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33. 하룻밤에 읽는 일본 군사사>

by leeesssong 2020. 4. 2.

한줄평 - 책에 빨려들어가 4박 5일간의 일본 군사여행을 함께 떠난 느낌~다음 여행지는 일본!


서문​

 

ㅡ 우리와 많은 관련이 있음에도 일본의 군사사는 잘 다뤄지지 않았다.

단순한 반일감정에서 벗어나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지피지기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근대의 일본과 일본군은 무시하고 조롱하기에는 너무 강한 나라와 강한 군대였다.

비판은 상대에 대해 알아야만 있다.


본문

 

ㅡ 1일차

 

오사카가 공습을 당한 이유는

제국일본군 4사단 사령부와 아시아에서 가장 탄약창이 위치한 군인도시였기 때문이다.

 

북한 역시 625당시 의정부 축선의 4사단이나, 아니면 오늘날 서북도서의 트러블메이커 4군단을 볼수 있듯 4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군만 '4' 기피하게 되었을까

우리군도 초창기에는 '4' 쓰는 부대가 있었다. 그러나 1948 14연대가 일으킨 여순사건 이후부터 '4' 금기시되었다.

 

태평양 전쟁 일본군인들이 사용한 조그만한 수첩 '전진훈',

훈의 8번째 내용인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받지 않고 죽어서 죄화의 오명을 남기지 마라' 유명한 훈령이다.

육군 대신 도조 히데키가 제정하였으며 유명한 8번째 항목은 작성자의 언행 불일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들은 죽음과 파괴의 공포에 밀어넣었으나 정작 자신은 죽음을 너무나도 두려워했다.

 

일본군에게 포로란 비겁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왜곡된 채로 수용된 극단적 정신문화로 인해 일본군에게 포로는 인간이 아닌 동물로 여겨졌다.

포로를 죽이고, 고된 노역을 시키며 비인도적인 의학실험까지 하는 행위까지도 일본군은 정상적인 행위라 생각했다.

 

성곽에서 성은 내성을, 곽은 외성을 의미한다.

내성과 외성의 개념은 우리나라보다 서양과 일본의 성에서 쉽게 찾아볼 있다.

 

트라스 이탈리엔 양식은 14세기 이후부터 서양에서 화약무기의 발달에 대응하기 위해 생긴 축성양식이다.

유럽의 군사혁명을 다루는 학자들은 전국시대 일본의 성이 독자적으로 발달했음에도 비슷함을 보고 신기해한다.

오사카 성에서 볼수있는 성곽의 가장 특징은 넓은 해자와 각이 성곽이다.

우리나라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화약무기를 염두에 성이 하나 있다.

오사카 성보다 200년뒤인 1796 완공된 수원화성이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전후의 일본을 왜구라 치부해 버리고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당시 지어진 오사카 성의 방대한 규모와 거석들을 운송하고 다루는 기술, 재건축을 위해

10년이란 기간동안 동원한 인원의 수만 따져봐도 당시 일본의 국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군사전략으로 알려진 '청야입보',

들을 깨끗이 비우고 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면서 적의 군수물자가 떨어질때까지 장기전을 펼치는 전략으로

서양의 '파비우스 전략' 맥을 같이한다. 청야입보 개념 하에 수많은 산성들이 축조되었다.

하지만 자체가 방어 수단이 수는 없다무인과 군사문화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청야입보를 군사적인 이해없이 문자 그대로 관념적으로만 받아들였다. 병자호란 같이

 

"반격없는 방어, 절대적 방어란 무의미하며, 반격은 방어의 필수기본 요소이다.

신속하고 과감한 공격으로의 전환은 방어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다." - 클라우제비츠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설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처럼 강을 막은 둑을 터뜨려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늘날 중장비를 가지고도 강을 막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계절도 유량이 적은 겨울이었다.

수장했다기보다는 고구려 기병의 우수한 기동성으로 적의 보급로를 끊고, 주변 지형지물로 적을 괴롭혔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적의 수급()으로 포상을 결정하는 행위를 가지고 일본의 잔혹성을 말하기도 하는데 틀린 이야기다.

비판을 하려면 정확해야 한다. 적의 수급을 가지고 논공행상하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통용되고 있었다.

문제는 일본군이 비전투행위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군사사의 아쉬운 하나는 전쟁화 분야이다. 다른나라는 전쟁화를 통해 텍스트만으로는 확인할 없는 많은 것들을 확인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극소수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삼위일체 이론

국민 - 인간이 가지는 원초적 폭력성에 기반한 증오와 적개심

군대 - 창조적 정신에 기반한 우연성과 개연성

정부 - 전쟁을 합리적, 이성적으로 이끌고 정책의 일부인 도구로 제한하는 정치 종속성

 

이런 국민들의 증오와 적개심을 이성적인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는 대상은 정부다. 군국주우의 일본 정부는 국민의 적대감을 가지고 자신들의 정책 목표인 '팔굉일우' 이루고자 했다.


ㅡ 2일차

행주산성은 민가 한채 들어설 없는 토성 내부에서

부녀자를 동원하고 행주치마로 돌을 날랐다는 말도 안되는 설화다.

 

ㅡ '호로' , 바람, 햇빛 등을 막기 위해 차량에 다는 덮개라는 뜻이다.

무로마치 시대까지의 사무라이는 활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무사였다.

주무기가 활이었기 때문에 화살을 방어하기 위한 호로가 나온 셈이다.

 

정신전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정신력 위주의 군대로만 나아가는 군대의 후환 역시 역사가 증명한다. 제국일본 군대

 

'물리적 원인과 결과는 칼의 목제 손잡이에 불과하지만, 정신적 원인과 결과는 귀한 금속,

광택나게 연마된 본래의 칼날이라 있을 것이다.' 클라우제비츠

물질전력이라는 손잡이가 없거나 정신전력이라는 칼날이 무디다면 적을 벨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시대의 사건은 시대의 특수성에 비추어 판단되어야 한다. 해당 시대의 주요 결정적 특징들을 정확하게 연구하는 사람만이 시대의 야전 사령관을 이해하고 존중할 있다.' 클라우제비츠


ㅡ 3일차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러일전쟁의 결정적 장면이었던 쓰시마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일본인들의 추앙을 받는 명장이다. 이를 계기로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고 러일전쟁을 마무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이 급속한 근대화를 완성하여 서구의 강대국 러시아를 물리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도고의 상징 Z기는 쓰시마 해전의 개전신호로 쓰여 유명해졌다. 전투 시작전 '황국의 흥망은 전투에 달려있다.

대원은 한층 분발 노력해라'라는 메시지를 부대에 전파하면서

이상 우리에게 뒤가 없다는 뜻으로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 Z기를 게양했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정신승리였다는 잘못된 전훈을 토대로

일본 군대의 교육훈련은 오직 정신주의 강화에만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군의 헌병대는 민간사회의 소요진압뿐만 아니라

국민과 국가라는 개념을 정립하지 못한채 억지로 징병된 인원들의 군기확립의 역활도 수행했다.

봉건적 신분질서의 수호자였다.

사실 징병제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국민 총동원령처럼 의식이 깨어있는 자유민들을 대상으로 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제도이다. 일본의 군대는 국민의 군대가 아닌 덴노를 위한 군대였다.

 

러일전쟁을 한창 준비하던 1903 일본의 제약회사가 크레오소트를 이용한 설사약을 개발하여 군납을 했고,

만주벌판에서 효과를 보았다. 이약이 러시아를 정복한다는 뜻의 정로환이다.

 

장기, 체스 같은 게임은 모두 전쟁에 기원을 두고 있다.

3000년전 고대 인도에서 처음 시작된 장기는 페르시아를 거쳐 유럽에 상륙한 것이 체스,

동쪽에 전해진것이 장기가 되었다.

인도군 편제가 코끼리, 기병, 전차, 보병으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에 장기에서 코끼리 유닛() 나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소설과 게임으로 전쟁을 읽는 젊은 세대들이 존재한다.

그와 동시에 전쟁범죄나 전쟁책임이라는 무거운 현실에 눈을 돌리고 싶다는 미묘한 국민심리가 존재한다.

그들이 말하는 투쟁심이나 호국의지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은 게임에 없다.

2 세계대전의 책임을 일부 군국주의자, 특히 육군 위주의 일부 희생양들에게만 돌리고

나머지 일본인들은 나라를 위해 싸우기만 했다는 그들의 역사의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ㅡ 4일차

특공대와 독고다이는 '신푸 도쿠베츠 고케키타이(神風特別攻擊隊, 신풍 특별 공격대)라는 동일한 어원 가지고 있다. 미군에게는 신푸보다는 가미카제로 읽어 본명보다는 가미카제 특별공격대가 유명해졌다.

특별공격대를 줄여서 특공대, 일본어로는 독고다이다.

 

일본의 전쟁 피해자 사칭을 위해서는 본토에 떨어진 폭격에 대한 민간사회의 피해를 강조하는 것은 필수요소이다.

 

일본의 식민국들을 제외하면 실제로 일본과 연합작전을 펼친 곳은 인도 국민군 뿐이었다.

 

특공 3종세트(자폭어뢰, 자폭비행기, 자폭 보트) 와 9군신(특별공격대의 과장된 전과와 9명의 죽음)

군사문화의 본질이 ' 죽이고 죽는것' 대한 문화라고 하지만,

죽음만을 강조하는 잘못된 군사문화는 파멸을 가져온다.

 

같은시기 반대편 미국의 패튼 장군은 이런말을 남겼다

"전쟁의 목적은 자신이 조국을 위해 죽는 아니라 적이 그의 조국을 위해 죽도록 해주는것에 있다."

 

클라우제비츠 뿐만 아니라 부대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 군사 연구가들은 많이 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피크 대령은 참전자들을 통해

전장이란 공포의 현장에서 군인들은 '자부심을 고취한느 상호간의 이해'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S.L.A마샬 역시 2 세계대전 종료 전장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호 이해' 책임회피를 막아줄수 있다고 주장하했다.

 

둘의 상호이해를 다른말로 하면 부대정신이다.

 

나치 독일군과 완전한 단절을 택한 독일과는 달리 겉으로는 반대하나 속으로는

제국일본군의 부대정신을 이어가고 싶은 일본 자위대의모습이다.

 

제국일본군의 지나친 군기와 복무규정 강조는 이론적으로 완벽했지만,

실제 전장에서 벌어지는 양상을 통해 상급자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고 부대의 단결과 전우애를 말살하였음이 드러났다.

 

-일본군을 상대한 해병대는 이런말을 남겼다.

"모든 쪽바리(JAPS)들은 그들의 의무가 덴노를 위해 죽는것이라 한다. 의무를 다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해병대원의 의무이다."


ㅡ 5일차

천인침(천으로된 부적) 배에 차고 반자이 돌격을 하는 일본군을 떠올려보면 주문을 외우면

총에 맞지  않는다는 허황된 소문을 믿고 맨몸으로 기관총으로 달려드는 동학농민군과 중국의 태평천국군이 생각난다.

정치나 외교만 잘하면 국방은 어떻게든 될것이라 생각하고 군사문제는 쉬운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어쩌면 동양적 전통일지도 모른다전쟁은 쉬운것이 아니다. 고도의 지적행위이다.


ㅇ 에필로그

군사학계에서 군사사를 전쟁 자체만이 아니라 군사 행위와 관련된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문화와의 상호작용을 포괄하는 것의 역사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경향을 군사사라고 한다.

 

미군의 경우 민병대와 같은 시민군 문화에, 독일군의 경우 프로이센 귀족의 문화를 반영한 참모제,

그리고 일본의 전쟁방식은 무사도 정신의 영향을 받은 백병전 공격중시사상으로 특징 지어질수 있다.

 

무사도와 신도의 콜라보레이션은 덴노를 현인신으로 만들어 일본 국민은 타민족보다 우월하니

세계를 지배해야한다는 황국사상으로 발전했다.

 

무사도와 신도를 이용해 일본군은 강력한 군대를 육성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극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집단을 다른 집단과 구별해주고 집단 구성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이 문화.

군조직에 바른 문화가 없다면 필요한 만큼의 단결력과 질서를 확립할 없으며 패배를 당하는 경우 정체성에 혼란이 오게 된다조건없는 죽음까지 미화하며 필승의 신념을 강조한 결과 무모한 작전과 생명의 희생만 야기했다.

억지 죽음 강요는 전쟁말기 상급자에 대한 불신과 부대의 단결을 저해하고 전우애를 말살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제국군은 덴노와 지배체제를 지키기 위한 군대일뿐 국민을 위한 군대가 아니었다.

군인의 생명을 무시하고 비합리적인 정신주의를 강요하였으며 국민을 지키기는커녕 무의미한 죽음만을 강요했다.

 

국난으로 인식하여 악한 외부세력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쳐들어오면 약하지만,

정의롭고 평화적인 우리민족은 민족 전체의 일치단결로 이겨냈다는 식의 역사관에서는

우리가 정상적인 국가로서 어떻게 위기에 대해서 조치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뒷전일 밖에 없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의병의 장렬한 항전과 같은 과장된 민족적, 정신사적, 윤리적 같은 관념적 측면보다는,

실제 조선의 정규관군 작전이나 전쟁지도 같은 전쟁의 구체적양상과 결과같은 실질적인 측면을 연구해야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