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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29. 무기전 보급전>

by leeesssong 2020. 3. 28.

한줄평 - 가볍게 읽고 참고하기 좋은 책


ㅇ 서론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이지만 한편으로는 무기 개발의 역사이기도 하다.

또한 전쟁을 오래하기 위해서는 무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급능력도 중요하다.


ㅇ 본문

 

1. 무기전

 

ㅡ 최소한의 손실로 최대한의 피해를 입힐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전략과 군사학의 근본 원리임을 감안할때

활은 매우 참신한 무기라 할 수 있다.

 

ㅡ화살을 막고 인체를 보호하기 위해 방패와 투구, 갑옷이 등장했다.

이에 화살촉은 차츰 돌에서 청동이나 철과 강철로 대체되었다.

이렇게 공격자와 방어자 간의 경쟁관계가 군사 무기를 발전시켰다.

 

ㅡ 말이 끄는 전차는 사람을 태우고 다니기에 충분히 크고 힘센 품종의 말이 등장함과 동시에

전차에 맞서는 보병전술이 발달하면서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ㅡ 그리스의 지형은 산지가 많아 페르시아 기병들이 움직이기 어려웠다.

그리스군의 주력 병과는 호플라이트라 불리는 중무장 보병이었다.

2.7~3m의 창(도리)를 오른손에 들코 1m 크기에 3kg 정도 되는 방패(호플론)을 들고

'팔랑크스'라는 밀집대형을 이루었다. 이 밀집대형은 화살과 투창 등 원거리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ㅡ 일본군이 쏘아대는 아쿼버스의 위력을 보고 크게 놀라 날아간느 새도 잡는다는 뜻으로 '조총'이라 불렀다.

조총은 1952년 4월 28일 탄금대 전투에 위력을 발휘했다.

 

ㅡ 판옥선의 첫번째 특징은 노를 젓는 선실과 전투원을 태운 갑판이 따로 분리된 2층 전함이다.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안전한 상황에서 노를 저을 수 있다.

두번째 특징은 천자총통, 지자총통 같은 막강한 화포들을 대거 탑재하여 매우 강력한 원거리 화력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접전할때는 개인용 무기인 승자총통을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갑판의 높이를 높여 적이 쉽게 아군의 배로 넘어올 수 없도록 설계했다.

높은 갑판에 선 조선 수군들은 적을 내려다보며 화살을 마음놓고 적에게 퍼부을 수 있었다.

 

ㅡ 반면 일본 수군의 주력함인 세키부네는 판옥선보다 크기나 화력면에서 훨씬 뒤떨어졌으며

신속히 거리를 좁히고 판옥선에 올라타 칼과 창을 휘두르며 조선수군을 제압하는 등선육박전술을 벌이려 했다.

 

냉전 기간 동안 소련의 첩보기관인 KGB는 첩보전에서 미국의 첩보기관인 CIA보다 더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KGB 정보 외에도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소련 측에 정보를 넘겨준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전 세계에서 미국만 핵무기를 가진다면 미국의 폭주를 견제할 나라가 없다. 따라서 다른 나라도

핵무기를 가져야 미국이 함부로 이 위험한 무기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신념을 가진 인물들도 있었다

 

ㅡ 냉전의 막바지인 1980년대 말, 소련이 보유한 핵무기는 3만 7천개, 미국은 2만 9천여개로 핵 전력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ㅡ 아이러니하게 소련의 붕괴를 일으킨 원인은 다름아닌 핵무기였다.

냉전이 끝날때까지 소련의 경제규모는 미국의 3분의 1밖에 안되는 수준에 머물렀다.

경제력이 낮은데도 오히려 더 많은 핵무기를 만들고 보유하자니 당연히 소련 경제에 막대한 부담을 가중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뒷수습1979~1988년까지 아프간 전쟁으로 인해

소련은 더 이상 체제를 지킬수 없다고 여겨 스스로 국가 해체를 선언하고야 말았다.

더 아이러니한 점은 소련이 그토록 많은 핵무기를 만들면서도 정작 실전에는 단 한번도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몽골군이 일으킨 흑사병은 중세 유럽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인구의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중세의 장원제도가 흔들렸다.

왕족이나 귀족, 성직자들조차 흑사병에 걸려 죽자 반란과 종교개혁이 일어났기에

흑사병은 중세 유럽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ㅡ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는 에스파탸인들에게 옮은 천연두로 사회조직이 거의 무너진 상태였다.

 

ㅡ 1763년 오타와족 추장 폰티악은 북미 원주민들과 손을 잡고 영국군에 맞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싸웠다.

그러나 영국군 사령관 애머스트는 "천연두 환자들의 콧물과 침이 묻은 담요를 원주민들에게 보내라"

18세기에 벌어진 세균전을 '폰티악 전쟁'이라 부른다. 폰티악 전쟁은 세균전의 시초였다.

 

ㅡ 1915년 하버의 독가스는 이프르 전투에서 최초로 염소 성분을 사용했다.

얼마 못가 영국과 프랑스도 자국의 화학자들을 동원해 똑같은 독가스를 개발해 독일군 참호에 퍼부으며

화학전을 벌였다. 독일군 병사였던 히틀러가 영국군이 쏜 독가스에 눈을 다쳐 병원에 실려가기도 햇다.

 

ㅡ 1920년 영국의 식민 장관 처칠은 쿠르드족을 제압하기 위해 독가스를 살포하라고 명했다.

 

ㅡ 1937~1945년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도 중국군을 상대로 자주 독가스를 퍼부었다.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731부대 연구원들은 자기들이 모은 생화학전 관련 자료들을 미군에 넘기고,

그 대가로 단 한사람도 처벌받지 않았다.


2. 보급전

 

ㅡ 몽골군의 전술에 변화를 준 요인은 고려 내부에서 일어난 정보 누설이었다.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이현이 몽골군 사령관 야굴에게 "고려의 수도는 강화도에 있는데,

모든 세금을 본토에서 거둬들입니다. 그렇게 거둬들인 세금은 모두 가을에 강화도로 보냅니다.

그러니 세금을 강화도로 보내기 전에 처들어가서 강화도로 가는 조세 운반로를 끊는다면, 결국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ㅡ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수륙병진정책을 실시했다.

식량과 물자야 육로로 옮기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선의 육상 도로사정이 매우 나빴고 조선땅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의 물자 수송을 방해했다.

 

ㅡ 나폴레옹은 영국의 해상 무역에 타격을 줄 계획을 수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집트 원정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영국과 인도의 중간지점으로 중계무역거점이었다. 하지만 끝내 이집트 원정은 실패하고,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도 영국 해군이 프랑수 해군을 격멸함으로 영국의 해상무역은 번영을 누렸다.

 

ㅡ 나폴레옹은 영국의 경제력에 타격을 주어 굴복시키려 하였다.

유럽의 모든나라가 영국과 어떠한 교류도 하지 못하게 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린것이다. 대륙봉쇄령은 양날의 칼이었다.

영국과 교륙하지 못하는 다른 유럽 국가들도 영국처럼 물가가 올라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악화되고 국가 재정에 적자가 증가하는 등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었다.

영국은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맞서 유럽 각국의 해안을 봉쇄하는 정책을 펼쳤다.

다른 유럽국가들은 외부에서 물자를 들여오거나 수출로 돈을 벌수도 없었다.

결국 대륙봉쇄령에 반발한 러시아가 영국에 곡물을 수출하자,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응징하러 떠난 것이다.

 

ㅡ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패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그가 이끈 군대는 프랑스인을 제외하면 모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에스파탸 등 동맹국에서 모집한 군사들로 그의 힘에 패하고 억지로 동맹을 맺은 나라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전투험이 부족해 나폴레옹의 강행군을 잘 견디지 못했다.

여기에 보급 부대의 붕괴로 제대로 먹지도 못해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ㅡ 러시아의 도로 사정은 매우 열악해 수레의 행진속도가 매우 늦어졌고 거기에 말들이 먹을 마른 풀도 부족하다보니

상당수의 말들이 굶거나 병들어 죽었다.

 

수십만은 족히 되는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부대끼며 지내니 자연히 위생상태가 나빠졌다.

이로 인해 각종 전염병이 퍼지기 딱 좋은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나폴레옹 군은 보급부대가 늦어지자 궁여지책으로 러시아 현지 농민들을 상대로 식량을 강제로 징발하게 된다.

이로 인해 침략군에 대한 분노로 만들어진 러시아 농민 게릴라 부대들은 나폴레옹의 군을 괴롭혔다.

 

ㅡ 그나마 원정 초기에는 전투도 별로 없었고 춥지도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략 12만명 정도가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죽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탈영병 수는 제외했다.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철수하게 된 것은 모스크바의 화재로 인해 식량을 구할수 없었고,

보급부대가 제때 도착하지도 못했다.

마침내 10월 무렵 나폴레옹은 원정군을 이끌고 철수했으나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어 러시아의 강추위가 몰아쳤다.

나폴레옹의 70만 대군은 스스로에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하여 자멸하고 마는, 진흙으로 만든 거인이었을 뿐이다.

 

미국이 나치를 막기위해 무제한적으로 소련에 군수물자와 식량을 공급해준 사건을 '랜드리스 작전'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소련은 보급의 걱정 없이 독일과의 전쟁에 전념할 수 있었다.

처음에 미국과 영국은 공산주의를 위협요소로 여기고 있으니, 독일을 동맹국이라 생각했으나,

히틀러가 폴란드, 프랑스마저 점령하고 영국을 폭격하자, 미국은 반드시 섬멸해야하는 적으로 간주했다.

여전히 미국내에는 소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반공주의가 강해 루즈벨트 대통령의 랜드리스 법안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이웃집에 불이나면, 소방호스를 빌려줘야 한다"라며 소련 지원을 강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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