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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Archive/기타 군사자료

중동분쟁 총정리 (from 뉴스멘터리 전쟁과 사람)

by leeesssong 2021. 9. 22.

출처#1. https://www.youtube.com/watch?v=E4kpO641vLs 


ㅇ이스라엘 건국과 1차 중동전쟁

토지를 가지지 못하고 전 세계에 돌아다니며 살고있던 유대인.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지식인들도 유대인들이 많았음.

이들은 상업과 엔지니어링 등에 유능함을 알고 있었고 이로 인해 유럽에서 천대받기도함.

 

1차대전 당시 전쟁자금이 부족했던 영국은 유대인에게 손을 뻗음.

벨푸어 외무부장관이 1917년 11월 2일, 벨푸어 선언 시행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를 수립하는데 동의하겠다고 발표

 

2차대전 당시, 600만명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

유대인들은 나라가 없으니 학살을 당한다고 생각함. 더이상 유럽에 살수 없다고 생각함.

시오니즘이 등장. 

(유대인들이 조상의 땅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

 

나치즘이 등장하고 20만명이 이주.

1947년 60만명이 집단 이주.

 

PLO의 목적이 나라를 설립하는것.

오히려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유대인들의 입장이 되었다.

 

ㅇ유엔 총회 결의안 제181호(1947년 11월 29일)

ㅡ 팔레스타인 영토의 56%는 유대인에게 주고, 나머지 43%는 아랍민족에 배분한다.

ㅡ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국제관리지구로 지정한다.

 

1948년 1월 

팔레스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아랍 제국 지원병 부대 창설

성전군이 예루살렘을 봉쇄해버린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 선언

건국 선언과 동시에 개전.

 

당시 이스라엘 65만명 VS 아랍연맹 1억명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함.

이스라엘의 전쟁영웅들이 유대계로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들이었고 

반면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연맹은 실전경험도 부족했고, 제병협동능력도 부족했다.

또한 각자 자기잇속을 챙기느라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내것부터 챙기자라는 마인드.

 

소련이 중동에 영향력을 키우고자 체코의 무기를 이스라엘에 공급한다.

독일 무기의 생산기반시설이 갖춰진 체코는 공업력이 좋았고 이를 수출함.

이스라엘은 나치 독일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것과 같았다. 

오히려 아랍연맹은 영국군이 놔두고 간 장비들을 활용해서 전쟁을 치룬다.

2차대전의 반대 그림이 나온다.

 

동쪽의 예루살렘 탈환전

당시 요르단군은 방어에는 능했지만 공격에는 아주 미흡했음.

역으로 이스라엘이 밀고가지만 이스라엘도 구시가지를 함락시키지 못한다.

 

북부에서는 시리아 레바논이 가볍게 격파된다. 

 

남부에서는 이집트 군의 주력이 네게브 사막으로 분산되었고 

마을 정착촌하나 점령하지 못한다. 보급선도 길어지고..

지연전, 지구전으로 가다가 휴전협정으로 끝난다.

 

아랍연맹에서 승리같은 전투도 있었다. 

그러나 승리하려는 순간에 병력을 빼는 경우가 많았다.

왕정파와 반대파의 알력싸움으로 인해 상대편이 좋아질까봐 승리를 챙기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충격과 공포'를 활용해 팔레스타인 65만명이 이주하게 된다.

 

중동은 4천년이 넘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오래전부터 국제정세가 개입된 중동전쟁이다. 지금은 더 넓어졌다.

중동문제는 절대 하나의 프레임으로 판단하면 안된다. 

지리적, 경제적, 군사적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 이슬람 종교의 역사는 깊다. 

 

1956년 2차 중동전쟁 ㅡ 수에즈 전쟁 / 전쟁은 이스라엘 승, 전략적으로는 이집트 승

1967년 3차 중동전쟁 ㅡ 6일 전쟁 / 공군 기습의 중요성, 이스라엘 승

1973년 4차 중동전쟁 ㅡ 욤키푸르 전쟁 / 

(1차때는 소련이 이스라엘, 4차떄는 아랍연맹을 도와준다.)


ㅇ 중동 최초의 암살단, 아사신

분쟁지역에서 암살은 일상생활이다.

 

수니파의 후계자 아부 바크르, 비율 90% ㅡ 사우디

시아파의 후계자 알리, 비율 10% ㅡ 이란

시아파는 원래 떨어져나온 사람이라는 뜻.

아사신파 ㅡ 이슬람교 시아파 내 이스마일파 중의 일파

1090년 하산에 사바흐가 창설


ㅇ 핵 원자로를 폭격하라, 오페라 작전

모사드는 이스라엘의 비밀정보기관이다. 

모사드 뿐만 아니라 여러 기관들이 있다. 무조건 모사드가 아님.

 

오페라 작전

1981년 이스라엘이 이라크가 건설 중이던 핵시설을 폭격한 군사작전

 

4차 중동전쟁 이후 아랍연맹에서 분열이 일어남.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으로 패배하자 각자의 실리를 찾기 시작함. 

거기에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

1979년 시나이 반도 협정으로 빠지게 된다. 

1979년 이란 호메이니 혁명 발생

1980년 이란ㅡ이라크 전쟁 발발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도움으로 핵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에 중동의 맹주를 꿈꾸는 이라크가 먼저 핵을 개발하려한다.

오시라크에 원자로를 건설하는 계약을 프랑스와 맺는다. 

프랑스는 원자로건설 & 기술이전 & 우라늄 제공하겠다고 옵션계약함.

외교로도 방해하고 공작도 방해하였음.

이스라엘의 정보부는 정확히 원자로가 언제 완공될 것인지 거의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과 이라크의 위치, 바그다드의 위치를 보면 거리가 있다. 

공중급유가 불가능하니 추가 연료통을 부착을 계산함. 

기체당 370갤런(약 1,400L)의 추가연료를 달아야함.

모든 항공기는 일정 무게 이상을 싣고 비행할 수 없다. 폭장량(폭탄탑재중량)도 있기에

정밀유도폭탄이 아닌 바보폭탄이라하는 마크 84를 달고 출격함

기체 하나당 2발씩, 4천파운드의 폭탄을 들고 갔다. 다른 기재가 필요하지 않기에.. 

만약을 대비해 조종사에게 이라크 돈을 쥐어줬다. 

또한 만약 격추되면 항공구조단이 너를 구조하러 갈 것이라고 알려줌. 요르단 국경에서 대기 

 

작전 전체의 내용을 보면 하나의 기술을 다른 기술로 대체한 것이다.

레이더 재밍 장비를 제거하고, 편대를 2개로 나눴다. 

하나는 8대의 F-16로 구성된 공격편대 / 다른 하나는 6대의 F-15로 구성된 호위편대

요르단, 사우디를 지나서 이라크로 들어가야하기에 공격편대는 보내고 요격편대가 그들과 상대하려고함. 

장비 제거로 자체 방어수단이 없어진 F-16, 이라크의 레이더가 조준한다면 방해임무를 F-15가 실시함

통신보안을 위해 기체들끼리의 통신을 제한하고, 5개소의 체크포인트에서만 간단하게 확인함(민항기처럼 보이게)

 

(참고자료 http://news.bbc.co.uk/1/hi/world/middle_east/5020778.stm)

 

BBC NEWS | Middle East | Factfile: How Osirak was bombed

As part of a series marking 25 years since Israel bombed Iraq's Osirak nuclear reactor, the BBC News website recounts how the operation was carried out: At 1255 GMT on Sunday 7 June 1981, eight Israeli F-16 fighter-bombers take off along with two F-15 inte

news.bbc.co.uk

당시 이라크에는 해외 기술자들이 있었음. 프랑스, 이탈리아 등 

 

1. 공격개시를 오후 3시 50분 정도로 잡았다. 시나이 공군기지에서 바그다드 인근지점까지가면 오후 6시가 조금 넘는다. 

이 시간대를 고른 이유는 이라크 방공부대원들의 저녁 및 휴식시간이다. 

2. 81년까지는 이스라엘의 야간전투능력이 중동에 있는 다른 국가의 군대보다 월등했기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을때, 야간에 구출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함.

3. 저공비행으로 레이더를 피한다. 

이스라엘의 저공비행 경험은 여러번 성공해서 데이터가 많이 쌓여있다. 

편대는 30M 정도의 높이 / 목표지점에서 1,500M 를 높이고 35도로 떨어지면서 급강하 폭격을 실시한다. 

한달간 시나이 훈련에 모형을 만들고 맹 훈련을 실시함. 

첫번째 기체가 외벽을 뚫고, 두번째 기체가 그 구멍안으로 집어넣는다. 

총 16발 중 2발을 제외한 14발이 목표물에 정확하게 명중한다. 

 

이라크 방공포대는 저녁식사시간이었고, 레이더도 끄고 있엇다. 타국에서 조기경보를 해줄거라고 생각.

늦게 대공포를 쏘는데, 잡으라는 이스라엘꺼는 못잡고 파편으로 이라크 자국군인들이 사망함. 

 

이스라엘이 전략적 무기에 민감한 이유

이스라엘 내에도 내부적 대립이 있다. 

핵무기 한방이면 훅 간다는 생각이 대외적 명분으로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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