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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5. 전투감각>

by leeesssong 2020. 1. 14.

<#5. 전투감각>

한줄평 - 생도, 소대장, 중대장.. 읽을때마다 매번 다른 관점으로 느끼게되는 신선한 충격

ㅇ서문

 

전투는 죽는냐, 사느냐, 목숨이 걸려있는 가장 큰 중대사여서 미리 시험해보는 예행연습이 있을 수 없고 교육훈련을 통하여 숙달한대로 행동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교리는 교범에서 배우고 전술전기는 훈련을 통하여 체득할 수 있지만 전투현장에 대한 감각만큼은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 익히기에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때문에 누군가 체험한 사람이 전투현장을 사실대로 묘사하여 후배들에게 알려주어야만 할것이다.

 

전투감각은 전투를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체득할 수 없기 때문에 전투를 먼저 체험한 선배의 전투사례를 자신의 경험으로 내면화시키고 승화시켰을때 얻을수 있는 것이다.


ㅇ본문

 

ㅡ 계속 다녀도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때 방심하기 쉬우며, 어제도 별일이 없었는데 오늘 무슨일이 있겠는가 하는 안이한 생각이 죽음을 자초하는 법이다. 흔히들 소대장으로 부임하여 3개월만 총에 맞지 않고 무사히 지나면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보면 정반대였다. 처음에 오면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나 작전을 몇번 다녀오게 되면 아는체나 하고, 고집부리고, 우쭐대기 시작한느데 이때가 제일 위험하며 죽기 꼭 알맞은 시기다.

 

"며칠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봤네, 소대장 개개인을 비교도 해봤는데 역시 서중위가 제일 적임자라고 판단되어 이렇게 직접 찾아왔네" 부하를 사지로 보내는 지휘관의 진지한 자세, 마음속으로부터 즐겁게 복종시키는 기술, 죽을줄 알면서도 기꺼이 자기 지휘관을 위하고,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 앞에 감격하는, 이때의 감명 깊었던 순간을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으며 이 순간은 내 평생 군대 생활을 좌우해왔다.

통상 67부 능선을 이용하여 침투하도록 교육을 받았지만 낮에는 능선으로부터 관측을 당해 제압사격을 받을 위험이 있고, 칠흑같은 어두운 밤에는 능선을 이용하여도 방향유지가 어려운데 능선 중간부분을 따라 이동하다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해 길을 잃고 밤새도록 헤매기 일쑤였다. 그래서 적들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길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2일 간 짧은 예행연습기간 동안 소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앞서가는 통로개척조가 적의 발소리와 음성 등을 이용하여 적을 먼저 발견하고 즉시 숲속으로 숨어버리는 훈련을 많이 했다. 침투시에 제일 두려운 것은 예기치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적과 조우하는 것이다. 침투의 목적이 포로획득이라면 하체를 쏴서 잡아오면 그만이지만 이번 임무같이 적의 전반적인 상황파악을 위해 침투하는 경우에는 적과 조우시 침투 그 자체를 포기하고 돌아올 경우도 생기기 때문에 어떻게든 조우를 피해야 했다.

ㅡ 이 산속은 적이 밤이나 낮이나 구분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그들의 활동구역이었다. 비록 적의 주 활동지역이었지만 움직이는 것은 전부 적으로 간주할수 있는 우리가 유리했고, 적은 오히려 우리를 만나더라도 피아식별이 순간적으로

되지 못하고 우물우물하게 되어있다. 이때의 몇초의 시간이 절호의 기회이다. 이 순간에 먼저 정확히 쏘는 편이 조우전에서 이기는 법이다. 먼저 사격하는 쪽이 기선을 제압하게 되어있고, 일단 기선을 제압당하면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한다.

ㅡ 비록 총이 없는 적이었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쑥 나타나니 반사신경이 마비된 모양이었다.

총을 잡지 못했다.

 

적을 만나면 신속히 이탈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절호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동굴에 수류탄 투척시 2가지 사항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는 안전핀을 뽑고나서 ""하고 뇌간을 치는 소리가 후에 던져야 한다. 팔을 뒤로했다가 던지면 투척자 가까이서 공중폭발하여 다치는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둘째는 동시에 두발 이상을 넣어서는 절대 안된다. 수류탄 마다 터지는 시간이 달라 다른 수류탄이 튀어나와 폭발할 있다.

통상 스스로 손을 들고 항복한 놈들이 아니었을경우, 우리를 안심시키고 도주할 기회를 노리는 것이 포로들의 공통된 습성이었다.

주민과 지방게릴라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에 있다따라서 주민들에게 거칠게 대하며, 부녀자를 희롱하거나, 동네 어른들에게 불손하게 대하거나 또는 털끝만큼이라도 주민의 재산에 손해를 입히게 되면 주민의 마음은 우리를 떠나 적에게 가고 적들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듯이 활개를 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6.25 전후해서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공비가 되었던 사람들 중에 이념이나 사상때문에 입산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감정이나 사회모순 때문에 공비로 전락했다는 좋은 교훈을 잊어서는 결코 안된다.

 

베트콩은 평상시 조명지뢰를 풀밭에 설치해놓고서 인계철선 찾는 훈련을 철저히 했다

야간에 실상과 똑같은 상황과 조건을 부여하고 수천번 수만번씩 인계철선에 팔을 대고 반복 확인하면 기계보다도 정확하게 인계철선을 찾아낼수 있게 된다.

병력들은 적과 교전이 붙어서 총을 맞대고 싸울때는 잘못하면 자기도 죽고 전우도 죽으니 소대장의 지시대로 재빠르게 움직이며 잘들 싸운다. 그러나 일단 부비트랩이나 지뢰가 깔려있는 지역에 들어간 다음에는 도대체 앞으로 전진할 의욕을 잃어버리고 전부 수동적이 되었으며 가옥이고 풀밭이고 들어가길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러다가 쾅하고 한발이 터져서 전우가 다치거나 저격이 땅하고 날아와서 누가 쓰러지면 완전히 전체가 굳어버리는 일종의 마비상황도 생겼다. 이때 수습한답시고 소대장이 이리뛰고 저리뛰고 설치다보면 터지곤 했다. 서두르지 말고 침착해야 한다.

은거지 가운데 가장 찾아내기 힘든 곳이 수중동굴이었다. 시냇물처럼 물이 졸졸 흐르는 지역이 아닌, 물흐름이 느리고 깊은 하천가 둑밑이나 저수지같이 물이 많이 고여 있는 곳에 은거지를 구축했다. 양쪽 둑을 이용하여 수면보다 30~40cm 윗쪽에 적당한 크기의 숨을 있는 공간의 흙을 파내고 만들며 충분한 두께와 몇군데의 공기구멍을 뚫어놓아 질식을 방지했다.

 

여우같은 적은 우리를 부비트랩 밭으로 가끔 유인했다. 적진에서 활동하는 게릴라는 싸우는것보다 숨기를 잘해야 한다.

 

상탄이 나는 것을 보니 소총사격이 틀림없었다. 기관총은 어꺠에 견고하게 견착시키고 쏘기 때문에 상탄이 나지 않는다.

매복시 다른 조에서 무슨상황이 벌어져도 차분히 기다려야 한다. 하고싶은 지시사항이 있으면 간략하게 요점만 전달해야 한다. 지휘관이 서두른다거나 중언부언 말을 많이하면 절대 안된다. 무선통화 때문에 귀중한 즉각조치 시간을 놓치기 때문이다.

병사는 아무리 극복하기 어려운 역경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상급자가 함께 겪어주면 참아내며, 명령이니까 복종한다거나 할 수 없이 처벌이 무서워서 끌려간다는 따위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고통과 아픔을 참고 버티면서 죽음과 직면한 상황하에서 솔선수범을 행동으로 보일 , 부하를 감동시키고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있다는 평범한 진리이다.

사람이란 참으로 이상한 동물이다. 전쟁터에서 그렇게 하면 죽는줄 뻔히 알면서도 자기가 다니던 길로 계속 다니기 때문이다. 적은 주로 소로나 능선으로만 다닌다.

ㅡ 매복을 출발하기 전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냄새를 풍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 매복 진입과 철수시에는 적의 매복에 유의해야 한다.

 

적의 첨병 한두명이 오는 것은 그대로 앞을 통과시킬수 있는 담력, 본대가 오면 살상지대 안으로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력이 있어야 한다.

 

크레모아의 폭발시기에 1~2초의 차이가 있어도 나중에 터지는 크레모아는 적을 살상하지 못한다. 적들이 엎드리거나 달아나기 때문이다. 크레모아를 터뜨려 적을 살상하게 되면 반드시 확인사살을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한 적이 수류탄을 집어던지는 경우가 있다.

 

수류탄은 적을 사격으로 제압할 없는 골이나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을때 사용해야하고, 소총사격은 최초 다량사격이 효과적이다. 상탄을 방지하기 위해 총덮개를 위에서 누르고 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완전히 거총을 하고 쏘면 총구 섬광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매복전투는 대부분 크레모아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고 그것으로 작전은 판가름난다.

죽놈죽 살놈살이다. 소총사격이란 크레모아에도 맞지않은 적이라든지 도망가는 적을 사살하는데에, 그리고 매복전투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완전제압을 위한 사격이다. 따라서 보통 한탄창, 많아야 탄창정도면 충분하다.

 

적과 싸울것이냐? 이탈할 것이냐? 재치있게 판단해야 한다. 보유하고 있는 탄약과 준비 지원화력의 유무에 따라 다르리라 생각한다. 무모한 전투는 다음 작전을 위해 피해야 한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죽는다.​

 

매복시 밤에는 긴장하지만 해만뜨면 긴장이 풀어지기 쉬운 법이다. 낮에도 똑같은 요령과 방법으로 근무하고 감독해야만 한다. '밤보다 낮을 조심하라'

낮이 되면 병력배치를 재조정해야한다. 밤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하지만 낮에는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나무라든지 숲에 숨어서 임무를 수행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ㅡ 포로가 생기면 반드시 책임자를 임명하여 감시를 철저히 해야한다. 도주의 우려보다 오히려 무자비한 보복을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훈표창을 받아도 부하를 잃고 돌아온 지휘관은 비록 전쟁터라 하더라도 그리 떳떳하거나 자랑스럽지 못함은 물론 군대생활 기간은 말할 것도 없고 평생 가슴에 죄책감을 갖고 살수 밖에 없다.

 

나는 많은 포로를 잡아보았다. 여자가 연약하지만 공통적으로 입이 무겁고 정신력과 참을성이 남자보다 월등히

강했다. 모성애가 동료들에게도 적용되나 보다. 지식수준이 높고 비교적 외형적으로 잘생긴 사람일수록 의지력이

약했다. 위협하면 죽을 걱정을 해서인지 묻지 않는 내용을 술술 불어댔다.

 

냄새, 숲과 나무가 울창한 정글에서는 냄새가 한군데 모여서 오래 머문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습기가 많아 공기가 무거워 유통이 안되고 냄새가 고이는 곳이다. 옷이 찌든 썩은내 나는 땀냄새, 아침에 싸놓은 소변, 그놈의 찌린내 그리고 담배… 이는 냄새구역(Smelling Pocket) 만들고 적은 담배도 안피고 술도 안마셔서 비교적 남자보다 감각이 예민한 여자를 첨병으로 세워 우리의 매복 위치를 알아내곤 하였다.

아무리 과감하게 상황에 대해 조치하더라도 적에 대한 지식과 전장의 전투기술에 기초를 두어야하며 그렇지 못하면 만용이 되고 만다적의 심리적인 함화공작을 슬기롭게 극복해야하는데 이는 아군에게 공포심을 최대로 조장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여 실제보다 병력이 많은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에 대한 최상의 대책 역시 전술에 대하여 충분한 교육과 예행연습을 통해 감각을 숙달시켜야 한다.

 

철저하게 훈련하고 대비해야 우리가 산다는 동기가 저절로 형성되어 중대원들은 밤낮으로 계속되는 반복훈련을 견디어 주었다.

적이 한꺼번에 몰려서 포위선을 돌파하려고 덤벼드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적들은 절대로 수류탄을 던지지 못하고 소총사격은 맨앞에 뛰어오는 적들만 쏠수 있다. 따라서 호안에 있는 병사들은 겁낼 필요가 없다. 총소리가 요란해도 나를 향해 쏘는 총은 앞에 오는 적들뿐이고 밤에 뛰면서 쏘는 총은 맞을 염려가 전혀 없다. 오히려 적이 취약하며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투시 복부 부분에 부상당하면 금방 장기가 노출된다. 비록 장기가 손상을 입더라도 물만 먹이지 않으면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화력유도시 우리는 무심코 지도를 보면서 사거리를 계산할때 평지나 산악이나 같은 요령으로 한다.

사격지점에서 고지를 바라보고 전사면에 사격할때는 어느정도 근탄이 생기기 때문에 우군 머리위를 넘어서 근접지원을 경우 조심해야 한다. 반면에 산악의 후사면에 사격할때는 약간의 원탄이 생긴다는 것을 인지하고 사격해야 한다

(산악을 지도에서 평지로 단순 계산하여 화력유도하게 되면 산악 고도에 의해 포물선이 방해를 받음)


ㅇ 작가가 본 월남전쟁

 

월남군은 싸우려는 의지가 없었다. 패망의 길로 빠져든 제일 원인은 여기에 있다.

 

월남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적이 많았다. 월맹, 월남내부의 공산주의자, 국경을 접해 있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더욱 곤란한 적은 월남내부의 철없는 종교인을 포함한 민주화의 기수를 자처한 정치인들이었다.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보다는 내부의 적과 싸우는데 시간과 노력을 많이 지불했으며 군사적인 적과 싸우는 것은 미국과 연합군에게 일임했다.

 

미국의 월남전략은 본토에 건재하고 있던 월맹군의 전투력과 월남내에 침투한 월맹군 현지 게릴라를 파괴하기 위한 종합해결방안을 동시에 모색했어야 했으며, 월맹이 연합군의 전투력을 전국의 게릴라를 잡는데 분산시키도록 강요한 것과 같이 일종의 전술적 차원에서 대처했어야 했다미국과 연합국은 월남전에서 시종일관 게릴라를 전략목표로 간주하여 게릴라를 향한 군사행동만을 주로 행사하고 월맹내의 주력 격멸을 포기한 것은 착오였다

전략적으로 월남전쟁을 단순한 게릴라전으로만 파악한 공식적인 견해와 규정으로 말미암아 군사전략 수행에 과오를 범했다.

 

-ㅡ정적인 목표에 결정적 공세행동을 취하지 못한 미국의 수세적인 방어전략은 월맹에게 안심하고 활동할 있는 성역인 월맹 본토를 기지로 사용할 있도록 했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호치명 루트와 함께 외선작전을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고, 끝내는 폭이 짧은 월남을 바다로 몰아넣을수 있는 잇점을 스스로 적에게 제공해준 셈이 되었다.

 

모든 전투력은 적의 힘의 중심으로 지향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당시 전략은 월맹본토를 공격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월맹의 힘의 중심이 되는 수도나 군대, 전쟁지도본부 등을 지향하지 못했다. 월맹은 결정적 시기에 전투력을 집중 투입하기 위해 월맹 내에 수준높은 정규군을 확보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월남 내에서는 병력 절약부대로 사용된 게릴라들의 위장작전으로 인해 월남군으로 하여금 대게릴라작전을 수행하도록 전투력을 분산시켰으며 대게릴라작전만 수행하면 되는 군대로 만들어 버렸다

월남군은 일부 공수부대와 해병대를 제외하고는 근처에 배치되거나 아예 부대 영내에서 가족을 데리고 생활하고 있었다월남의 패배는 월남군의 미약한 전투의지도 문제였지만 군대의 분산된 배치와 무거운 , 전투보다는 가족의 안전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여건이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기습은 주로 전술적 차원에서 많이 사용되고 전략적으로는 힘들다. 국가를 공격하기 위해 상대국이 모르도록 전쟁준비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첫번째 전략적 기습은 1965 미국이 처음으로 월남전에 뛰어들때였다. 마치 1950년에 미군이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을것이라고 김일성이 믿었던 것처럼 월맹도 미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두번째는 월맹의 전략적 기습이었다. 모든 지상전투에서 연합측이 승리했으며 화력이나 기동력은 월맹과는 비교가 안되게 우세했고, 시간이 가면서 월맹군은 점점 비틀거렸고 연합군측의 전투력은 극에 달했다. 연합군측은 전쟁에 대해서 낙관적인 전망을 하면서 전쟁이 끝날 것으로 판단했다

적의 공격 징후가 있었지만 모두들 믿지 않았다. 이렇게 연합군이 방심하는 동안에 공산국은 월남내부에 있는 게릴라의 역량을 총동원, 마침내 1968 구정을 기해 미군기지와 도시 지방행정기구를 목표로 공세를 감행했다

이것이 소위 1968 구정공세로서 월맹군, 특히 게릴라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고 조직이 와해되고, 공산주의 세력의 뿌리까지 흔들리는 사건이었지만구정공세 현장이 미국 TV 방영되자 참혹한 전선의 모습을 직접 국민들이 낙관적인 발표를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으며 불신이 가중되었다

미국내 반전 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연합군은 훌륭하게 전투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미국 국민들과 많은 지도자들은 월남전을 희망없는 불합리한 전쟁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군사적 수단을 통해서는 승리할수 없는 전쟁이라고 믿게 되었다. 전술적으로는 적이 실패한 공세였으나 전략적으로는 완전히 성공한 셈이었다.

 

미디어는 국익을 챙기지 않고 흥분되는 순간과 특종만을 찾아다니는 이적행위를 했다.

국민여론이 힘의 중심점이 되어버렸다. 국내 TV마저 여론을 적에게 유리하게 전개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말았다.

 

월남군은 미군철수로 작전지원이 중단되자 새로이 가난한 전술과 상황에 익숙하려고 노력했지만 부자작전에서 가난뱅이작전으로 전환하기에는 적응시간이 너무 없었다

반면 월맹군은 무에서 시작하여 궁핍과 고난을 겪으면서 점차적으로 성장하고 단련된 군대였다. 중국과 소련 양측으로 군사원조를 받기 시작하자 월남과 월맹은 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병력동원, 탈영, 징병기피 국가적ㅇ니 철저한 통제와 질서확립을 해결해야 했고, 패배주의적 반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처럼 반드시 강한 통제를 취해야 대상에 대해서도 강압적인 조치는 없었다. 국민의 민주주의 수준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성급하게 통제력이 미흡한, 걸맞지 않는 민주주의적 방식을 채택했다.

 


ㅇ글을 마치며!

 

승패는 군의 전통이 어떠하냐에 좌우된다. 또한 군인의 능력은 나라 군의 전통속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

 

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은 전장에 나가 죽어서 돌아온 자식을 묻으면서 "나는 스파르타를 위하여 죽은 자식을 낳았다"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자식을 전사로 키워야만 남의 나라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사회 여건이 전사를 키우는 스파르타의 전통으로 이어진 것이다.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이 아랍제국과 싸우면서 연전연승을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6 전쟁시 미국의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귀국하여 전선으로 달려갔고 아랍 유학생들은 귀국 명령이 두려워 애인과 휴양지로 도망갔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2차대전시 16살의 나이로 군용트력 운전사로 군무했고, 부군인 필립공은 해군대위, 엔드류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시 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동료들과 싸웠다. 처칠은 1 대전시 해군장관시절 다다넬스 전역의 실패를 자인하고 장관을 사임, 전선으로 달려가 육군 소령으로 참전하여 베르당 전투에서 싸웠다.

배운자와 있는자의 솔선수범이 영국군의 전통이다.

 

한국전쟁시 미군 장성 아들 142명이 참전하여 35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몽고메리 원수의 승리의 비결로는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 적재적소에 알맞은 사람을 골라 보직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당장 전선으로 데려오면 누가 싸울수 있는지, 사람을 찾는데 자기 일과의 1/3정도를 보냈다고 한다. 특히 전장에 바로 투입되면 적과 마주쳐서 전투를 있는 대대장이 누구인가를 찾기 위하여 영국의 영관 장교의 명단을 놓고 검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있다. 북아프리카로 영국군이 떠날때 군단장을 임명하는데 장군이 강력히 추천되었다. 머리가 좋고, 승마선수이며 영국 육군의 골프 챔피언인데다가 미남이며 사교계에서 매너 있고 멋있는 영국 신사였다.

이에 몽고메리가 말했다. "우리 영국군은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차를 타고 싸운다. 매일 골프연습을 하고 자주 골프장에 나가야 챔피언이 된다. 사교계는 여자들의 치마폭이며 매너와 멋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는 것이다. 그는 전장을 모르고 롬멜도 모르며 군사서적을 읽고 고민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 영국 젊은이들의 생명을 맡길수는 없다"

롬멜의 책을 읽고 싸우는 것만 연구한 깡마른 고집쟁이가 '멋있는 영국 신사' 받아들일리 만무했다.

 

1973 중동전에서 이스라엘군의 부상자중 30%, 1982 레바논 전투시 23%정도의 전투정신병 증후군 환자가 발생하였다.

우리나라 전선의 장교와 병사들은 이와 관련해 경험도 없거니와 대책도 모르고 있다.

이는 적개심이 강하고 전투경험이 있는 이스라엘도 어쩔수 없었던 문제였다. 강력한 통제와 엄정한 군기로 해결하려는 막연한 생각은 위험하다. 초급장교들이 통제를 잘못하면 전투 자체가 어려워진다고 본다.

 

ㅡ2 대전시 마킨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군의 야간공격을 받았다. 소총과 일본도만 가지고 공격한 일본군에게 의외로 피해를 입어 철저한 조사를 해보니, 대대원 단지 36 만이 제대로 사격을 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개인호의 병사들은 진지가 유린당하는데도 돌진해오는 일본군의 기세에 눌려 안에 머리를 처박고 사격을 엄두도 못낸 것이다. 미군은 대책을 수립하고 전훈분석반과 지휘계통을 통해 철저히 교육시켰다고 한다.

 

개인화기 전투는 100m 전투이고 권총전투는 30m 전투, 수류탄전은 20m 전투이다. 100m 거리는 30초면 적이 덮친다. 지금같이 오래 조준하면 몇번이나 방아쇠를 당기겠는가? 권총도 마찬가지이다. 조준시간이 너무 길다. 수류탄은 1단계 2단계 팔을 들고 자세 연습을 시키다가 던진다. 당장 코앞에 적이 달려드는데 안전핀을 뽑았으면 빨리 던져라.

 

1994 러시아가 체첸을 공격했을때 수도인 그로즈니 시내에서 건물에 숨어있던 체첸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많은 전차가 파괴되고 사상자도 많이 발생했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슈르긴 대위의 증언에 의하면, "전사자 중의 절반 정도는 소총수의 오인사격, 공군기의 오폭, 포병의 오인포격으로 사망했다" 라고 한다그는 "시내에서 포위를 당하여 4일간 싸웠는데, 알고보니 시베리아에서 혼성여단이었다." 증언했다. (러시아군끼리 싸움)

 

걸프전에서는 첨단과학무기로 충분한 예행연습을 거쳐 일방적인 승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전투사상자 613 가운데 전사자 146 35명이 우군의 사격으로 사망했고, 467명의 부상자 72명이 우군사격으로 인적 손실을 입었다공군기나 헬기가 제대로 식별을 못해 일어난 사고였다.

 

따라서 유사시 계급고하를 막론하고 경험부족으로 인한 협조의 미비, 오판과 시행착오가 예상된다.

전장은 광범위하고 빠른 기동성과 타군 연합군과의 협조된 작전을 함으로 통제와 협조가 매우 어렵다.

충분한 준비가 있어야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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