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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20.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by leeesssong 2020. 3. 13.

한줄평 - 알면 알수록 재밌는 독일의 역사


ㅇ 본문

 

1. 시초 배경

 

두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인적, 물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혁신적인 전술 기법으로

수년간 성공적인 전투를 수행할 있었던 독일의 지휘철학은 과연 얼마나 우수한 것이었을까?

 

클라우제비츠가 전략을 정치의 일부로 보았던 반면,

몰트케는 전략을 전쟁 개시단계부터 종결단계까지 최초부터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행동'으로 인식했다.

 

슐리펜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의 본질이라 규정한 마찰요소들을 무시했다.

신속한 작전적 승리를 중시한 반면 전쟁수행의 전략적 관점, 예를들어 경제전쟁 또는 심리전과 같은 요소들은 경시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정규 군사작전 이후 사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결과 국민전쟁이나 게릴라전을 예측하는데 실패했다.

 

총체적인 전략적 개념이 부재한 전쟁에서는 공자가 아무리 신속한 기동전을 구사하더라도 승리를 보장받기는커녕

오히려 패배를 면할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독일 육군의 '작전가'들은 통상적으로 군수분야를 경시하는 수준을 넘어 군수문제를 철저히 배제했다.

 

ㅡ1871 독일제국 건국 이후 2 세계대전의 패망에 이르기까지

독일군 총참모부는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다.

양면전쟁에서 승리할 있을까? 만일 승리할 있다면 어떻게 전쟁을 수행해야 할것인가?

 

독일은 매우 비관적이었던 유럽의 정중앙이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위치하고 동맹국이 서로 떨어져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내선을 최대한 이용하여 양면전쟁을 수행할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적들이 외선에서 집중적인 공세의 이점을 활용하기 전에 적들을 각개격파하면 된다는 것이다.

 

기본전제는 영토 내에 충분한 종심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고, 다음 중요 전제조건은 아군의 신속한 기동능력이었다.

 

지휘의 분권화도 독일의 작전적 사고를 발전시키는데 영향을 미쳤다.

 

외선에 위치한 국가들은 장기전을 감당할 있는 강점을 지닌 반면,

내선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국가는 적이 전투력을 최대한 활용할 있는 상황이 도래하기 전에, 단기전,

속전속결을 도모해야 한다. 따라서 시간은 내선과 외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쌍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변수이다.

 

모든 제대의 군지휘관들은 승리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들의 전투력을 시공간과 조화시켜야하며,

이것이 공간, 시간과 전투력이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다.

 

대규모 육군일수록 공간에서 지휘 조정, 통제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복잡한 보급의 문제도 야기된다.

 

전투, 회전 그리고 전쟁에서 수적인 우세는 승리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대규모 육군의 지휘와 보급의 문제들이 무시되고 있다.

 

수적 열세한 쪽이 적의 우세를 상쇄하기 위한 방책이 몇가지 있다.

1. 양호한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의 이점 활용

2. 국지적인 아군 수적 우세를 달성(집중)하여 적의 일부를 격멸

3. 월등히 우수한 교육훈련과 지휘능력 통해 상대보다 질적우위 달성

 

몰트케는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병력문제에 직면했다.

병력 증강에 관한 문제는 비스마르크의 정치력에 희망을 걸었고 본인이 찾아낸 해법은 '분진합격'

분산해서 기동하고 집중해서 적을 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몰트케는 대부대급 지휘관들에게 그들의 임무달성을 위한 폭넓은 독단 활용을 보장해주기로 결심했다.

 

책임의 분권화를 증대시켜 수직적인 지휘구조와 지휘수준을 수평적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투에 관한 공동의 사고로 이어진 통찰에 의해 부대지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임무형 지휘) 이러한 지휘방식에는 2가지 기본전제가 존재한다.

1. 하급자에 대한 신뢰,

2. 장교단의 일관성 있는 교육훈련

 

때부터 독일군의 명령지에는 '상급지휘관의 의도' 일개 항으로 명시되었으며

항목은 오늘날까지도 작전 명령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장교가 스스로의 판단으로 행동해야하는 상황이 수차례 있을 있다.

명령을 수령할 없는 순간에 명령을 기다리는 행동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몰트케.

 

몰트케의 작전적 사고는 대규모 육군을 야전군 단위로 편성함으로써 독단적으로 행동할 있는 부대로 만들고,

철도를 통해 신속한 기동과 군수보급을 가능토록 하였으며,

지침을 통한 지휘로 분산된 대부대를 지휘할 있게 만들었다.

 

정면공격이 어렵다는 전술적 추론을 도출한 몰트케는 다른방법을 찾아냈다.

방어작전 간에는 역습에 의한 전술적 기동방어 효과 / 공격작전 간에는 정면공격과 동시에

측방으로의 기동을 통해 적을 포위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아군의 분산기동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회전(작전)에서 적을 신속하게 격멸시켜야 한다는 !

'전쟁의 목적은 전투를 통해서만 완벽하게 달성할 있고, 전쟁의 주목표는 오로지 전장에서 부대를 격멸함으로써,

회전을 통해서만 달성할 있다.' 몰트케.

 

몰트케는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서 정치 우위를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전쟁사에 관한 접근법에 관심을 이유는 교육훈련 차원에서 평시에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장교들이

성공적인 작전수행의 사례를 연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장차전의 전쟁수행을 위해 전쟁사적 교훈을 도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제국군 사관학교의 전술교관은 전쟁사교관을 겸임했고 오늘날 연방군에서도

장교양성과정에서 군사사 과목과 연계된 교육훈련을 위해 많은 전쟁사적 사례들이 요구되고 있다.

 

'우익을 강화하라' 슐리펜.

1891 총참모장 취임 직후 양면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대비한 자신만의 작전적-전략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순차적인 단일 정면전쟁으로 분리한다는 개념으로, 차례대로 방면의 적을 격멸하고자 했다.

두 개의 적군중 하나를 섬멸하되 매우 신속하게!

동원 속도면에서 프랑스가 러시아보다 빠르고 프랑스의 방어지대 종심이 얕았기 때문에

슐리펜은 프랑스를 먼저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러시아와의 타협을 구상하게 되었다.

 

수적인 열세에서 승리할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적의 일부에 대해 수적 우세를 달성해서 가능한 기습적으로 적군을 섬멸하는 것이다.

, 양면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속전속결을 통한 섬멸회전이라 인식했다.

 

슐리펜이 인식한 섬멸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적국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닌 군사력의 무력화였다.

전쟁도구인 육군의 무력화를 의미했다.

 

슐리펜은 임무형 지휘를 경고했다.

'모든 장교들이 상급지휘관의 의도대로 행동할 없다면, 전세는 불리해지고 결국에는 패배를 면치 못하게 된다. 독단성.. 참으로 좋은 능력이지만 하급지휘관들은 그로 인해 엄청난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슐리펜은 자신의 후임자 소몰트케에게 '대프랑스 전쟁'이라는 비망록을 넘겨주었다.

비망록은 슐리펜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지만 사실상 양면전쟁을 위한 슐리펜의 계획이 아니라

오로지 프랑스와의 전쟁만을 위한 전역계획이었다'로이텐' 아닌 '칸나이' 지향하고 있었다.

 

계획만으로 실질적인 모든 마찰요소를 제거할 있었을까?

실제로 적을 수동적으로 움직이도록 강요하고 그들의 행동을 제어할 있었을까?

전투 상황 하에서 보병은 충분한 거리를 신속히 행군할 있었을까?

신속한 기동전 수행을 위해 과학기술적 보조수단은 존재했던 것일까?

공격작전 군수지원은 원활했을까?

독일 육군의 병력 규모는 공세를 취하기에 적합했을까?

회전 승리에 이어 발생할 있는 국민전쟁을 감안했을때 전쟁을 어떻게 종결시켜야했을까?

실패할 경우 대체 가능한 대안이 있었던 것일까?

소모전으로 치닫는 불상사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었는데, 그에 대한 대안이 있었을까?

 

슐리펜과 소몰트케는 물론 많은 군사이론가들도 이러한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슐리펜은 차례의 전쟁연습에서 보여주었듯 그러한 문제들을 무시했다.

 

기동성과 관련하여 철도기술 면에서는 절정기를 맞았던 반면, 도로와 지상을 이용한 차량화는 철저히 경시했다.

 

그러나 슐리펜 외에도 거의 모든 수뇌부 인사들, 군사 전문가들이 군수분야를 경시했다.

 

ㅡ슐리펜 뿐만 아니라 다른 군사 전문가들도 성공적인 회전 이후

전쟁을 어떻게 종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결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위험천만한 국민전쟁과 소모전쟁양상이 벌어지면 독일은 절대 승리할 없다는데 모든 군사 전문가들은 동의했다.

따라서 회전에서 승리하려면 전쟁에서 승리할 있다는 개념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2. 1 세계대전(1914~1918)

 

서부의 전쟁양상은 기동전이 아닌 소모전이었다.

독일군은 국경회전에서 줄곧 승리를 달성했다. 하지만 적을 포위하거나 섬멸하는데는 실패했다.

 

서부전선은 스위스 국경으로부터 도보해협까지 수백km 달하는 막대한 수효의 진지들로 교착상태에 빠져버렸다.

동부에는 육군의 1/8 해당하는 전력, 8야전군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가 8군을 지휘하여 완전한 포위망에 가두고 섬멸적인 타격을 가했다.

'탄넨베르크의 영웅' 탄넨베르크 회전의 신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서부전선에서 소몰트케는 자신의 작전적 신념에 따라 좌익을 강화시켰다공세 초기의 기습은 확실히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슐리펜이 우려했던 것처럼 연합군 부대가 결정적 회전을 회피하고 철수하는데 성공했고, 독일군의 공세가 작전한계점에 다다르자 연합군은 순간 역습을 감행했다.

 

기습의 효과를 상실한 이유는 2가지이다.

기관총과 현대적인 화포 때문에 전술적으로 방어가 공격보다 훨씬 우세했으며, 독일군의 기동속도가 적을 포위하기에는 충분히 빠르지 못한 탓이었다.

 

동부에서도 독일군의 공세 속도가 철수하는 적을 포위하기에는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동부의 일부지역의 교통망은 실로 참혹한 수준이었고 러시아의 광활한 영토에서 기동전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루마니아 전역 또한 전술적-작전적 수준에서는 우세를 달성했지만 전쟁수행 간에 작전적-전략적 한계로 결국에는 실패를 거듭했다. 수차례 시도된 양익포위작전은 병력부족과 병참선의 과도한 신장으로 악화된 보급사정, 지리, 기상 조건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은 신속한 기동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1 대전에서는 독일은 서부에서는 작전적 사고의 전술적 한계를, 동부에서는 전략적 한계를 드러냈다.


3. 1 대전이후~2차대전 이전(1918~1939)

 

패전의 책임을 인물에 전가함으로써 작전적 사고의 근본적인 타당성에 관해서는 전혀 논의되지 못했다.

독일은 우수한 작전적 수준의 전쟁지도능력과 전술적 혁신을 이루고도 인적, 물적인 자원의 열세를 극복할 없었으며

따라서 소모전에서는 결코 승리할 없다는 1 대전의 교훈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았다.

 

군은 정치에 무관심했고 패배한 이후에도 정치와 동떨어져 오로지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에만 매달렸다.

 

제국군 수뇌부는 작전적-전략적 차원에서 실질적인 패인에 관한 연구를 거부했다.

반면 전술적 수준의 전쟁경험은 매우 면밀하게 분석했다.

 

-군부 엘리트들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사력 보유에 제한(징병제 금지, 총참모부 해체, 항공기 잠수함, 전차 보유금지)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허용된 10 명의 육군 만으로도 단지 일부 전술적-작전적 요소들만 새롭게 개선하면 독일의 패권적 지위를 회복할 있다고 확신했다.

 

한스 젝트, 1920~26 총사령관

지휘자의 군대, 엘리트 군대를 만들고자 했다.

참모조직에 장교의 보직 비율을 높이고 병사들이 차상급 지휘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있도록 교육하여

베르사유 조약의 규제가 폐지될 미래를 미리 준비했다. 비밀리에 공군을 창설했으며 소련 영토 내에서

항공기 조종사 훈련 화학무기와 전차부대를 운용하는 훈련을 시행했다.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바로 '기동전'이었다. 월등히 우세한 적과 조우시, 그리고 지역에서 또는

차후에 공격작전으로 전환할 있을 경우에 한해서만 방어작전을 허용했다.

 

히틀러가 집권한 1933 이후 군사력 증강에 따라 1920~30년대의 수세적 태도를 버리고

마침내 공세적인 의도를 다시금 표출했다.

결국에는 장기전을 대비한 종적 군비증강이 아닌 단기전을 위한 횡적 군비증강 정책을 채택하고 말았다.


4. 2 세계대전(1939~1945)

 

속전속결로 폴란드를 무너뜨리고 소련과도 동맹을 체결하게 되자 동쪽의 위협이 사라졌다.

이로써 유럽대륙에서 프랑스와의 대결, 단일 정면전쟁만이 남게 되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전혀 예상치 못했었고 그에 대한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데다 서부에서의 공세 계획도 없었다.

작전적 교육훈련이 부족하다는 사실도 이미 확인되었고 폴란드 군과의 전투에서 전술적 훈련 수준도 높지 않았고,

육군의 장비성능과 물자 보유량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국방군이 짧은 기간 내에 창설되면서 초래된 결과였다. '계획하지 않았던 전격전'

 

독일 육군의 157 사단 16 사단만이 완전히 차량화되어 있었다.

90%부대들은 1 세계대전에서처럼 도보나 말을 이용해야 했으며, 1차대전 당시보다 낙후된 무장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오늘날까지 독일 국방군은 많은 이들의 뇌리속에 '완전한 기계화로 전격전 군대' 각인되어 있지만

이는 완전히 날조된 나치 선전의 결과물이었다. 실제로 독일 육군은 여전히 말과 마차의 군대였다.

2 대전에서는 1 대전보다 두배 이상의 말이 투입되었다. 대부분의 병사들도 겨우 수주일 간의 훈련을 받은 신병수준이었다. 결국 독일 육군은 차량화뿐만 아니라 무장면에서도 매우 열악했다. 병력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자 장교의 숫자가 대폭 늘었고 따라서 장교단의 통일된 전술관도 기대할 없게 되었다.

 

연합군의 계획 입안자들의 믿음은 너무도 확고했다. 독일이 전쟁을 다시 일으킨다면

재차 슐리펜 계획을 실행하리라 믿었다. 독일 측에서도 슐리펜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다.

 

만슈타인은 1940 독일의 작전적 사고의 원칙들,

이른바 포위, 중점형성, 주도권, 속도, 공세, 기습, 모험감수, 기동에 기반을 작전계획을 내놓았다.

훗날 '지헬슈니트(낫질작전)' 알려진 계획의 중심에는 신속하고도 기습적진 전쟁종결을 지향하는

섬멸회전의 사상이 내재되어 있었다.

 

북부에서는 B집단군이 슐리펜 계획을 재현하듯 양공작전, 남부에서는 C집단군이 수세를 취하는 동안,

기계화부대와 공군의 주력으로 편성된 A집단군이 중부에서 공세의 중점을 형성했다.

마침내 거대한 포위망이 구축되었고 연합군의 주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독일군 기갑부대의 진격이 중지되지 영국은 그틈을 됭케르크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철수시켰다.

따라서 만슈타인이 의도했던 전략적 승리 대신 평범한 작전적 승리에 만족해야했다.

 

C집단군의 일부도 이에 호응하여 마지노선을 공격,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대규모 섬멸전으로 남부의 프랑스군을 사면초가에 빠뜨렸고 결국 프랑스는 항복을 선언했다.

 

기계화부대의 속도는 군부의 상상을 초월했다.

집단군 사령부는 보병과 기계화부대의 간격에 따른 측방위협을 우려한 나머지 기갑부대의 진출 속도를 보병사단에 맞추라고 했다그러나 구데리안, 롬멜과 같은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임무형 지휘를 내세워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측방을 노출시킨채 계속 공세를 감행했다.

 

이러한 갈등은 모든 제대에서 발생했고, 따라서 군 위계질서를 저해하는 권력투쟁으로 번지게 되었다.

 

영국은 평화조약은커녕 독일의 대륙 지배권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른바 '바다사자 작전'으로 영국본토 침공을 시도했지만 영국과의 공중전에서 패배한 이후 이를 포기한다.

 

영국과의 공중전에서 패배하자 할더는, 영국에 대한 속전속결이 이상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품었으며

동부에서만큼 전쟁이 발발한다면 공세적으로 영토를 방위하고자 했다.

 

ㅡ1941 6 8, 총통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명명된 최종 공격명령에서 자신의 작전적-전략적 구상을 밝혔다.

할더는 적군 격멸을 계속해서 주장했지만 히틀러는 소련군의 섬멸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전시경제를 위한 중요지역 점령을 작전목표로 선정했다.

하지만 소련군의 섬멸 이후 어떻게 소련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도 결정된 바가 없었다.

 

총참모부는 처음부터 열세를 전제로 계획 수립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실질적인 규모, 전투력을 과소평가했다.

독일은 스스로 전쟁수행능력의 우위를 확신했고 또한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가 조기에 분열되어 지리멸렬하리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대몰트케와 슐리펜, 팔켄하인이 엄중히 경고했던 러시아 영토의 광활함과 무한한 인적 동원능력을 경시하고 말았다.

 

독일 정부와 군부는 소련의 주요 산업지대를 점령한다면 경제가 마비, 붕괴된 소련이 스스로 항복해오리라 판단했다.

 

속도 위주의 기동전에서 광활한 작전지역을 감알할 기동성을 갖추고 공세부대를 후속할 있는 대규모 군수보급

체계가 필요했다. 수송의 중점은 철도에서 도로로 전환되어야 했다.

전투부대를 후속할 있는 트럭과 같은 수단들이 필요했으나 이를 생산할 있는 역량이 부족했다.

 

현대적인 기동전을 위해 군수의 중요성이 현저히 증가했음에도 수송과 보급분야는 경시를 넘어 무시되고 말았다.

 

공세초기 며칠동안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나, 소련군을 국경 인근 지역에서 섬멸하고자 했던 1단계 작전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고 소련군에게 타격을 주지도 못했다.

대부분의 보병사단들은 이미 러시아 전역의 초기단계에서부터 기계화부대의 속도를 쫓아갈 없었다.

보병사단이 포위망에 도달하지 않는 이상 기갑부대가 전진할 없었다.

 

기갑병과 지휘관들은 동부로 깊숙이 진출해서 대규모 포위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

히틀러와 육군 총사령부는 보병출신의 지휘관들과 합세해 소규모 포위망을 만들어야 한다고 맞섰다.

 

독일군 측에서는 심각한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속출했다. 병력과 장비 피해는 예상치를 훨씬 초과했다.

전투부대들에 대한 보급자체가 매우 어려웠고 전선 후방지역 곳곳에서 날이 갈수록 게릴라전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 전투력 부족, 피로가 누족된 상황에서

영하 20도의 혹한까지 덮쳐오자 진격을 멈출 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이미 작전한계점을 넘어선 상태였다.

소련군은 풍부한 동계전투경험과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부대들을 집결시켜 기습적인 역습을 감행하면서

소련을 상대로한 전격전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소련의 동계공세가 끝날 무렵, 90% 전차와 1/3 병력을 상실했다.

162 사단 가운데 단지 8~11 사단만이 공격 방어작전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있었다.

 

전쟁 말기, 연합군에게 제공권을 뺴앗긴 것도 문제였지만 한편에서는 유류 부족으로 전투를 제대로 치를수 없었다.

우선 보병사단들이 차량화 되지 못한 것은 전투차량의 부족때문이기도 했지만 유류도 궁핍했기 때문이다.

연합군은 끊임없이 차량화를 가속화시켰던 반면, 국방군은 오히려 우마차 군대로 퇴보해갔다.

 

히틀러는 애초부터 전략적 관점에서 인구와 경제의 중심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반면 총참모부는 전통적인 작전적 사고의 원칙에 따라 적군의 섬멸을 최우선적인 작전목표를 설정했다.

 

히틀러가 가장 기초적인 작전적 원칙들에 대해 무지했던 것처럼 지휘부도 전쟁을 전략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지휘하는 능력 면에서 부족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히틀러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오히려 장군참모장교들보다 전쟁을 현실적인, 현대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공세 개시 즉시 점령지에서 식량을 획득하여 군부대에 필요한 양을 보급한 나머지 모든 식량을 본토로 이송하는 전략을 수행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기아전략과 섬멸전략으로 러시아 주민들을 말살하고자 했다.


5. 결론

독일의 장군참모장교들뿐만 아니라 일선부대의 병사들과 장교들의 전술적인, 작전적인 전투능력 덕분에

부분적 성공을 거둘 있었다.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는 구조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들의 작전적 사고는 원거리에 위치한 대규모 육군을 전술적-작전적 수준에서 일사분란하게 지휘하기 위해 탄생했다.

독일군은 이러한 작전을 작전적-전략적 수준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독일군 총참모부는 작전적 지휘만을 중시하고 결국 전략적 상황을 간과했다.

장교들에게는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읽고 정치 자체를 제대로 인식하는 능력도 없었고 그러한 의지도 없었다.

전략적 사고의 본질은 바로 정치적 사고이다.

 

또다른 패배의 원인은 바로 작전지휘에만 몰두하고 군수분야를 경시했던 장군참모들에게 있다.

 

어쨌든 독일만의 전형적인 작전적 사고의 특성을 찾으려고 해도 그러한 특성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의 작전적 독트린은 충분한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 기반 없이 대륙국가로서의 패권을 거머쥐기 위한,

전략적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군사적인 시도'였다.

 

이렇듯 군사적 충돌을 추구할 밖에 없었던 까닭은 결국 불충반한 잠재력을 인정하고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거부했던 당시의 독일 군부와 정부 엘리트들의 무능함에 기인한다.

독일의 작전적 사고는 단순한 고육지책이자 궁여지책일 뿐이었다.

이른바 양지를 노리는 '빈곤한 자들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독트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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