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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17. 이라크 전쟁>

by leeesssong 2020. 3. 6.

한줄평 - 동맹국 미군이 피로 얻은 값진 교훈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발전시킬것인가? 

 

21세기에 필요한 지휘관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정치적 감각을 지니고 외교관으로 행동하는 능력까지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


ㅇ 서문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아니라 이라크 전쟁을 분석하는가?

미국은 2001 10월에 이미 아프가니스탄에 군사력을 사용했고, 2002년에는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이라크 전쟁보다

오랫동안 미국을 괴롭히고 있으며, 따라서 지난 10 동안의 국제정치를 파악하는데 좋은 소재가 될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라크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전쟁보다 국제정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소재다.

 

첫째,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보다 이라크 전쟁에 많은 자원을 투입했다.

이는 미국의 상대적 힘의 약화와 중국의 부상이라는 국제정치의 변화를 파악하는데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둘째, 이라크 전쟁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꾸준히 상황이 악화되고 1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상황이 호전되지 않고 있지만,

이라크 전쟁은 상황이 매우 극적으로 변화했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얻은 성공의 비결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적용하려고 것이며,

따라 향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전개 양상을 분석하려면 이라크 전쟁에서 나타난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셋째, 한국의 동맹국인 미국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 특히 이라크 전쟁처럼 미국이 오랫동안 수행하는 전쟁은 미국의 군사력 구조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더욱더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다.

 

미래의 전쟁과 이라크 전쟁

첫번째 예측은 전쟁 자체에 대한 것으로 '전쟁의 미래' 새로운 무기체계를 개발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사용할 새로운 군사 조직을 창설하는 행동과 관련된 것이다.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가' 군사력의 형태와 새로운 무기 군사기술에 대한 논의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두번째 예측은 전쟁 자체의 변화가 아니라 전쟁을 사용하는 정치적 환경의 변화, 특히 국제체제의 구조에 따른

국제정치의 변화가 전쟁에 영향을 주면서 나타나는 변화에 관한 것이고 이것을 '미래의 전쟁'이라고 부를 있다.

'어떤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는가' 군사력의 형태보다는 군사력 사용 방식과 목표 등이 핵심 사안이다.

 

미국은 '전쟁의 미래' 대해서는 정확하게 예측했지만, '미래의 전쟁' 전망하는데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미래의 전쟁에 대해 냉정하게 예측하기보다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기초해 전략을 구상했다.

 

책은 '이라크 전쟁의 정치 군사사'이다. 맥락의 핵심은 군사적 정치적 상황이다.

 

사우디의 지지를 받는 수니파 vs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이라크의 운명을 놓고 대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방향감각을 상실했으며 군사력은 낭비되고 정책은 표류했다.

 

21세기에 필요한 지휘관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정치적 감각을 지니고 외교관으로 행동하는 능력까지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


ㅇ 본문

 

1.이라크 전쟁의 배경

 

이슬람 세계 전체에서 시아파는 소수 종파이다.

이슬람 교도의 90% 수니파, 10% 시아파다. 하지만 시아파는 중동 지역의 이란과 이라크에 집중되어 있다.

때문에 중동 지역의 수니파 국가들은 '시아파의 위협' 두려워했다.

 

ㅡ1920 아랍인들은 종파를 초월하여 영국의 위임통치에 저항하였고

1958 쿠데타로 왕국은 붕괴하고 이라크 공화국이 탄생했고

1959 영국군을 이라크에서 철수시키는데 성공한다.

1963 또다른 쿠데타, 1968 또다른 쿠데타로 바트당은 정권을 장악하고

바트당의 주요 지도자였던 후세인이 이라크를 통치하게 되었다.

 

시라아와 이라크처럼 바트당이 집권한 아랍국가는 종교적 색채가 옅으며 민주주의를 구현하지는 않았으나

정치 영역의 독자성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세속적이고 근대적이었다.

 

후세인은 1970년대부터 핵무기를 보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시라크' 원자로 개발

ㅡ1979 이란혁명의 발발

1980 이라크-이란 전쟁, 초기 전투는 이라크가 승리했지만 이란이 반격에 성공하며 전선 고착,

8년간 지속되다가 1988 종식되었다.

1981 이스라엘은 오시라크 원자로를 폭격했고 이를 복구하지 못한 이라크는 결국 핵무기 계획을 중단한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채무가 생긴 이라크는 탕감을 요구했으나

채권국들은 이라크에 대한 채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는 1990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전'으로 이어진다.

 

ㅡ1990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의 원인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 이란과의 전쟁으로 파산 지경에 처한 이라크의 경제상황, 사우디는 이라크에 제공한 경제 지원을 탕감하지 않았음

둘째, 이라크는 항구가 하나뿐인 사실상 내륙국가다. 그러나 쿠웨이트는 4개의 항구를 보유했고 페르시아만으로의 수출이 용이하다.

셋째,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석유 가격을 유지하기 위한 OPEC(석유수출국기구) 합의를 어기고 할당량보다 많은 석유를 생산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사막의 방패작전', '사막의 폭풍작전' 통해 이라크를 제압했다.

군사기술의 차이도 있었지만 전투적 기량에서도 차이가 상당했다.

걸프전에서 미군을 중심으로한 연합군은 380명이 전사하고 776명이 부상한데 비해,

이라크의 병력 손실은2~35천명으로 추산된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전복하지는 않았으나 쿠데타로 전복되기를 바랬다.

시아파는 외부의 지원을 기대하고 수니파 중심의 후세인 정권에 도전했으나

후세인이 시아파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며 실패로 끝이난다.

 

걸프전 이후 미국의 이라크 전략은 억지와 봉쇄였다.

 

ㅡ2001 911테러 이후 미국은 알카에다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알카에다와 연결되어 있는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에

알카에다와 지도자인 빈라덴의 인도를 요구했다.

2001 10 7 특수부대와 CIA 아프간을 침공했다특수부대와 공군력만을 동원해 아프간에서 승리했다.

2006 들어 탈레반 세력의 반격이 시작되고 아프간은 혼란에 직면했지만 침공 이후 4 동안

미국의 아프간 침공은 성공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성공은 이라크에서도 성공할 있다는 부시 행정부의

낙관론으로 이어졌으며, '낙관론으로 전략을 대신'했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실패를 가져왔다.


2. 전투의 승리 그리고 전쟁의 시작(2003. 3~6)

 

전쟁은 낙관론과 비관론이 결합한 경우에 쉽게 발생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협상에 대한 비관론' '군사력 사용에 대한 낙관론' 동시에 존재했던 경우이며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비관론으로는 후세인이 WMD 만들고 있으며 이러한 시도를 막을수 없다는 인식,

이라크가 일단 핵무기를 보유하면 쿠웨이트를 침공했듯이 주변 국가, 특히 사우디와 쿠웨이트를

다시 공격할 것이라는 비판적 전망, 그리고 이라크가 핵무기 보유시 테러리스트에게 넘겨줄 것이고

결과 미국 서방 세계에서 핵무기 테러가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후세인은 다른 테러조직보다도 알카에다를 경계했으며 이들은 상극이었다.

알카에다는 후세인과 바트당이 추진하는 정교분리와 세속화 정책에 반대하는 극렬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수니파라고 같은편이라고 보면 안된다.

알카에다, 후세인, 쿠드르 모두 수니파이나 지극히 각자의 목적을 추구한다)

 

럼즈펠드는 RMA(혁명적 군사혁신, Revolution in Military Affair) 기초한 새로운 군사력이 지닌 정밀 타격과

정보처리 능력으로 강화된 10만명 미만의 병력으로 침공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육군은 침공 병력이 너무나도 적다고 보았다.

보스니아 등지에서의 평화유지군 활동 경험에 따라 미군은 질서유지를 위해서는 민간인 천명당 20~25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나 아프간에서 적은 병력으로 많은 인구를 통제한 경험으로 미뤄볼때 가능하다는

럼즈펠드의 의견에 막혔다.

 

ㅡ도시지역에서 질서를 유지하는데는 농촌보다 많은 병력이 필요하고 도시가 거의 없는 아프간과는 달리

이라크에서는 전체 인구 70% 도시에 거주하므로 실제로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전쟁 비용에 관한 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부분도 희망적인 관측과 낙관론이 엄밀한 계획과 전략적 판단을 대신했다.

 

ㅡ2003 3 20 바그다드 공습과 대기하던 지상군이 진격하면서 이라크 침공이 시작되었다.

5 1일부 부시 대통령은 '임무완수' 선언했다.

'전투'에서 미국은 완벽하게 승리했다. 하지만 '전쟁' 목적인 이라크 WMD 그때부터 찾아야 했으며,

이라크 민주화 또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GPS 사용해 목표물을 정확하게 파괴할수 있는 능력, 지상전투를 관제할수 있는 JSTARS,

많은 전투 정보를 처리해 실시간으로 지휘관에게 제공할 있는 능력 등은 미국이 보유한 군사력의

하드웨어적인 측면이었다. 이와함께 미군이 보여준 뛰어난 사격술과 야간투사경 사용방식,

그리고 국가훈련장(NTC)에서의 훈련으로 다져진 작전 능력 등에 힘입어 미군은 이라크군이 갖추지 못한

군사적 소프트웨어를 보유했다.

 

하지만 미군은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이었기 때문에 점령 행정을 담당할 충분한 병력이 없었고,

결국 전투 직후 질서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결국 미국이 방관하는 가운데 이라크 정부 재산과 행정 데이터가 소실되었다.

 

부시는 '임무완수' 선언하면서 승리자로서의 행복을 만끽했다하지만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았다.

바그다드는 약탈당했고 이과정에서 이라크 국가 행정에 필수적인 데이터가 사라졌다.

주민과 인구에 관한 데이터가 사라져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인명부를 만들수 없었고

선거로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려는 구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이라크에서는 미군 점령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연합군임시행정처는 이라크 군대를 해산하고 바트당 구성원을 모든 공직에서 몰아내면서

이라크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라크 전쟁은 점차 비정규전 양상을 띠었으며 이라크 내부의 정치 질서 구축이

핵심 문제로 부각되었다. 결국 미국은 전쟁 이전에 구상했던 단기 점령을 포기하고 장기 점령을 선언했다.

 

시아파는 대부분 미국의 침공으로 자신들이 혜택을 입었다고 보고 미국이라는 (American dog) 유용성을

인정했지만 일부는 이라크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미군이 즉각 철수할 것을 주장했다.

수니파는 미국의 침공으로 정권을 잃어 미국을 저주했다.

시아파도 수니파의 이러한 인식을 상당 부분 공유했으나 이것이 이라크라는 하나의 공동체 또는 민족의식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결국 미국의 점령이 연장되면서 이에 대한 무력 저항이 강화되었다.

미국은 이라크를 구성하는 세개의 집단(수니파, 시아파, 쿠르드족) 가운데 2개인 수니파와 시아파 무장집단과

군사적으로 충돌했고 이라크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 전쟁의 전개와 국가형성 그리고 악화되는 상황(2003.6~2006.2)

 

연합군임시행정청은 전후 복구를 담당할 정도의 물적 자원을 확보하지 못했고 인적자원도 매우 부족했다.

여기에 세개의 다른 집단으로 이루어진 탓에 민족 건설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이라크를 점령한 미국은 이라크 민간인을 보호하지 못했으며 이는 이라크인의 지지를 잃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시아파가 통제하는 이라크 정부는 정부군, 경찰과 별도로 민병대를 구성하고 자신들만의 군사력을 보유했다.

재건사업도 계획에 따라 추진되지 못했다.

 

미국은 현재 이라크에서 '고전적인 게릴라 전쟁' 처해있다고 시인했다.

럼즈펠드는 '게릴라 전쟁'이라는 표현을 피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의미가 같은 '저강도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현실을 수용했다.

 

게릴라 전쟁에 대한 전통적인 대응방식은 먼저 게릴라 전쟁을 기존 정부를 전복하려는 '반란세력(Insurgency)

군사행동으로 규정하고, 기존 정부가 반란 세력에 대응하는 대반란작전(COIN, Counterinsurgency) 펼치는 것이다.

이는 평화유지작전(PKO, PeaceKeeping Operation) 유사하며, 군사작전의 주요 목표는 적군의 섬멸이 아니라

반란 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허물어서 기존 정부에 대한 일반인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이후 최초의 게릴라 전쟁에 직면했지만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력을 사용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았다. 게릴라가 등장하는 지역을 파괴하고 게릴라 동조자를 무조건 체포하는 방식으로

게릴라 지지세력을 말살하려 했다.

 

ㅡ2004 발생한 2개의 전투는 이라크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전투의 여파는 2007 이라크 전쟁의 '정치적 환경' 결정했다.

1 팔루자 전투 : 미군 VS 수니파, 나지프 전투 : 미군 VS 시아파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실패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미국의 문제는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전쟁을 자신이 선택해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 육군은 '육군 개념' 집착한 나머지 상대방이 2 세계대전의 독일군이나

냉정기간의 소련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게릴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일반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Winning the 'hearts and minds') 해야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무조건 포격으로 대응했으며, 과도한 화력은 민간지역에 피해를 입혔다.

또한 저항 세력의 거점에서 "문을 박차고 진입한 다음 눈에 띄는 모든 물체에 두발씩 발사"하는 훈련을 받았고

이는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선거로 구성된 이라크 정보 또는 이라크 국가는 국민 전체의 이익을 반영하기보다는 다수파인 시아파가

소수파인 수니파를 억압하는데 사용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이에 수니파는 저항했으며 이라크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종파분쟁으로 변화했다.


4. 이라크 내전의 폭발(2006.2~2007)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경찰과 군대가 출동해 질서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라크에서는 시아파가 경찰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 오히려 앞장서 수니파를 공격하고

수니파 성지와 사원을 파괴했다.

이에 수니파는 시아파 시아파가 장악한 국가권력의 공격에 맞서 알카에다와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생존을 위해 시아파와 대결했다. 과정에서 이라크 전쟁은 미국에 대한 저항 세력의 공격이 아니라

시아파와 수니파가 대립하는 종파내전으로 변화했다.

 

이라크 알카에다 조직은 미국의 침공으로 만들어졌으며 이라크 알카에다는 이라크를 장악하고

자신들의 테러리스트 기지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미군이 이라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게 다음, 쿠데타로 시아파 정권을 무너뜨리고

수니파 정권을 다시 세우겠다고 공언했다.

 

시아파 민병대에는 대표적인 2가지가 있다. 바드르 군단과 마흐디군이다.

이들은 내부에서 갈등이 있으며 무력충돌을 불사했고 사상자까지 발생했다.

마흐드군은 바드르 군단과 이들을 비호하는 이라크 보안군을 공격해 도시들을 장악했으며

이과정에서 이라크 정부의 공권력은 무력화 되었다.

그리고 시아파 중심의 이라크 보안군은 수니파 주민들을 공격했다.

 

이라크 북부를 비롯해 터키 동남부, 이란 서부, 시리아 북동부 지역에 거주하는 쿠드르족은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고 오래된 민병대 군사조직을 갖추고 있다.(페시마르가)

쿠르드족 민병대는 미군과 연합해 이라크 침공에 가담했다.

 

바그다드는 이라크에서 가장 시아파 거주지역이자 가장 수니파 거주지역이었다.

바드다드 전체 인구 600만명 가운데 수니파는 200만명, 시아파는 400만명이다.

이들은 바그다드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충돌했다.

 

시아파는 처형조를 운용해 소규모 병력이 수니파 지역으로 들어가 주민을 납치 또는 고민하였다.

이에 수니파는 경찰의 비호를 받지 못했기에 대담하게는 행동하지 못하고 알카에다의 지원을 받아

휴대용 로켓을 발사하거나 박격포 사격을 실시했다. 특히 많이 사용된 방법은 자살공격이었다.

수니파 시아파 모두 애용했던 것은 사제폭발물(IED)였다.

 

IED 간단한 포탄에 전선 연결에서부터 유선 폭발장치가 무선장치로 진화했고 미군이 전파방해를 사용하자

자동 폭발하는 IED 등장했으며 적외선 기폭 장치를 사용한 첨단방식의 IED까지 등장했다.


5. 증파전략 그리고 안정화(2007.1~2011.8)

 

드디어 미군은 이라크 전쟁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을 찾아냈다.

병력을 집중하지 않고 소규모로 분산 배치해 주민보호(Population Security) 우선시하고,

동시에 수니파의 희생을 방치하고 그들을 이라크 알카에다 조직의 동조자로 취급하기보다 수니파의 안전을 담당할

수니파 경찰군을 창설하고 이를 동원해 이라크 알카에다 조직을 소탕하는 방법이었다.

 

미군은 종파내전에 개입해 문제의 근원인 시아파 민병대의 수니파 주민공격을 방지하는 동시에

이라크 알카에다 조직에 대한 수니파 주민의 지지를 약화시키는 방법을 썼다.

 

이라크 전쟁을 '내전'으로 인식하면 내전의 당사자인 집단은 동등해지며,

미국은 어느 편만을 지원하지 않게 된다. 미군은 앞으로 내전을 종식하는데 집중하며,

내전의 피해를 입은 이들을 종파와 무관하게 지원할 것이라고 의지를 표명했다.

이러한 군사 행동이 증파 전략의 핵심이었다.

"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적을 사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We cannot kill our way out of this war)" 라는 인식이 구체적인 군사작전에 투영된 것을 보여준다.

 

이전까지 미군은 '소탕'하되, '장악' '건설' 이라크 정부와 보안군이 담당하는 방식이었으나,

새로운 전략에서 미군이 '소탕, 통제, 장악' 모두 직접 담당하면서 병력을 24시간 배치하게 된다.

 

합동치안초소는 대개의 경우 대대 병력이 주둔하고 한번에 1 중대가 작전했으며,

전투초소는 중대 병력이 배치되어 개별 소대가 순환하면서 근무했다.

주민과 같은 지역에 거주하면서 하루 24시간 순찰하고 활동하게 되었다.

 

ㅡ2007 6 바그다드 벨트에 대한 군사작전(Operation Phantom Thunder)으로 알카에다 조직 구성원과

저항조직의 중요 인물이 사살되고 체포되었다. 동시에 시아파 처형조의 움직임도 차단되면서 수니파에 대한

시아파의 압박이 사라졌으며 이라크 알카에다 조직의 세력도 약화되었다.

 

폐쇄되었던 학교와 병원, 시장 등이 다시 작동했고 거리에 아이들이 나와 놀기 시작했으며 여성의 외출은 가능해졌다. 공격이 줄어들자 거리에 다시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상업활동이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개선된 안전 상황을 정치적으로 공고화하는 동시에 이를 해칠 있는 이라크 알카에다 조직과

마흐디군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여전히 과제로 남았다.

 

증파의 성공이 전략적인 성공은 아니었다.

특히 이라크 정치가 기본적인 갈등조정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시아파가 이라크 정부를 장악하면서

수니파의 이익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라크 정부와 사법 당국은 수니파 저항 조직과 시아파 민병대에 다른 기준을 적용했다.

국가 기능이 제도화되지 않고 정부가 종파에 따라 공정하게 않게 행동하는 것이 이라크 문제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증파 전략은 이라크라는 국가의 통합성을 해치고 부족의 힘을 강화하는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라크의 수니파는 이라크 국민 또는 수니파란느 정체성이 아니라 개별 부족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며 결국 이라크 전체의 통합성이 약화된다.

 

이러한 문제점을 고려하더라도 증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그것으로 문제의 근본 원인은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증상은 확실히 치유했다.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려면 이라크 정부를 변화시켜야 했으며

특히 시아파가 장악한 국가권력을 수니파도 합법적으로 행사할 있어야 했다.

 

ㅡ2010 8 19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미군 전투여단까지 이라크를 떠났다.

이라크 침공 작전이었던 '이라크 자유작전' 공식적으로 종료되고 미군 군사고문단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새벽 작전' 시작되었다미군 철수 이후 미국은 이라크 상황 통제를 위해 국무성 조직을 강화했다.

 

여전히 시아파는 수니파를 탄압하고 있으며 알카에다 또한 세력을 키우고 있다.

또한 수니파 시아파 사이의 갈등과 함께 쿠드르족과의 갈등도 발생하고 있다.

쿠드르족은 단순한 자치를 넘어 독립국가를 구성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터키와 이란 등에 거주하는

쿠드르족의 독립 움직임도 부추겨 중동지역 전체에 불안전성을 불러일으킬 우려도 크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새로운 행정부의 구성,

특히 수니파와 쿠드르족의 이익이 적절하게 반영되는 연립정부를 구성하는데 있다.

 

미군 지휘관들은 이제 단순한 전투능력만이 아니라 도시를 관리하고 문화적으로 다른나라와 교류하며 홍보를 하는데도 상당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 지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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