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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Archive/독일 & 독일군 자료 정리

독일군 장교 교육의 특징 vs 미국 장교 교육

by leeesssong 2021. 2. 22.

출처#1. 국방일보 (dema.mil.kr)

 

창의성 중시 독일군 장교 교육… 세계대전 능력 발휘

독일군과 미군의 ‘지휘문화’ 무엇이 다른가프로이센군 시절부터 강군 이미지 군사학교에선 인성과 리더십 함양 토론 위주 수업… 임무형 지휘 숙달  美 육군, 독일군 제도 도입했지만 본질

kookbang.dema.mil.kr


ㅡ 2003년 4월 9일 이라크 자유작전 당시 미군 제3보병사단은 기습적이고 대담한 작전으로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당시 사단장 블런트 장군과 제2여단장 퍼킨스 대령이 계획하고 주도한 ‘썬더런’ 작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전투현장과 멀리 떨어져 화상으로 지휘했던 군단장 등 상급 지휘관들은 승인과정에서 이 작전계획 전부를 수용하지 않았다. 작전 시행과정에서도 많은 충돌과 갈등이 나타났다.

현장 지휘관으로서 20~30년 이상 생활한 대령과 장군을 상급 지휘관들이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공적인 전투로 종결됐기에 이런 사실들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뿐이다. 독일인 학자 요르크 무트 박사는 저서 『지휘 문화』의 결론 부분에서 이 작전계획의 승인·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미군의 지휘문화를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이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제시한 지휘문화란 ‘지휘에 대한 장교들의 인식’이며 ‘장교들이 전쟁과 전투의 대혼란과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대한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ㅡ 책은 1901년부터 1940년까지 독일군과 미군에서 어떤 교육과정을 통해 장교가 되고 장교들이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며 군을 어떻게 이끌었는지 등을 다루면서 장교 교육과정을 비교·분석한다.

연구 대상의 시대적 배경만으로는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오늘날 미군은 물론 우리 군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저작이다.

ㅡ 1866년과 1871년, 헬무트 폰 몰트케의 프로이센군은 당시 유럽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프랑스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다. 이때부터 세계 각국은 독일군을 배우고자 장교들을 파견했고, 독일군 장교 교육체계와 총참모부(Generalstab) 등의 군사제도를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미 육군은 독일군 제도를 도입하는데 가장 적극적이었다.

1802년 미 육군은 웨스트포인트를 설립해 프로이센 방식으로 운영하려 했다.

그러나 미 육군은 프로이센 교육의 본질과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세계 최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는 극도의 폐쇄주의와 권위주의로 가득한 군사학교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특히 1학년 생도들의 생활은 혹독했다.

가혹 행위가 만연했고, 군사지식과는 전혀 관련 없는 학교 건물의 전등 숫자 등을 암기해야 했다.

리더십이나 군사교육보다 수학, 과학 과목이 중시됐다.

기계·병기·토목공학에 수학 원칙을 적용해 한 치 오차도 없이 계산하고 사고하는 습관이 군사조직 지도자가 되는데 중요한 자산이라는 논리였다.

4년 후 소위가 된 이후에는 혹독한 야전의 현실에 직면해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미군 지휘참모대학의 교육수준도 그리 높지 않았다.

독일 전쟁대학을 모방해 워게임이나 도상훈련 등을 도입했지만, 교리를 맹목적으로 신봉했던 교관들이 시대착오적인 방식으로 교육했다. 학생들은 단순히 기초 군사지식을 암기·발표·기술해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남북 전쟁 당시의 개활지 전투를 가르치는 등 현대 전쟁의 실상에도 무관심했다.

세계대전에서 처절한 참호전을 경험한 장교들은 “우리가 배운 것은 허상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또 학생 장교들은 ‘학교 측 모범답안’ 그대로 표준화된 규범과 절차, 행동방식을 체득해야 했기에 창의성은 철저히 무시됐다. 교리에 벗어난 창의적인 답안을 제출한 학생들은 겨우 합격 등급을 받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불합격 처리됐다.

미군은 교관의 지시와 교리에 무조건 순응하고 나아가 야전부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며 그것이 장교로서의 갖춰야 할 자질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ㅡ 독일에는 1700년대부터 전국에 수 개의 군사학교가 있었다. 생도들은 10세 전후 소년들이었다.

그곳에서의 교육 기간은 생도가 군인, 장교로서 적합한지를 생도 스스로가, 학교가, 부모가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프로이센과 독일은 군국주의 국가로 인식되지만, 군사학교에서만큼은 가장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이 시행됐다.

학교장과 교관들은 장차 독일군을 지휘해야 할 생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변화를 추구했다.

진학과 임관에서도 학업능력뿐만 아니라 ‘인성’을 평가했다.

‘인성’은 장교의 자질인 의지력, 책임의식, 솔선수범과 진두지휘, 그리고 희생정신을 의미했고, 이는 곧 ‘리더십’이었다.

수학이나 프랑스어 성적이 다소 저조해도 ‘리더십’이 탁월한 생도는 다른 생도보다 먼저 진급하고 임관할 수 있었다.
또한 생도 대부분은 군사학교 졸업 후 장교후보생의 신분으로 야전부대에서 병사를 지휘하는 능력을 배양했고 연대장 평가에 따라 임관했다.

따라서 웨스트포인트 졸업생들처럼 좌절감을 겪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ㅡ 독일군 전쟁대학은 응용전술, 독도법 및 지형안, 무기체계, 법률 및 역사, 외국어 능력, 체력검정 등 엄격한 ‘군관구 시험(Wehrkreis-Prufung)’을 통해 소수 정예의 학생 장교를 선발했다. 교관도 당대 가장 우수한 장교들로 구성됐다.

예를 들어 롬멜이 전술교관을, 구데리안이 기계화 전술 교관을 맡았던 것이다.

교관과 교육생은 맹목적인 복종관계가 아닌 전우이자 동료로서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토론 위주의 수업을 했다.

이처럼 사고의 융통성을 함양하는 것이 독일군 장교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교육 목표는 전쟁의 혼란과 공포 속에서도 냉정하게 지휘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었다. 군 지도부는 장교들의 창의성, 주도성, 결단력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해 초급장교들의 비판적 의견을 경청하고 이를 높게 평가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독일군 장교는 임무형 지휘를 체득하고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탁월한 전술적·작전적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독일군의 장교 교육제도는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샤른호르스트, 대몰트케로 이어지는 그들만의 역사를 통해 발전됐다. 독일 정부, 군부, 민간 사회 등이 장교교육에 국가적인 관심을 기울였고 초급장교부터 야전부대 지휘관, 군부 고위지도자까지 독일군 교육제도에 자부심을 가졌다. 독일군에는 국가와 군을 위해 장교가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한 확고부동한 철학이 있었다.

ㅡ 반면, 당시 미국에서는 군에 대한 거부감이 만연했다.

군사교육을 비롯한 군사혁신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고 군내에도, 민간에도 전문가는 없었다.

장교 교육은 오로지 군과 학교 지도부만의 관심사였다.

야전부대 지휘관들도 학교 교육에 관심이 없었고 교육내용을 신뢰하지 않았다.

교육생들조차 자신들이 받은 교육에 의구심을 표출할 정도였다.

그들은 독일군의 역사와 민·군 관계, 특히 독일군에서 장교라는 계층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군의 강점을 배우려고 했지만, 그 본질에는 관심을 두지 못해 외형만 모방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강조하듯 장교 선발은 다른 어떤 직업보다 엄격해야 한다.

장교는 다방면에서 탁월해야 하고,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많은 생명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다.

우리 군도 6·25전쟁 이후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 등의 장교 교육체계를 미군으로부터 도입했고, 현재까지도 미군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미군의 독일화 교훈을 통해 우리도 장교 교육의 본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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