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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Military/국방군사서적

<#25. 정보전쟁>

by leeesssong 2020. 3. 25.

한줄평 - 전쟁의 승패와 국가의 존망에 필수불가결한 요소, 정보의 중요성! 필요성!


서론

 

정보란 적과 적국에 대한 지식의 전체를 의미하기 떄문에,

전쟁에서 아군의 모든 계획과 행동의 기초를 이룬다.  - 클라우제비츠

 

정보가 만능은 아니다. 정보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없다.

하지만 정보는 승리를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더라도 승리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전쟁에서 정보는 어떤 형태로든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 역할을 수행해 왔다.


ㅇ 본론

 

1. 성공한 정보, 승리의 열쇠가 되다.

 

여러분의 성공은 기억되지 않지만, 실패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것이다. - 케네디 대통령

 

. 1 세계대전 - 치머만 사건과 영국 정보전의 승리

미국은 전쟁이 시작되고 3년이 경과할때 까지 유럽전쟁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고립주의 원칙을 유지했다.

미국이 고립주의 노선을 깨고 참전을 선언한데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루시타니아 피격)

하지만 이때도 미국은 여전히 참전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유지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의 참전을 결정적으로 자극한 것이 치머만 전보사건이다.

독일 외무장관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대사로 하여금 미국과 독일이 싸우게 되면 멕시코에 동맹을 제의하라는 내용을 담고있다. 반신반의하는 미국에 영국이 참전을 끈질기게 종용하고 여론을 자극함으로써 미국의 참전 선언을 이끌어 낸다.

 

치머만의 전보 내용에는 멕시코와 일본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미국이 중립을 지키도록 유도하되, 성공하지 못할 경우 멕시코 일본과 동맹을 맺고 미군이 함부로 본토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당시 미국과 멕시코간의 관계가 극히 악화돼 있는 상황을 독일이 이용한 것이었고, 당시 미국 서부의 정부들이 일본인의 토지 구입을 제한하는 법안을 발의하면서 미일관계가 악화되고, 일본이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멕시코에 접근하는 것을 미국이 반대하는 상황을 역이용하려 것이다.

 

영국은 MI-5, MI-6기구를 만들고 2기구는

SS(보안부, Security Service), SIS(비밀정보부, Secret Intelligence Service) 개명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주로 HUMINT활동에 집중하지만 1차대전은 인간정보 외에도 TECHINT, SIGINT 기관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 태평양전쟁 - 미드웨이해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정보력

ㅡ 1942 6 5~7일까지 미드웨이 북방 해역에서 미일 양국이 대규모 함대를 동원해 싸우면서도

수상함이 아닌 항공기로 승부를 가른 전투.

 

ㅡ 6개월전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후 자존심을 회복하고 연합국의 사기를 고양, 전쟁의 흐름을 반전시키는 결정적 전투

 

해군은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정보력 우위를 바탕으로 승리, 해군의 무선통신을 감청해 해독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일본 함대의 움직임과 작전 계획을 사전에 구체적으로 파악할 있었다.

 

일본 전함 11(아마토 포함), 항공모함 4, 경항모 2 VS. 미국 전함X, 항공모함 3

이로 인해 미국은 함포전을 최대한 피하고 일본 함대를 먼저 발견해 함재기로 기습하는 작전에 모험을 걸어야 했다.

 

미군의 정찰기는 일본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으나, 일본 잠수함들은 미국의 구축함으로 인해 항공모함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일본이 항공모함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미군은 적을 먼저 발견하고 유리하게 대응해 나갈 있었다.

 

압도적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패배한 배경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진주만 기습 성공에 도취되어 있던 일본 해군의 안이한 태도, 지나치게 복잡한 부대편성,

적에 대한 과소평가와 부실한 보안의식, 적을 탐지해 내는 레이더의 부재, 기습의 집착하는 공격형태

 

일본의 태도는 실패의 교훈을 찾으려하기보다 패배를 철저히 은폐하고 알류샨열도의 전과만을 부각시켰다.

 

무엇보다 일본 해군의 전략적 사고의 한계다. 1905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상대로 벌인

쓰시마해전 승리 이후 유지해 오던 전략적 사고에 너무 집착했다.

 

미드웨이 해전의 교훈

1)실전에서 효율적인 정보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평상시 수집, 처리, 분석, 배포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훈련되어 있어야 한다.

2)지휘관들도 정보가 작전에 기여할 있도록 배려하고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지휘관이 활용하지 않고 외면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3)전략정보와, 작전정보, 단순 상황정보가 통합적으로 분석되고 고찰될 승리를 뒷받침할 있다.

 

 

.2 세계대전 - 보디가드 작전과 더블크로스 시스템

ㅡ 1944 6 6 노르망디 상륙작전(Overlord 작전) 성공한 것은

무엇보다 보디가드 작전으로 불릴 기만작전의 성공에 기인했다.

 

당시 해안 지역은 독일군 전격전의 대명사이자 '사막의 여우' 불리던 롬멜 원수가 지휘했고

노르망디 후방지역은 룬트슈테트 원수가 지휘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치밀한 작전기획과 날씨 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도버 해협의 반대편 칼레, 발칸 반도,

남프랑스, 노르웨이등 여러곳에서 이뤄질 것처럼 기만작전 덕에 성공할 있었다.

 

가장 중요하고 성공적으로 추진된 것이 포티튜드 작전이었다.

1) 포티튜드 - 영국군 특수부대가 노르웨이 해안으로 침투해 독일군이 점령한 군사시설과 전력망을 파괴함으로써

히털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제 이뤄지는 순간까지도 13개의 주력사단을 노르웨이에 그대로 주둔시켰다.

2) 포티튜드 - 도버해협 건너 칼레로 연합군 주력부대가 상륙할 것처럼 믿도록 기만하는 계획,

15 예하 19 사단을 노르망디 상륙 6주후까지도 칼레 지역 방어에 묶어두고 있었다.

 

독일군은 실제 상륙작전이 진행되고 한참 후인 9월까지도 그렇게 믿고 엉뚱한 지역에 병력을 계속 유지했다.

결국은 칼레를 통해 공격해 올것이라고 믿고..

 

연합군의 기만작전이 성공할 있었던 것은 영국의 우세한 정보력 덕분이었다.

정보력의 우세는 '더블크로스 시스템'으로 불리는 이중간첩 역용을 통해 이뤄졌다.

 

이들은 독일 지휘부를 기만하는 정보를 계속 전송했다.

이런 기만정보를 보고받은 독일군 지휘부는 고심 끝에 노르웨이 주둔 13 사단에 절대 이동하지 못하도록 지시하였고,

2 대전이 끝날때까지 자신들이 영국 정보기관의 역용공작에 놀아났다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독일군의 암호(에니그마) 해독한 영국의 정보는 울트라정보로 불렸다.

울트라정보를 통해 독일군의 작전능력과 의도를 알아냈고, 영국은 2차대전이 끝나고도 거의 30년동안 울트라정보 자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다.

 

 

. 3 중동전쟁 - 6일전쟁과 이스라엘의 압도적 승리

ㅡ1967 6 5 ~ 10, 이스라엘의 기습공격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2 중동전쟁처럼 시나이 반도의 중부와 남부 주요 접근로를 통해 공격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공격 예상로에 지뢰와 지하 벙커 오새를 다량으로 구축해 대비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예상과 달리 중부와 북부 경보를 통해 공격하면서도

이집트의 요새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공군과 합동으로 우회함으로써 이집트 지상군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전쟁 큰소리치던 아랍연맹은 막상 전쟁이 시작됐을 작전 협조를 전혀 하지 못했다.

군대의 결속력이나 기강도 형편없었다.

 

이스라엘의 6일전쟁 승리 요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정보력의 압도적 우세가 결정적이었다.

이집트의 이중간첩 -가말과 이집트에서 활동한 모사드 정보원 볼프강 로츠,

그리고 시리아의 군사고문관으로 활동한 모사드의 엘리 코헨 등이 대표적이다.

 

이스라엘은 감청자료를 바탕으로 아랍국들을 이간질하는 동시에 국제사회 지지를 얻는데 활용하였고,

전장에서 신호정보활동은 적의 배치와 성향, 강약점에 대해 상세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반면 이집트의 정보력은 말그대로 문제투성이였다.

아랍의 정치적 분위기에 빠져 이스라엘의 선제공격 능력과 가능성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전쟁 지휘부에 대한 보고 내용이 수시로 바뀌거나 종종 상충됐으며,

이스라엘군의 전투서열이나 전략,전술, 배치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지휘부에 제대로 보고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전광석화같은 선제공격을 실시하였고, 개전 3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기 419 304, 시리아 공군기 112 53, 요르단 공군기 28 전체를 박살냈다.

 

당시 정보기관 AMAN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 지휘부의 열린 자세, 동시에 AMAN 정보 분석관들의 탁월한 상황판단과 상황대처 능력, AMAN 모사드를 비롯한 정보기관들이 헌신적 애국심과 탁월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기적이 현실이 되도록 만들어 것이다.

 

 

. 냉전 - 소련과 동구권 붕괴를 촉진시킨 CIA 비밀공작

ㅡ 1989 11 베를린 장벽 붕괴, 1990 독일의 통일 인정, 1991 소련의 해체

 

윌리엄 케이시 정보공동체 의장(DCI) CIA 부장은 안보정책 전반,

특히 대공산권 정책 수립과 추진에서 막강한 영향력으로 CIA 활력을 불어넣고, 인원과 예산을 획기적으로 확충하여

외교(1옵션) 군사적대응(2옵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에 비밀공작을 집중했다(3옵션)

 

레이건 대통령은 1982 반소련 조직 활동을 지원하는 CIA 각종 정치선전과 비밀공작 추진을 승인했다. 시위와 파업 주도 세력을 지원하고, 소련 동구권의 만행을 외부세계에 폭로하는 언론이나 학회 활동 등을 활발하게 지원했다.

 

ㅡ1980 이란의 미국대사관 인질 구출작전(Operation Eagle claw) 처참한 실패로 귀결되자 정치권에서는 해외공작 역량 강화를 주문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1979 이란 혁명 이후 발생, 합동특수전사령부(JSOC) 창설 계기)

 

첫번째 비밀공작은 소련군의 침략에 저항하는 아프가니스탄 반군 지원

소련의 군사력 증강실태와 막대한 보유, 동맹국에 대한 경제외교적 지원 강점을 중심으로 정보수집

 

심리전 영역의 역량을 과감하게 강화, 예를들어 소련지도자들이 위협을 느끼는 대상은 무엇인지, 그들이 자존심에 대한 공격을 얼마나 감당할 있는지, 위기로부터 얼마나 빨리 회복해 평정심을 회복할 있는지 등에 대한 분석

 

하지만 소련의 해체는, 특히 고르바초프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결말이었다. 그는 개혁개방을 통해 시스템 개선을 추구했지 공산주의를 끝내려고 하지는 않았고 소련체제를 붕괴시킬 생각도 전혀 없었다.

또한 CIA 소련 정부의 정치적 불안성을 파악하였으나 해체를 예측하지는 못했다.

CIA 소련 동구권 체제의 붕괴를 미리 예측하지 못한 것은 정보 실패라기보다 정보 분석의 한계 역설적으로 시사해준다. 사회내 미묘한 흐름의 변화를 분석해 변화의 방향과 폭발적인 에너지의 정도, 그리고 그것이 야기할 있는 파장을 예측하는 것은 어느정도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특정사건이 일어날 시점과 과정까지 정확히 예측하고 미리 대응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라기보다 신의 영역에 가깝다.


2. 실패한 정보 대재앙의 불씨가 되다.

 

. 2 세계대전 - 독일의 침공에 무방비로 당한 스탈린

ㅡ 1941 6 22 독소 전쟁 시작

 

하지만 2차대전 전체 사상자 4400만명의 절반인 2130만명이 소련의 피해,

그리고 피해 대부분이 전쟁 초기 6개월 동안 발생

 

ㅡ이러한 초기 피해가 엄청난 데는 독일의 효율적인 전격전과 소련의 전쟁 준비 태세 부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스탈린 정부의 정보실패가 결정적 원인이었다.

 

조르게는 일본을 무대로 활동한 소련의 전설적 간첩이다.

조르게는 일본의 대외 정책과 관련된 첩보를 주로 수집, 박사학위 소지자 다운 풍부한 지식과 교양, 일본 정치와 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 일본과 독일의 우호관계 등을 바탕으로 독일과 일본에 대한 고급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그가 적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바쳐 수집해 모스크바로 보고한 첩보는 충분히 활용되지 못했다.

 

당시 모스크바는 군사적 열세 때문에 독일군을 두려워하면서도 서부전선을 위협하는 독일과 연합해, 동쪽에서 일본군이 동시에 공격해 가능성을 가장 우려했다. 그래서 동쪽에 배치한 병력을 그대로 유지한채 서부전선을 방어한다는 계획을 유지했다당시 일본은 서쪽으로 소련을 공격하는 계획, 남쪽으로 동남아를 공략하는 계획, 동쪽으로 미국을 공격하는 계획을 놓고 저울질했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조르게는 일본정부가 러시아를 공략하지 않고 동남아와 미국을 공략하기로 결정했다는 정부를 입수해 모스크바로 타전한다. 첩보를 근거로 스탈린은 극동에 배치했던 부대를 서부전선으로 돌려 모스크바를 방어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있었다.

 

하지만 6 독일의 침략이 있기전까지 조르게가 모스크바에 보고한 수많은 첩보는 거의 활용되지 못하고 사장되어 버렸다. 1941 5 그가 어렵게 수집한 독일의 소련 침공계획보고도 사장되었다.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규모 600만명보다, 1934~38 스탈린의 대숙청은 800만명 정도.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고위관료 사회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그가 선호하는 내용이나 기존 판단을 증명해주는 내용을 보고해 스탈린의 식견이 탁월함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NKGB 부장을 겸임한 내무장관 베리야, 그리고 정보기관 RU 부장 골리코프 장군은 사실대로 보고하기보다는

스탈린이 좋아하는 정보를 보고해 그의 신임을 받는데 적극적이었다.

오히려 국방장관 티모센코 원수나 참모총장 주코프 대장이 위기감을 느끼고 독일에 대한 선제공격을 허가해달라고 건의를 했었다.

 

스탈린이 독일의 공격 징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데는

소련 정보기관 책임자들이 스탈린을 두려워해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못한 것이 인원이었다.

 

 

.태평양전쟁 - 진주만 기습에 당한 미국의 굴욕

ㅡ 1941 12 7, 항공모함 6대를 주축으로 일본함대는 항공기 353대를 출격시켜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함대를 수차례 폭격했다. 일본의 기습은 미국인들에게 나머나 충격이었다. 물리적 피해 이외에 정신적 충격도 대단했다. 미국 역사상 영토가 공격당했고,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참을 없었다.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Pearl Harbor!)

 

ㅡ 1937 중일전쟁 이후 중국 침략 본격화, 1941 일소 중립조약 체결 이후 남방의 인도차이나 점령,

1941 7 미국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모든 재정 거래와 수출입 거래를 정부의 통제 아래 두면서 일본을 압박.

일본은 국내 석유 비축 물량이 2년치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에 시간이 별로 없었다.

미국과의 협상이냐 충돌이냐를 양자택일해야 하는 갈림길에 직면한 것이다.

 

일본은 미국의 전쟁의지를 꺾어 태평양에서 몰아냄으로써 아시아에서 입지를 확보하려함

미국이 일본의 기습을 방조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미국의 피해,

태평양 함대 전비태세 강화조치를 이유가 없고, 동남아를 예상하였고 하와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함.

설마 일본이 미국 영토까지 공격하겠냐는 안이한 생각에 빠져 방비를 하지 않음.

 

일본 군부는 해군 장교출신의 정보요원 요시카와를 하와이 주재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가장시켜 파견했다.

그는 민간 소형 항공기를 빌려 진주만 상공을 직접 비행하면서 공중정찰정보를 보고하고,

스쿠버 장비를 착용하고 진주만 해저를 직접 정찰한 결과를 보고하기도 했다.

 

미국은 일본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진주만의 얕은 수심으로 어뢰 공격에 대비를 하지도,

무엇보다 자신들의 역량을 관대하게 평가했다.

 

진주만 기습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보 출처를 다양화 해야 한다. 특히 인간정보활동 강화해야 한다.

둘째, 단순한 정보 수집뿐만 아니라 수집된 정보에 대한 분석 무척 중요. 미국은 적의 의도를 평가하면서 적의 시각을 반영하지 않고 자신의 합리성만으로 평가하는 소위 '거울 이미지(Mirror Image)' 빠져 있었다.

적을 과소평가하고 적을 과대평가하면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평하지도 못했다.

셋째, 관련기관 간의 정보 공유와 협조 부족했다.

 

진주만 실패를 통해 미국은 정보분야에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OSS CIA 확대되었고, 미국 정보공동체 전체를 조율하는 정보공동체(IC, Intelligence Community)까지 발전했다.

 

 

. 베트남 전쟁 - 구정 대공세와 미군의 정보실패

ㅡ '30 전쟁'이라 부르는 베트남 전쟁은 크게 1, 2차로 구분한다.

1차는 1946~56 베트남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며, 2차는 1960~75 베트남과 미국 간의 전쟁이다.

-1968 북베트남의 구정 대공세를 계기로 미국의 승리 낙관론은 급격히 회의론으로 기운다.

 

군사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정치외교적으로는 완전한 패배한 전투가 된것이다.

그동안 전혀 다른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함께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위축감이 팽배해졌다.

미국 내에서 반전시위도 더욱 확산되었다.

 

구정 기간 폭죽소리와 함께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 6 5, 전체 44 현의 36 수도, 64 군과 50 마을

남베트남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격이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사상자 수만을 따졌을때는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훨씬 많기 때문에 미군과 남베트남의 승리라고 볼수 있었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우는 적에게 세계 최고의 무기도 통하지 않는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반대로 북베트남 지휘부는 세계 최강 미군을 상대해서도 승리할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보응우옌잡 장군의 3 전략은

'적이 좋아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고, 적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으며, 적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

 

당시 특정 목표 장악에 성공한 베트콩들도 후속부대 지원을 받지 못하고 고립됨으로써 대대적인 소탕작전의 희생양이 되었다.

 

미군은 북베트남의 공격 징후를 파악하였으나 이들의 전략적 목표와, 공격시기와 장소 등을 예상할 없었고, 군에서는 일방적인 사실을 사실대로 직시하려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군사작전 성과를 애써 강조하고 싶어했다.

또한 공산세력 지도부에 침투한 고급 정보원의 부재, 정보의 홍수와 적의 기만정보 속에서 핵심을 놓친 실수, 적의 사기, 침투 조직 역량, 소모전 지속능력에 대한 과소평가, 사이공에서 느끼는 절실함과 위기감이 워싱턴에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며 미국은 패배의 길로 접어 들었다.

 

 

. 대테러 전쟁 - 911테러와 미국 정보기관의 치욕

ㅡ 2001 9 11 세계무역센터 빌딩, 국방부 청사가 공격당했다.

 

ㅡ FBI 윌리엄스 요원은 알카에다 연계 세력이 미국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고 파악했다.

애리조나 비행학교에 이슬람 학생상당수가 훈련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게다가 이상하게도 이들이 비행 훈련의

기본인 경비행기 훈련이나 이착륙 훈련에는별 관심이 없고 여객기 조종에 유별난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 주목했다.

 

하지만 FBI 본부와 뉴욕지부는 그의 메모보고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동 출신 비행 훈련생들의 훈련 동기만을 조사한다는 사실이 외부에 누설될 경우, 언론이나 이슬람 단체로부터 인종차별 조치라는 비난에 시달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ㅡ 911테러 이후 정보 실패의 주요 원인 하나로 밝혀진 것이 CIA, FBI, NSA 정보기관 경쟁 의식에서 비롯된 관료 집단의 비협조였다.

 

ㅡ 911 문제점과 정책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의 지나친 관료주의적 업무자세로 인해 관련 기관의 창의력과 협조 부족했다.

테러리스트의 시각에서 분석하는 '적팀(Red Team) 분석법' 시도하지 않았다.

둘째, 기존 테러와는 다른 새로운 테러리즘에 대응하는 정부의 정책에 문제가 있었다.

기존에는 테러 대응이 주로 제재, 보복, 억지, 혹은 테러 자행 적대국에 대한 전쟁 등의 형태로 비교적 단순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쉽지 않지만 테러 징후 초기에 강력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예방적, 선제적)

셋째, 테러리즘에 대응할 있는 역량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넷째, 중요 국가적 위협에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협조하기보다 기관별로 중구난방식으로 대응 문제를 키웠다.

 

이런 문제점을 감안해 대테러 센터(NCTC, National Counterterrorism Center) 확대 운영, FBI 대테러 역량의 획기적 보강, 위협평가시스템(Threat and Readiness Assessments) 운영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시스템적으로 접근하는 미국식 합리주의가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 가는데 교훈으로 활용하였다.

 

 

. 이라크전쟁 - 대량살상무기와 어리석은 전쟁

ㅡ 2003 3 20 '이라크 자유 작전' 개시

 

미국의 구미에 맞는 첩보를 제공해준 이는 1999 11 이라크에서 독일로 망명한, '커브볼'이란 암호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망명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화학을 전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특히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과 이동식 생물무기 실험 장비에 대해서는 관련 지식을 총동원해 거짓말을 했다. 엄청난 예산과 인원을 가진 미국 정보공동체가 한사람의 어설픈 거짓말에 완전히 놀아났다는 것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이라크의 WMD 대해 모호한 첩보가 계속 난무하는 상황에서 정보기관 분석관들은 자기도 모르게 인지적 함정(Cognitive trap) 빠져버렸다. 애매한 상황에서 가능한 나쁜 상황에 대비하려는 심리가 작용해 대량살상무기 존재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이라크는 이란이 함부로 자신들을 얕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연막전술을 전개했다.

이라크 지휘부로서는 미국에 대한 우려 못지 않게 인접국 이란의 위협을 더욱 크게 의식했다.

재래식 무기 뿐만 아니라 대량살상무기 측면에서도 모호성을 유지하는 전략을 계속 사용했고,

당시 이라크 지휘부의 입장과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 미국 정보관들 입장에서는 문화권에 대한

정보 분석의 중요성과 어려움을 다시 한번 절감해야 했던 순간이다.

 

고위관료들은 정보기관이 판단한 정보를 정책 결정과정에서 활용하면서도 자신들이 원하는 부분만 선별해

수용하는 소위 '체리따리(Cherry-Picking)' 일삼았다.

다시 말해 정보의 정치화로 인해 심각한 정보실패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3. 정보의 성공실패 요인과 과제

 

정보는 수집방법에 따라 크게

인간정보(HUMINT), 기술정보(TECHINT), 공개출처정보(OSINT, Open Source Information) 구분된다.

 

정보기관이 전략적으로 역량을 안배해 변화된 목표에 효율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필요성이 높아졌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진 정보활동이더라도 민주적 가치와 인권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민주국가에서 국민의 신뢰와 지지 없이 국가 정보기관이 합리적 존립의 근거를 확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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