ 코브라 효과

영국 정부는 인도 델리에서 유해동물 방제 운동의 일환으로 죽은 코브라를 가져오면 포상금을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코브라를 길러 손쉽게 포상금을 타갔다. 그러자 영국은 포상금을 폐지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쓸모없어진 코브라를 방생해서 코브라의 창궐을 낳았다.

ㅡ 스무트 홀리 관세법

대공황이 불거진 1930년, 미국은 국내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그 결과 무역 전쟁이 벌어져 전 세계의 불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ㅡ 뒤플레시 고아 사건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캐나다 퀘백 주정부는 종교 단체들에 고아와 정신질환자를 보살필 수 있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런데 정신질환자의 경우 고아의 경우보다 보조금이 2배나 많았다.

그 결과 수천명의 고아들이 정신질환자로 허위진단을 받았다.

ㅡ 차량 운휴제

1989년 멕시코의 멕시코시티 시정부는 특정 요일에 특정 차량의 운행을 금지하는 방법으로 대기오염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러자 시민들은 버스를 타는 대신, 자가용을 더 구입해 그날그날 운행 금지에 걸리지 않는 차를 타고 나왔다.


ㅡ 인류사에 알려진 사회의 90~95%는 전쟁을 꼬박꼬박 치른것으로 추정되며, 전쟁과 거의 담을 쌓았던 소수의 사회는 유목이나 수렵, 채집 생활을 유지한, 비교적 고립된 사회인 경우가 많았다.

ㅡ 현재 우리는 전쟁이 아주 없진 않아도,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으니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한 전 세계 연간 사망자 수가 수십년째 하향세니, 혹자는 이를 근거로 인류가 이제 평화와 이성과 국제적 우애의 새 시대에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냉철히 생각해보면 이런 주장을 하기엔 너무 이르다..

현재의 하향 추세는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었던 2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니까

ㅡ 태평양 괌에서 그 교훈을 깨달은 것은 1989년 미국 스페인 전쟁 때였다.

당시 괌을 식민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이 지금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괌에 미처 알리지 않은 것이다.

미군 군함 몇척이 왠지 평화로워 보이는 괌에 접근해 스페인의 산타크루즈 요새에 열세발의 포격을 가하자, 괌의 스페인 측 고위 대표들이 배를 저어 군함에 다가와서는, 예포를 후하게 쏘아 인사해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미군은 잠깐 난처해하다가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자기들은 방금 인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전투를 벌이려고 한 것이며, 지금 미국과 스페인은 전쟁중이라고 말이다.

대표들은 별안간 포로 신세가 되었음을 깨닫고, 자기들은 본국으로부터 두달 넘게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고 전쟁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며 볼멘 소리를 했다.

ㅡ 히틀러와 나폴레옹 두 사람 모두 그 실수로 말미암마 순조롭게 진행중이던 유럽 평정 계획을 완전히 망쳤다.

그 실수는 바로 러시아 침공을 시도한 것이다.

나폴레옹의 가장 큰 실수라면, 매사에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거의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는 점.

나폴레옹은 외교와 협상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독일 수뇌부에는 이러한 문제점을 히틀러에게 지적해줄 수 있을만한 참모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반대하거나 회의하는 낌새만 있으면 작전 내용을 참모들에게 공꽁 숨기거나 철저히 거짓말로 둘러댔다.

이는 자만심, 소망적 사고, 현실 회피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의사결정 방식이었다.

ㅡ 1943년 여름, 미군과 캐나다군 34,000명은 키스카섬 탈환 작전을 준비했다.

8월 15일에 연합군 병력이 키스카섬에 상륙했을때, 섬은 한파가 몰아치고 짙은 안개가 뒤덮여 있었다.

병사들은 강추위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비바람을 뚫고, 험준한 지형을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지뢰와 부비트랩을 피해 나아갔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군의 총격이 연신 번쩍거렸다.

이들은 24시간 동안 저격수의 총격을 피해가며 비탈길을 타고 섬 중앙의 고지를 향해 힘겹게 올라갔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포탄소리와 따닥거리는 총성, 명령 소리와 일본군이 나타났다는 외침 소리가 배경음처럼 끝없이 들려왔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미 3주전에 섬을 버리고 떠난 후였다. 미군과 캐나다군이 서로 총질을 했던 것이다.

이미 공중정찰팀이 섬에서 일본군의 활동이 전혀 관찰되지 않아 병력이 철수한 듯하다고 상륙 몇주전에 작전 지휘관들에게 알린 후였다. 하지만 지휘관들은 애투섬에서 겪은 일이 있던지라 일본군은 절대 퇴각같은 건 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확증편향이 제대로 발휘된 순간이었다. 지휘관들은 어찌나 확신에 찼던지, 만일을 위해 정찰 임무를 몇번더 수행해보겠다는 제안마저 거절했다. 여기서 우리는 매사를 지레짐작하지 말자는 교훈을 건질 만하다.

 

ㅡ 1953년 나바르의 목표는(프랑스령 인도 차이나에서 식민지배에 맞서 끈덕지게 저항운동을 벌이던) 공산주의 조직 베트민의 군대를 보기좋게 섬멸해, 임박한 평화협상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것이었다.

나바르는 아주 기발한 함정을 파기로 했다. 외진 곳에 프랑스군 기지를 크게 짓고 베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베트민군을 전투에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기지를 지을 디엔비엔푸라는 곳은 사방이 울창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였으므로, 베트민군이 고지에 몸을 은폐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 증원병력 위치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프랑스군이 공중을 장악한 상태에서 물자를 공수해줄 것이고, 베트민군은 정글 속에서 중화기를 이곳까지 운반해올 수 없을테니 화력면에서도 프랑스군이 압도하리라 생각했다.

계획은 아주 좋았다.

나바르는 부하들을 시켜 기지를 세우고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몇달동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베트민군은 전혀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사실 베트민군은 정글 속에서 중화기를 운반하고 있었다.

 

그 몇달 동안 베트민군과 민간인들이 힘을 합쳐 무기를 다 분해하고 울창한 산속을 장거리 이동해 디엔비엔푸까지 옮겨온 다음 재조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우기가 시작될 때까지 기다렸다.

프랑스 병력이 진흙탕에 발이 묶이고 프랑스 비행기들이 시계가 확보되지 않아 보급품을 투하할 수 없게 되자 베트민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구식 소총을 든 농민들이 육탄으로 공격해올줄 알았던 나바르의 병사들은, 난데없이 각종 중화기가 나타나 포격을 연신 퍼붓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프랑스 군은 포위상태에서 두달간 버티다가 결국 함락당했다. 그 규모나 방식에서 워낙 압도적이고 수치스러운 참패였기에 프랑스 정부는 붕괴하기에 이르렀고, 베트민은 결국 독립을 쟁취해 북베트남을 세우게 되었다.

 

ㅡ 미국이 피그스만에 상륙해 쿠바를 침공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은 집단 사고의 전형적인 사례일 뿐 아니라, 집단사고라는 말 자체의 기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가 케네디 행정부의 이 대실패 사례를 연구하고 나서 만들어낸 말이 바로 집단사고다.

기본계획은 이랬다.

카스트로에 반대하는 쿠바 망명자들을 훈련시켜, 이들로 하여금 미국의 공중지원하에 침공을 나서게 한다는 것.

이들은 오합지졸 쿠바군과의 전투에서 쉽게 승기를 잡을 것이고, 이를 본 쿠바 주민들은 그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며 공산주의 정권에서 맞서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아주 간단했다.

케네디는 그리 호방한 기질이 아니었고, 자칫 소련의 심기를 건드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래서 작전의 일부 변경을 주장했다. 미국의 작전 지원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또 상륙지점도 인구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는데, 미국의 공중지원이 불가하고 '민중 봉기 유도' 시나리오는 실현이 어려워질게 뻔했다.

질문하는 사람도 없었고 따지고 드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의 고문이었고 이 계획을 반대했던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가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누구나 동의하는게 당연하다는 듯한 묘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열렸고, 자신은 어이없는 계획이라고 생각했지만 회의석상에서는 왠지 잠자코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그때 내가 소심하게 질문 몇개를 던지는 것 이상으로 나서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하자면, 그 허튼짓을 고발하고 싶은 충동이 당시의 회의 분위기에 눌러버렸다고 할수밖에 없다." 

누구나 살다보면 그런 회의를 경험하게 되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1961년 미 공군이 카스트로의 공군을 처리해줄 수 없으니 쿠바 망명자들이 그 임무를 맡아 쿠바 공군기처럼 위장한 폭격기 몇대를 몰고 니카라과에서 이륙해 작전을 수행했다.

그리고 계획에 따라 그 중 한 비행기가 보란듯이 마이애미에 착륙했고, 비행기에서 내린 조종사는 자신은 탈주한 쿠바군이며 쿠바 공군기지를 폭격한 것이 자기라고 세상 떠들썩하게 발표했다.

그러나 이 계략은 그 비행기가 쿠바군에서 실제 사용하는 기체와 다르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보기 좋게 실패했다.

또 어둠을 틈타 상륙하려던 상륙부대는 현지 어부들에게 금방 발각되었고, 어부들은 그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하기는 커녕 떠들썩하게 경보를 울리며 소총으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상륙부대는 쿠바정복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해변을 벗어나기조차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대규모의 쿠바군 병력이 금세 나타나 총격을 해왔는데, 전혀 오합지졸이 아니라 상당히 전투에 능했다.

상륙부대는 며칠동안 해변에 갇혀 적의 공격을 절박하게 버텼고, 탄약은 다 떨어져갔다. 

침공 개시 3일째, 케네디는 마침내 공중지원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쿠바인 조종사들이 상황 돌아가는 꼴에 배신감을 느껴 조종을 거부했다.

그러자 미국은 비밀리에 개입한다는 계획을 깨끗이 포기했다.

앨라배마 주방위군에서 대원을 차출해 위장 폭격기에 태우고, 여기에 위장이고 뭐고 포기한 적나라한 미군 전투기들을 투입해 지원하기로 했다.

드디어 해변 상륙부대가 반격의 기회를 잡는가 싶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 작전은 화려한 바보짓으로 그 대단원을 마무리한다.

폭격기들이 있던 니카라과와 전투기들이 있던 마이애미 사이에 시차가 있다는 사실을 다들 잊은 것이다.

그래서 폭격기들과 전투기들은 서로 만나지도 못했다. 그 중 몇대는 격추됐다.

미국은 다시는 집단사고에 빠져 부실한 침공작전을 허술한 정보에 기대어 뚜렷한 계획도 출구전략도 없이 밀어붙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ㅡ '식민주의는 사실 좋은것이었다.' 라는 주장이 꽤 거세게 대두되고 있으니 한번 따져보자.

그 주장을 간단히 말하면, 피식민국이 받은 수혜, 즉 경제 근대화, 인프라 건설, 과학의학적 지식이전, 법치개념도입 등을 고려하면 이러한 수혜가 식민국의 횡포로 인한 피해보다 컸다는 것이다.

​역사상 어느 시점에 군사력이 일시적, 우발적으로 우월했다고 하여 그것이 '누가 누구를 다스려도 좋다'는 절대적도덕률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오류를 안고 있다.

ㅡ 애초에 유럽이 기술 발달을 누리게 된 것도 국가간 지식 교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부터 생각해보자.

물론 이는 이게 옳다 저게 옳다 증명할 수 없는 문제로, 식민국도 아니었고 피식민국도 아니었던 나라가 거의 없어서 검증이 어렵다. 거의 유일한 예로 태국이 있긴 하다. 지금 구글에서 찾아보니 태국에도 전기가 잘 들어온다. 

ㅡ 식민시대를 통틀어 가장 가공할 만행으로 꼽을 만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수탈이다. 

대량학살을 저질렀고, 그 결과 20여년 간 약 1,0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짜 오싹한 아이러니는 이 악행이 공식적으로는 자선 명목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ㅡ 국제 아프리카 협회가 표방한 자선사업은 콩고 주민들의 '문명화'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실제로 벌인 일은 온 나라를 거대한 고무농장으로 만들고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한 주민은 처형하거나, 손, 발, 코를 잘라 처벌하는 악랄한 만행이었다.

ㅡ 독일은 '적의 적은 동지'라는 흔한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니다. 동지애의 유효기간이 엄청 짧을 뿐이다. 

이 착각은 역사상 최악의 결정을 엄청나게 많이 초래했으니, 극히 혼란스러운 수백 년 간의 유럽 역사도 그것으로 잘 설명된다.

ㅡ 미국은 '공산주의자 아님'이라는 기준에만 맞으면 아무하고나 다 동맹을 맺었다.

그렇게 맺은 동맹의 상당수는 한마디로 그냥 나쁜놈들이었다.

(아메리카의 온갖 독재자들, 베트남의 형편없는 통치자들 등) 

하지만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으니, 그 동맹 상대들은 알고보면 애당초 미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미국은 시리아 정권을 지원했는데 그 정권의 적을 지원하려다 보니 시리아 정권과 맞서게 됐다.

그런데 시리아 정권의 적 중 일부가 ISIS와 동지였으니 ISIS는 적이면서 또 미국의 적의 적인 셈이다.

그런데 그 정권의 적의 또 다른 동지들은 미국과도 ISIS와도 적이다. 

 

ㅡ 호라즘 제국은 문명 세계의 중심지였다.

동서양을 연결하며 문물의 교류를 꽃피웠던 실크로드도 그곳을 지나갔다.

호라즘은 당시 최고로 부유하고 발달한 문화권이던 이슬람권에서도 심장부 중 하나였다.

주요 도시 사마르칸트, 부하라, 메르브 등은 중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학문과 기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명성이 높았다.

무함마드는 징기스칸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경솔한 짓을 하려거든 그 전에 정보를 좀 알아보고 하면 좋았을 텐데, 수염 잃은 몽골 사신들이 무함마드의 도발 알리러 돌아가던 그때, 무함마드의 밀사가 몽골군의 위력을 정확히 파악해 돌아오고 있었다.

1219년 징기스칸은 호라즘 정벌에 나섰다.

1222년 호라즘 제국은 지도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ㅡ 몽골군은 민첩하고 적응이 빨랐으며, 군기가 잘 잡혀있고 지략에 능했다. 

징기스칸은 병력을 여러 분견대로 나누어 기습을 공격, 지원군 차단, 복수 목표에 동시다발 공격 등을 효과적으로 벌였다. 

몽골군은 의사소통을 신속히 하고 전술을 쉽게 바꿨으며, 점령한 적군의 전략과 병기를 속속 제것으로 흡수했다.

그야말로 참으로 무자비했다.

몽골이 정벌했던 많은 지역은 문화와 역사와 문헌이 모두 파괴되었고, 주민들이 송두리째 추방되었으며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그 모든 사태의 발단이 되었던 교역로가 통합되고 안정화되면서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문화 교류를 가능케 했고, 이는 유라시아 전역에 근대 문명기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부정적인 면이라면 그 교역로를 통해 문화 뿐 아니라 질병도 옮겼다는 것이며, 특히 흑사병은 또 한차례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ㅡ 인류의 위대한 발걸음인 과학혁명은 16세기에 유럽 각국의 철학자들이 편지와 책들을 돌려보면서 시작되었다.

아니 처음엔 혁명이라기보다 따라잡기에 가까웠다.

대부분 과거 문명에서 예전에 알아냈던 지식들을 그저 재발견한 것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과학혁명이 세계적으로 탐험과 정복과 무역이 흥한 시기와 맞물리면서 이후 수백년에 걸쳐 우리의 지식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ㅡ 이상수(anomalous water) 또는 파생수(offspring water) 라 일컫는 이 물은 어는점은 0도가 아니라 -40도였다.

끓는 점은 더 엄청나서 최소 150도, 어쩌면 650도까지 될 것으로 보였다.

물보다 점성이 높아 거의 액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걸죽하고 끈끈했다. 바셀린과 비슷하다고 묘사하는 이도 있었다. 칼로베면 벤 자국이 남는다고 했다.

실험 결과로 짐작할때 이 물질은 물의 중합체였다.

즉 H20 분자가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사슬 구조를 이루고 있어 보통의 물보다 안정된 특성을 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이상수는 오늘날 알려진 이름인 중합수(polywater)로 불리게 되었다. 

냉메, 엔진 윤활제, 원자로 감속재 등으로 쓰일 수 있다고 했다.

전부터 알려졌던 자연계의 현상도 잘 설명했다. 

중합수는 점토에도 함유되어 있으며, 그래서 점토는 평상시에 물렁물렁한 반죽 같은 특성을 띠다가 극고온으로 가열하면 비로소 중합수가 증발하면서 굳는 것이다.

중합수로 기상현상도 설명이 가능할 것 같았다.

소량의 중합수가 구름씨앗 역할을 하여 구름을 형성하리라는 추측이었다. 인체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합수 같은건 없었다. 그런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페다킨과 데랴긴이 발견했던 것은 그리고 전 세계 과학자들이 수년간 매달려 재연하고 연구하고 법석을 떨었던 그 물질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더러운 물'이었다.

중합수의 그 신비롭다는 특성들은 모두 청결해야 할 실험장비에 유입된 불순물 때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냉전시대의 과열된 연구 분위기가 겹쳐, 여러 나라의 똑똑한 과학자들이 남들이 떠벌리는 현상을 자기도 관찰했다고 착각하고 애매한 결과나 실패한 결과를 부풀려 해석하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은 과학이라기보다 '소망적 사고'였다.


 

ㅡ 인간은 미래를 제대로 내다보고 대비하는 능력이 원래부터 떨어진다.

하지만 최근 수백년 동안 기술과 사회의 변화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 현실은 문제를 더 부채질하고 있다.

ㅡ 1871년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나의 공장이 그대의 의회보다 전쟁을 더 일찍 종식시킬 것이오.

어느 군대든 적군을 삽시간에 섬멸할 수 있게 게 되는 날, 모든 문명국가는 엄습하는 공포감에 군대를 해산할 수 밖에 없을 것이오"

ㅡ 1877년 게틀링건을 발명한 개틀링은 자신의 발명이 인도적 전쟁의 시대를 열 줄 알았다고 적었다. 

"날이면 날마다 군인들이 전장으로 떠나고 다치고 병들고 죽어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다 이런생각이 들었네.

내가 만약 어떤 기계를 발명해 전장에서 군인 1명이 100명의 몫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큰 군대가 꼭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전투와 질병을 겪을 일이 크게 줄어들지 않겠는가."

ㅡ 1938년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아돌프 히틀러와 협정을 맺고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시대에 평화가 왔다고 믿습니다. 집에가서 발 뻗고 주무십시오" 

ㅡ 1945년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이끈 오펜하이머는 이렇게 적었다.

"이 무기가 인류에게 전쟁 종식의 필요성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그 어떤 과학 발명품도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노벨, 개틀링, 맥심, 라이트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핵전쟁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으니 그점에서는 오펜하이머의 판정승이라 볼 수도 있겠다.


ㅡ 케슬러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일찍이 1987년 NASA 의 과학자 도널드 케슬러가 처음 예견한 현상이다.

그 후로도 우리는 우주에 잡동사니를 계속 열심히 버려왔지만, 문제는, 궤도상에서 뭔가를 버리면 그게 어디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주선에서 던진 쓰레기는 우주선이 돌던 궤도와 똑같은 궤도를 거의 비슷한 속도로 돌게 된다.

그러면서 다른 쓰레기와 충돌하기도 한다.

궤도를 도는 속도란 엄청나기 때문에 충돌의 파괴력도 어마어마하다.

아주 조그만 물건과 한번 충돌하는 것만으로도 대참사가 벗어날 수 있다.

위성이나 우주정거장이 산산조각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충돌 사고 한번 나면, 수천 수만개의 우주 쓰레기가 새로 생긴다. 그것들이 다 이제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

ㅡ 언젠가 결국 우주 쓰레기의 밀도는 어떤 임계점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

그때부터는 매번의 충돌이 걷잡을 수 없이 더 많은 충돌로 이어져, 결국 우리 지구는 초고속 쓰레기 미사일의 거대한 장막으로 덮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위성은 쓸모가 없어지고, 우주로 나간다는 것은 치명적 위험을 안게 된다.

사실상 지구에서 영원히 못 나가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참 묘하게 시적인 결말인듯 하다.

수백만년 전 루시가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부터 시작된 인류의 여정이, 그 모든 탐험, 그 모든 발전, 그 모든 꿈과 사상들을 거쳐서, 결국 우리 손으로 만든 쓰레기 감옥에 갇혀 사는 운명으로 귀결된다니.

ㅡ 앞으로 1년 후, 10년 후, 100년 후에 우리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어떤 뜻밖의 변화가 일어날지는 몰라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똑같은 짓을 계속할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ㅡ 우리가 처한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릴 것이고, 정교한 환상의 세계를 구축해 우리가 지은 죄를 잊으려 할 것이다.

경제 위기가 터진 후에는 대중 영합적 정치인들에게 표를 줄 것이다. 

돈을 더 벌려고 아웅다웅할 것이다. 집단 사고와 광풍과 확증 편향에 빠질 것이다. 

지금 우리 계획이 아주 좋은 계획이고 잘 못될리는 전혀 없다고 거듭 되뇔 것이다.

ㅡ 오늘날 세상이 아무리 어이없고 절망스러운 면이 있을지라도, 사실 인류는 지혜와 분별력을 점점 키워가고 있고, 우리는 바보짓이 사라질 새 시대의 여명기에 사는 행운아들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과거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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