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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35. 궁극의 군대>

by leeesssong 2020. 4. 8.

한줄평 - 미군이 어떻게 세계 최강의 군대가 되었는지! 알아야지! 아는게 힘! 


서문

 

2 대전 이후 60년간 군대의 문화가 기술과 어떻게 상효작용하였는가

기술은 각군의 모습을 바꿔놓기도 했지만, 사실은 군이 나름의 목적에 따라 기술을 변용한 경유가 많았다.

군의 문화는 이에 유연하게 대처했다. 환경과 조직문화, 그리고 기술은 놀라운 방식으로 상호작용했다.

 

기술은 미군의 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미군의 군종별 문화는 그들이 추구하리고 선택한 기술에 영향을 미쳤다.

기술은 어떠한 해결책을 일방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어느 선택지가 매력적인지를 결정하는것은 군종의 문화이다.

전반적으로 , 기술이 군을 형성했다기보다는 군이 기술을 형성했다고 보아야 것이다.


ㅇ본문

 

1. 혁명(1945~60)

핵무기는 미군에게 위협이자 기회였다. 핵무기는 군의 전통적인 정체성을 위협했다.

다른 한편으로 혁명은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 우주 그리고 방공 분야에서 새로운 경쟁의 장을 열었다.

 

공군은 폭격기, 순항미사일, 탄도미사일을 발전시켰고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공군의 폭격기와 미국의 도시들을 보호할 필요성으로 인해 대륙방어를 고민하게 된다.

 

공군, 특히 전략공군사령부가 미군의 주력으로 부상하자 해군 내부에서도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해군은 원래 핵폭격기를 자군 항공모함에 배치하는 식으로 핵무기의 점진적인 도입을 추진했다.

해군은 자군의 미래를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걸었다.

 

핵잠수함은 결코 스노클을 필요가 없었고, 소나가 추적할 없을정도로 빨랐다게다가 핵잠수함의 속도와

3차원적 기동성은 상대적으로 느린 디젤잠수함들을 공격하기 위해 개발되었던 기존 어뢰들을 능가했다.

 

핵무기의 등장으로 육군 지도부들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급격히 전환되었다.

육군은 살아남기 위해 더욱더 산개해야 했으며, 안전확보와 기만술을 집중 추구해야 했다.

 

ㅡ 2 대전 종료 이후 15 동안 미군은 크기, 조직, 기술 면에서 20세기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목격했다.

기간에 제트기, 유도미사일, 위성, 통합 방공체계를 비롯한 다양한 신무기와 체계들이 대거 출현했다.

군은 새로운 조직을 배치했다.

공군은 미사일 부대를 만들었고, 해군은 핵추진 잠수함을 만들었으며, 육군은 펜토믹사단을 만들었다.

하지만 국방 자원의 가장 몫은 공군이 차지했다.


2. 신축적 대응(1961~75)

 

케네디 행정부의 신축적 대응 전략(Flexible Response Strategy)으로 인해

군은 다시 고강도 재래식 전쟁을 강조하게 됐으며, 여러 부문에서 과거로 회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케네디 행정부는 전임자의 대량보복전략(Massive Retaliation Strategy) 불만이었다.

대량보복전략은 대규모 공격으로 대응하는 것이 재래식 전쟁과 핵전쟁을 충분히 억제할 있다고 간주했지만

행정부는 미국의 재래식 전력을 강화하기로 결심했다신축적 대응전략은 군사적 위협에 맞서 자동으로 핵무기를 사용해 확전하기보다는 대칭적으로 대응하는 교리를 의미했다.

 

신축적 대응은 소련의 군사적 능력을 충분히 이해해야만 실현할 있었다.

단지 부대와 장비의 숫자만이 아니라 무기 체계의 세부 특징들까지도 알아야 했다.

미국은 레이더, 정보원, 광학정찰기, 신호정보 수집장비 등을 활용하고 소련이 판매한 외국의 무기체계를 획득하여 분석하였다.

 

특히 1967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미국 분석가들에게 폭넓은 소련제 무기들을 실전에서 조사하고 평가하고 분석할 있었다. 이같은 노력을 통해 미국의 기술력이 소련을 앞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3. 베트남 전쟁과 기술(1963~75)

 

베트남 전쟁은 전반적으로 미국 패권의 한계를 보여주었으며,

특히 기술에 의존하는 미군의 전략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냈다.

 

육군은 공중기동사단을 도입하였고,

해군은 공산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하천전단(Riverine Force) 배치했고,

공군은 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수송기를 무장항공기로 개조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서는 무인 항공기(UAV), 무인 지상 레이더, 정밀 유도무기(PGM) 비롯한

1990년대 이후의 전쟁에서 진가를 보여주는 다방면의 신기술들이 등장했다.

 

헬리콥터의 광범위한 사용은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이었다.

 

해군은 베트남에서 뚜렷히 구별되는 3가지 군사활동을 벌였다.

북베트남 공중전, 남중국해 해상작전, 그리고 남베트남의 하천들을 따라 펼친 연안 정찰이었다.

 

레이더와 공격기의 네트워크는 이후 전문가들이 일컫는 '정찰-타격복합체' 효시가 되었다.

무인기와 정밀유도무기 또한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사용되었다.


4. 냉전의 승리(1976~90)

 

베트남 전쟁 이후 15 동안, 미군은 패배한 군대에서 냉전에서 승리한 군대로 변모했다.

이러한 성공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전쟁으로 단련된 장교단도 그중 하나였다.

신세대 무기, 그리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교리의 개발과 도입은 미국의 전략에 중요한 요소였다.

 

1973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대부분 미국제 장비로 무장했던 이스라엘 소련제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던 이집트와 시리아의 격돌이었고, 전쟁은 NATO 바르샤바 조약 동맹국의 대결과 가장 유사할 것으로 여겨졌다.

이를 통해 미래 전쟁 양상을 파악하려 했다.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얻은 교훈들을 반영해 FM 100-5 Operation(작전) 최초 '능동적 방어'라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었으나 이에 대한 불만은 보다 공세적인 교리 '공지전(AirLand Battle) 개발 이어졌다.

 

공지전 교리가 등장하다 미군은 새로운 세대의 무기를 개발하고 획득하는 길로 나아갔고,

센서와 감시체계 장거리 타격이 가능한 무기, 이들을 연결할 있는 지휘통제체계가 필요했다.

결과 육군은 합동감시 표적공격용 레이더체계(JSTARS, Joint Surveillance Target Attack Radar System) 항공기를 개발했으며 전력을 타격하기 위해 AH-64 아파치 공격 헬리콥터, 탄도미사일, 다연장로켓체계(MLRS), 육군전술미사일(ATACMS) 등을 개발했다.

 

공지전 교리가 잉태한 기술들은 소련은 엄두를 미국 경제와 사회의 무기 생산능력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행보에 소련은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으나 경제력이 따라가지 못했다.

 

냉전 후반기 육군의 무기도입사업은 훗날 ' 파이브' 알려진 다섯 가지 무기체계에 집중되었다.

최신 기술이 적용된 전차, 보병 전투차량, 고등 공격헬기, 병력수송 헬기 그리고 방공체계였다.

 

관성항법체계(INS, Inertial Navigation System) 지형윤곽대조(TERCOM, Terrain Contour Matching)

사용한 정확한 유도 체계가 등장하였다.

 

공군은 하이- 믹스(High-Low mix) 채택해

소수의 고성능 항공기(F-15) 다수의 성능이 떨어지는 항공기(F-16) 운용했다.

 

ㅡ 1983 로널드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 냉전 후반기에서 가장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소련의 산업적 능력을 미국의 기술로 상쇄하려는 시도의 완벽한 사례이다.


5. 걸프전쟁과 탈냉전 시대(1991~2001)

 

국방분야의 개혁론자들은 미국의 무기사업들을 많이 비판했고,

전통주의자들은 고등 기술이 미국의 경쟁우위이며 이를 포기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반박했다.

1991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양쪽의 주장이 마침내 시험대에 올랐다.

 

M1 에이브람스, M2/M3 브래들리, F15 국방 개혁론자들이 오랫동안 비판한 많은 신무기들이 전장에서

훌륭한 성능을 보여주었다. 이라크는 국방개혁을 외치는 이들이 오랫동안 찬양하던 소련제 무기들을 사용했는데,

개혁론자들이 비웃던 미국제 무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ㅡ 1990년대 전쟁은 무기와 항법체계에 모두 적용된 정밀유도기술, 그리고 스텔스 기술의 시연회 같았다.

 

실제로 바그다드는 모스크바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촘촘한 방공망을 보유한 도시였다.

공군은 스텔스와 정밀 기술을 이용해 공중우세를 달성하고 이라크의 방공망을 궤멸시키지 않고서도

이라크 내부 깊숙히 위치한 목표물을 공격함으로써 '병행 작전(Parallel Operation) 수행할 있었다.

F-117 전략 항공 작전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항공작전에 결점이 없는것은 아니었다.

연합군 항공기는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TEL)같은 표적들을 파괴할 없었다.

1500회의 공습에서 스커드 발사대를 파괴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GPS 사용한 연합군은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사막에서도 전례없는 수준의 정확도로 길을 찾고,

기동하며 공격할 있었고, 정밀폭격, 포병 화력지원 그리고 전투수색 구조에도 도움을 주었다.

GPS 만이 걸프전에서 사용된 우주체계는 아니었다. 정찰위성으로 미군은 이라크군이 밀집된 지역을 식별하고,

항공 작전의 효과를 평가할 있었다.

통신 위성들은 전구 내의 전력을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에 있는 본부들과 연결했다.

또한 걸프전에서는 처음으로 탄도미사일과 미사일 방어체계의 실전 대결이 벌어졌다.

위성은 이라크 스커드 미사일의 로켓 배기가스 기둥을 발사 직후 30 내에 감지하여 경보를 제공할 있었다.

 

걸프전때와 마찬가지로 코소보 전쟁에서 스텔스 F-117 B-2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코소보 전쟁에서 정밀유도무기의 사용은 증가했지만 날씨 상황은 연합군의 공중폭격을 자주 방해했다.

밀로셰비치가 코소보에서 철수하기로 했는가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전쟁의 결과는 항공력 이론가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처럼 보였다.

 

코소보 전쟁으로 인해 육군에 빠르게 움직이고,

가벼우면서도 강력하게 타격을 가할 있을만큼 중무중을 부대가 없다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6. 테러와의 전쟁(2001~2005)

 

ㅡ2001 9 11일의 테러공격과 이에 대한 대응은 탈냉전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

 

ㅡ 2개월동안 현지의 반란군과 연합하면서 대규모 항공력의 지원을 받는 316명의 특수전 전력과 110명의 CIA 준군사

요원들은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고, 알카에다가 아프간을 은신처로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특수작전의 문화 한복판에는 기술이 아닌 인간 자리잡고 있었다.

특수작전 임무는 궁극적으로 지역 전력에 동기를 부여하고 협력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여러 기술이 더해질때 작은 특전대팀은 매우 효과적일 있었다.

 

AC-130U, RQ-1(프레데터), RQ-4(글로벌호크)등이 등장했다.

 

감시정보를 빠르게 수집하고 배포할 있는 능력을 폭넓게 갖추자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들도 발생했다.

첫째로 정찰 감시 정보에 대한 의존이 생겨났다.

둘째로 네트워크와 실시간 정보제공의 결합으로

어떤부분에는 무심하면서 어떤부분에는 사소한 사항까지 관여하는 이상한 지휘방식 생겨났다.

실시간으로 영상이 전송되면서 참견이 장려(?)되었다.

 

여러 국방 분야 권위자들은 2차대전, 냉전과 걸프전을 거치며 한가지 시각을 발전시키는데

이는 중기갑/기계화 전력이 지상전의 필수 요소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용감성과 군사적 전문성이 곧 전략적 통찰력을 낳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과거 전쟁에서 얻은 교훈은 지혜를 주기도 하지만 판단을 흐리게도 한다는 사실 또한 보여준다.

 

만일 걸프전 참전용사들이 원하던 대로 보다 많은 중기갑사단을 동원했더라면

이라크의 기간시설이 많은 손상을 입고, 많은 민간인 사상자 발생,

그리고 반란군들을 진압할 있도록 장비나 훈련 (비정규전, 대반란전, 안정화 작전 ) 된 것도 아니었다.

 

GPS장비는 폭탄 투하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병력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수 있게 했다.

우군을 추절할 있는 능력으로 연합군은 지휘통제를 개선했다. 기술은 작전속도를 가속시켰고,

우군에 대한 오인공격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방탄복의 개선과 약품의 발달, 그리고 신속해진 부상자의 공중후송을 통해 이라크에서 많은 생명을 살려냈다.

야전병원에서 살아서 도착한 병사의 생존 확률은 96%이다.

한편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많은 절단과 실명, 뇌손상으로 이어졌다.

방탄복은 병사의 몸통을 보호했지만 병사의 사지는 취약한 채로 남아,

반군의 IED RPG 인해 심각한 부상들이 발생했다.

 

고급기술이 이라크의 반군과 싸우는데 결코 무용한 것은 아니었다.

방탄복 덕에 많은 병사들이 자동소총 탄알로부터 생명을 지킬 있었고,

전사자가 발생하면 국민의 지지가 약화된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방탄복 덕에 미국은 장기화된 반란 진압 작전을 계속 수행할 있는 셈이다.


ㅇ결론

 

전쟁의 성격변화에 대한 증거는 다섯개 범주로 분류된다.

첫째, 최근 전쟁들은 새로운 전쟁방식을 실증했다.

GPS 유도 폭탄들의 폭넓은 사용, 정찰감시는 물론이고 공습 임무도 실시하는 무인체계

둘째, 조직들의 구조가 변화하는 추세이다.

정밀유도무기를 통해 항공 전력이 점차 포병전력을 대체할 있게 되었다.

지상전력은 공중 공격을 위해 적을 묶어두고, 적을 식벽하고 겨냥하는 지각 센서 역할을 하고 있다.

셋째, 이러한 변화들은 군의 정체성 일부를 시험한다.

GPS 유도무기와 무인기는 조종사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흔들고 있다.

넷째, 전쟁의 성격과 수행방법의 변화는 세력 균형에 반영된다.

다섯째, 지난 15년간 군사 전문가들은 미래전쟁의 전개와 결과를 예측하는데 엉망이었다.

군사분야에서 전문성의 질이 하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수도 있지만,

전쟁의 성격이 중요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

 

ㅡ "급진적"변화가 정확히 무엇인가를 두고는 다양하게 해석할 있다.

장교들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능력의 개발보다는 기존의 무기와 교리의 개선 부분을 변화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설문에 응답한 장교들 다수가 자기 분과나 특기에 소속된 개인에게 2020년에는 매우 다른능력이 필요할 거라고 믿는 반면, 2020년까지 자신의 특기가 무용해질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20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다수의 장교들은 전쟁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에 투자하기 위해 기존의 전력 구조나 대비태세의 비중을 줄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틀림없이 비정규전의 중요성이 향후 고급 기술의 유용성을 약화시키리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반란이나 반란진압은 저급 기술과 동의어가 아니다.

반군들의 IED, 미군의 야시경, 우군전력추적체계, 무인기와 정밀유도무기 같은 고급기술들은 미군과 반군들에게 싸우는데 중대한 이점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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